지난 토요일, 곧 3월 1일에는 둘째 딸아이와 서울풍물시장에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출사를 하려고 계획을 세웠다가 오히려 딸아이가 여길 가 보자고 보채는 바람에 그냥 D-lux4 하나 들고 지하철로 나왔습니다.
거리 노점이 철시되어 겉멀쩡한 시장으로 탈바꿈한 것은 서울시에서 개발한 재미없는 홈페이지를 통해 진작부터 알고 있었거니와, '2층에 담배 냄새가 심하다', '바가지 씌우는 게 도가 지나치다.' 등등의 구설들 때문에 실망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이 많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쪽으로 옮기기 전에 동대문 운동장 일부를 사용할 때에는 비록 단층이라고는 해도 분위기는 골동품 상가라기보다 고물 상가 같은 느낌이었더랬지요. 옮긴 곳은.....
여전히 마찬가지였습니다. 도저히 예상되는 고객이 있을 리 없을 고물 폐품들이 다른 상품들과 뒤섞여 있는 점포가 1층에 적지 않았습니다. 식당들도 그대로의 분위기이고... 하여튼 맘에 들지는 않습니다.
딸아이의 눈치를 대략 살피니, 토요 서초 벼룩시장 같은 곳을 상상했나 봅니다. 안 봐도 뻔하지, 포캣몬이나 요즘 한창 물이 오른 레고 피겨를 보고 싶었던 게지요. 레고 피켜는 제가 2000피스 이상 구해 주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것 말고는 동전과 우표 모으기에도 맛이 들었나 봅니다. 확실히! 둘째딸은 이 점에서 저와 닮은 데가 있습니다.
저 녹이 낀 엽전들이 가지고 싶었나 봅니다.
엽전 하나의 가격을 물으니(물론 아이가), 어디서나 오천 원을 부릅니다. 이런! 삐리리.
한 꾸러미는 이십만 원이라고 하는데, 표정은 설마 살 리가 있겠냐(누가 사겠냐)는 듯합니다.
동전은 잘 모르지만 개중 짝퉁도 있어 보이는데, 딸아이는 아직 그걸 가리는 눈(분별하는 눈이라기보다는 짝퉁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눈)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서둘러 아이를 데리고 건물 밖으로 나가 봅니다. 배가 출출하다나요. 밖에는 뭐가 있겠지... 하고 건물을 한바퀴 도는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건물 바로 바깥 쪽은 오래된 생활 잡화를 내어 놓은 상태고 가격은 쌀 리 없다는 느낌이었습니다. 1분 이상 눈을 사로잡은 것은 없었습니다.
여전히 딸아이는 뭔가 간절히 찾고 있고, 배는 고프고.... 결국 식당가에서 미숫가루 섭취. 이걸 뭐라 해야 하나, 가루가 아니니 미숫가루음료?
1층의 약 절반은 예전 황학동 벼룩시장의 골동품 상점들이 옮겨온 듯한 모양새이고, 약 20% 정도는 짝퉁 스포츠웨어와 피액스 물품(인 듯한 군용 상품) 상점이었습니다. 놀랍게도 홈쇼핑에서 29,900원에 두 개 끼워주고 세면기 막힌 곳 뚫어주는 도구까지 두 개씩 끼워주는, 뭐.라.더.라.... 아, 그거, .... 말로 설명할 수 없네.... 그 칼갈이의 중국 짝퉁 제품이 5,000원에 이곳저곳 정말 최고의 베스트셀러 제품으로 시장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3,000원에 특템.
C-레이션 한 2년쯤 되어 보이는 거라면 팔아도 되는지, 팔면 안 되는지..... 산다고 하면 먹을 수는 있는 건지 잔뜩 긴장시키는 상점도 있었습니다.
2층에 대한 이런저런 불평과 경고는 있었습니다만, 달리 갈 데가 없어져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저와 딸아이를 맞이한 첫 번째 가게는 70년대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옛 상품들-의 (아마도) 복각판들!
잠시 (이래야 풍물시장이라 할 수 있지... 같은) 생각이 왔다가 가고.
아이와 저는 이곳저곳을 '런닝맨'들처럼 돌아다녔습니다. (런닝맨 촬영이 있었지요? 내 기억에는 소녀시대가 함께 나왔던 것 같은데....) 바람처럼 돌아다녔으니 30분만에 2층을 다 보고,
자전거 간이 펌프,
라이트 거치대,
라이트 거치대 또 다른 것,
자전거 사이렌,
나침반,
나침반 있는 호루라기 등의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만랩은 도저히 불가능, 이걸로 서울풍물시장은 더 올 일이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급 실망.
혹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그것의 가치를 알고 있고, 주인장에게는 그 수많은 고물들 중 하나일 뿐이어서 그냥 쿨하게 하나 건지면 주인장도 만족하고 나도 기뻐 날뛰게 되는 그런 일.... 그러니까 Seiko Grand 시계라든가, 60년대 크로매틱 하모니카, 혹은 블루스 하모니카 세트, 아니면 쓸 만한 섹소폰(이건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서....- -;;), 낡은 만년필(인데 그라폰 파버 카스텔 같은 것이라서 그걸 모르는 주인장이 눈길도 안 주는...), 어쩌면 색 예쁜 중고 잉크병들........ 이런 것들이 후광 비치고 은은한 음악과 함께 내 눈에 나타나는 일.
-들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중고 물품이 없다고 할 정도로 저급 신품이 벼룩 시장의 '벼룩'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슬슬 집으로 돌아올 생각으로 시장 건물을 나와 건물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언뜻 보았던 노점들의 거리로 발을 옮겼습니다. 노점 몇 개 있을 거라는 생각과 여전히 출출하다는 불만, 소득이 별로 없다는 아쉬움들 때문이었지요.
그러다가 딸아이가 '엄마몰래컵라면'이라는 기막히게 맛있는 라면을 먹고 싶다고 편의점을 찾길래, 저 멀리 보이는 동대문 두타 빌딩의 양푼 비빔밥과 그 건너편 동평화시장 앞길의 설탕 뿌린 계란 토스트에 입맛을 당기며 아이를 꼬드겨 동대문까지 행진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2, 300미터쯤 걷었다가 발견한 것이 동묘공원 앞의 삼거리를 채운 벼룩시장..... 그러니까 이곳을 몰랐다기보다는 원래황학동 시장의 주변부에 있었던 점포들이기는 했는데, 서울풍물시장이 생길 때 못 들어간 점포들이 모여들어 형성된, 오히려 더 커져 버려 규모 있는 벼룩시장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시장 규모가 어느 정도 되다 보니, 노점들마다 특화가 되는 양상이 있고, 정식 상점으로 연 곳들도 그러했습니다.
아이가 고려 때의 엽전과 러시아 동전을 구입한 이 가게는 월세가 300만 원이라고 합니다. 실제 매출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분명한 것은 실제 구매에 이르지는 않더라도 아무튼 사람들이 매우 많이 꼬인다는 뜻이겠지요.
엽전(동전인지 구리전인지 뭔지 잘 몰라서....)은 2푼짜리로 다섯 개에 1원과 바꿀 수 있다는 한자 표기가 인쇄되어 있었습니다.(壹圓交五介)
하나에 2천 원. 가격은 서울풍물시장보다 나았고, 상태도 괜찮았습니다. 다만 정말 고려 때, 그러니까 천년이 넘게 지난 것인지 의심스러웠지만.... 그건 아이몫!
딸아이가 말을 정말 잘 해서(!) 러시아 동전은 그냥 얻었습니다.
서울풍물시장에서 저는 아이에게 흥정하는 법에 대해 배우게 했습니다. (가르쳤습니다가 아니라 배우게 했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흥정이 어렵다는 것은 잘 배웠을 것으로 압니다. 물건값을 깎게 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가격을 확인하고 그 가격에 맞는 돈을 지불하는 일이 모두 '내가 결정'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함이 목적이었지요.
ㅋㅋ
ㅋㅋ
손 안 대고 코도 풀긴 풀었습니다만....
이곳은 동묘 공원.
사실 태어나 처음 와 본 것 같은 기억입니다.
종묘와 동묘가 동대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원래 있었던 것인지 큰 북을 사진 찍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오른쪽에는 중문인 듯한 문 하나가 있는데 거기 표지석(? 표지판이었나?)에는 인상적인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禁雜人'
아, 나도 잡인이겠거니.....
동묘 바로 밖에는 천원에 한 장, 코트는 삼천 원 하는 중고 의류 판매 노점이 크게 판을 열어 놓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쪽은 대부분이 중고 물품입니다.
그래서 딸아이는 신이 났습니다.
토스트도 하나 먹고.... 먹다가 맵다고 안 먹고.... 내가 마저 먹고....
조금 더 구경을 하다가 돌아왔습니다.
1호선, 3호선... 이렇게 해서 돌아왔습니다.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발이 많이 피곤했습니다. 그 다음 날은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012.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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