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위한 준비/작품 더 읽기

공부를 위한 준비/작품 더 읽기

[작품읽기] 틈, 김기택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 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속에 빛을 우겨넣고 버팅겨 허리를 펴는 틈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 년의 시간, 분, 초로 나누어 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서울, 거대한 빌딩의 정글 속에서 다리 없이 벽과 벽을 타고 다니며 우글거리고 있다 지금은 화려한 타일과 벽지로 덮여 있지만 새 타일과 벽지가 필요하거든 뜯어보라 두 눈으로 확인해보라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든 천연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틈! 틈, 틈, 틈, 틈틈틈틈틈....... 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

공부를 위한 준비/작품 더 읽기

[작품읽기] 고재종, 초록 바람의 전언

뒷동산 청솔잎을 빗질해주던 바람이 무어라 무어라 하는 솔나무의 속삭임을 듣고 푸른 햇살 요동치는 강변으로 달려갔다 하자. 달려가선, 거기 미루나무에게 전하니 알았다 알았다는 듯 나무는 잎새를 흔들어 강물 위에 짤랑짤랑 구슬알을 쏟아냈다 하자. 그 의중 알아챈 바람이 이젠 그 누구보단 앞들 보리밭에서 물결치듯 김을 매다 이마의 구슬땀 씻어올리는 여인에게 전하니, 여인이야 이윽고 아픈 허리를 곧게 펴곤 눈앞 가득 일어서는 마을의 정자나무를 향해 고개를 끄덕끄덕, 무언가 일별을 보냈다 하자. 아무려면 어떤가, 산과 강과 들과 마을이 한 초록으로 짙어가는 오월도 청청한 날에, 소쩍새는 또 바람결에 제 한 목청 다 싣는 날에. 1. ○ '전언'. 전하는 말. 발신자의 메시지가 수신자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이를 전달..

공부를 위한 준비/작품 더 읽기

[작품 읽기] 이수익, 회전문

대형 빌딩 입구 회전문 속으로 사람들이 팔랑팔랑 접혀 들어간다 문은 수납기처럼 쉽게 후루룩 사람들을 삼켜버리고 들어간 사람들은 향유고래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간 물고기 떼처럼 금방 잊혀진다 금방 잊혀지는 것이 그들의 존재라면 언젠가는 도로 토해지는 것은 그들의 운명, 그들은 잘 삭은 음식 찌꺼기 같은 풀린 표정으로 별빛이 돋아나는 시간이나, 또는 그 이전이라도 회전문 바깥으로 밀려난다 그렇다니까, 그것은 향유고래의 의지 때문이 아니라 빨려들어간 물고기 떼의 선택 때문이지 오로지 그들 탓이라니까 그러나 대형 빌딩은 이런 무거운 생각과는 멀리 떨어져 하루종일 팔랑팔랑 회전문을 돌리면서 미끄러운 시간 위에서 유쾌하게 저의 포식을 노래한다 룰루랄라 룰루랄라 룰룰루…… 지금은 회전문의 움직임이 완고하게 멈춘 시간..

공부를 위한 준비/작품 더 읽기

[작품읽기] 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렷스랴 모든 山脈들이 바다를 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여선 지고 큰 江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千古의 뒤에 白馬 타고 오는 超人이 있어 이 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陸史詩集, 1946) 1. 해석은 맥락적 단서가 최소화되더라도 가능한 것부터 시도하면서 확장시키는 것이 합당하다.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여 국지적으로 표현된 것과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말하자면, 다른 해석이 그다지 높은 설명력을 갖지 못할 경우 취하게 되는 ‘유보적 판단’의 경우에 한한다. 2. 이런 점에서 여전히 논..

공부를 위한 준비/작품 더 읽기

[작품읽기] 그릇1, 오세영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이 작품은 비유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느닷없는 '이성의 차가운 / 눈을 뜨게 한다'는 주제적 진술이 붙어 버림으로써 힘이 빠져 버렸지만, 전체적으로는 비유적 진술임에도 불구하고 시적 구성을 취하는 데 긴장감이 유지된다는 점에서는 시적 성취가 성공적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니까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가 작품에는 아쉬운 지점이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에서 그릇은 절제와 균형의 중심으로 존재하며, 확장..

공부를 위한 준비/작품 더 읽기

[시집 읽기]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읽기

1. 이끄는 말 오늘 우리는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읽어 보려고 합니다. 윤동주 시인은 1917년 겨울 북간도에서 태어나 조선이 해방되기 불과 몇 개월 전인 1945년 2월에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친 분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는 불운했던 문학 청년이었습니다.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해 보지도 못했고, 출판마저 어려워 어찌어찌하여 그가 죽은 뒤에야 남아 있던 필사본으로 시집을 엮어낼 수 있었던, ‘시인’이라는 이름도 살아 있을 때에는 누려보지 못했던 안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의 시집을 함께 읽습니다. 그의 사후에 사람들이 그에게 ‘저항시인’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 까닭에, 그는 연희 전문 시절의 미소를 띤, 한껏 여유 있는 젊은 청년으로 사진 속에 남아 있습니다...

공부를 위한 준비/작품 더 읽기

[작품읽기]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김영랑 (원고)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은결을 돋우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1989년 어느 날 TV 광고 하나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 무렵 상업 광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광고 역시 광고음악이 배경이 아닌 전면적 메시지를 이루고 있었는데, 여기서 사용된 노래는 그 후 수십 년 동안 시청자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광고음악 중 하나가 되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눈빛만 보아도 알아 그냥 손 잡으면 음~ 마음속에 있다는 걸 몸짓만 봐도 알아요 미소만으로도 좋아 돌아 생각해보면 음~ 마음속에 있다는 걸 특별한 대사나 설..

공부를 위한 준비/작품 더 읽기

[작품읽기] 이런 시(詩), 박목월

슬며시 다가와서 나의 어깨를 툭치며 아는 체 하는 그런 詩, 대수롭지 않게 스쳐가는 듯한 말씨로써 가슴을 쩡 울리게 하는 그런 詩, 읽고 나면 아, 그런가부다 하고 지내쳤다가 어느 순간에 번개처럼 번쩍 떠오르는 그런 詩, 투박하고 어수룩하고 은근하면서 슬기로운 그런 詩 슬며시 하늘 한자락이 바다에 적셔지 듯한, 푸나무와 푸나무 사이의 싱그러운 그것 같은 그런 詩, 밤 늦게 돌아오는 길에 문득 쳐다보는, 갈라진 구름 틈서리로 밤하늘의 눈동자 같은 그런 詩. 이 작품이 수업에서 사용이 되기라도 했나? 갑자기 몇 번의 구독수가 생겼다. 그걸 알게 되고 나서 들어와 보니, '응, 나중에 이 시를 가지고 엮어읽기든 작품 해설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적어 놓았던 것 같다. 그러고 한참을 잊고 있었던 셈인데, 비공..

공부를 위한 준비/작품 더 읽기

[작품 읽기] 섬세한 읽기(cloze reading)로 '상행'(김광규) 읽기

김광규의 '상행'은 반어로 이루어져 있는가? 정호승의 '또 기다리는 편지'에 대한 현장 선생님의 질문에 답하는 글을 올려 놓고 시간이 좀 지났는데 그 글을 읽으신 블로거 박유주 님이 김광규의 '상행'에 대해 댓글로 질문했다. 질문 내용은, 이 시는 반어적 어조를 가지고 있는가, 이 시는 현실을 비판한 시인가이고 답변의 조건은, '김광규 시인의 배경이나 시 본문만으로는 알 수 없는 정보는 배제'하라는 것이다. 반어라는 것부터가 답변의 조건에서 벗어난 정보여서 조건에 맞게 답하기가 곤란하지만 사고의 도구로서 문학적 개념들을 이 조건에서 예외로 하고 답변을 해 보기로 한다. 먼저 시를 읽어 보자. 상행(上行), 김광규 가을 연기 자욱한 저녁 들판으로 상행 열차를 타고 평택을 지나갈 때 흔들리는 차창에서 너는 ..

공부를 위한 준비/작품 더 읽기

내면을 그려내는 방식 (기형도의 '빈 집')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이중적 공간으로서의 집 집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 이상한 공간이다. 그것은 보호하는 곳이며 또한 유폐시키는 곳이다. 옛말에 ‘하늘을 지붕 삼고, 구름을 이불 삼고’라는 말이 있어 의지할 데 없는 고아, 정처(定處)할 곳 없이 떠도는 방랑자의 안쓰럽고 서글픈 신세를 빗대었으니, 그래도 쉼을 얻을 수 있고 평온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작지만 지붕이 있어 비를 막아주고 벽이 있어 바람을 ..

misterious Jay
'공부를 위한 준비/작품 더 읽기' 카테고리의 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