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

공부를 위한 준비/작품 더 읽기

[작품읽기] 고재종, 초록 바람의 전언

뒷동산 청솔잎을 빗질해주던 바람이 무어라 무어라 하는 솔나무의 속삭임을 듣고 푸른 햇살 요동치는 강변으로 달려갔다 하자. 달려가선, 거기 미루나무에게 전하니 알았다 알았다는 듯 나무는 잎새를 흔들어 강물 위에 짤랑짤랑 구슬알을 쏟아냈다 하자. 그 의중 알아챈 바람이 이젠 그 누구보단 앞들 보리밭에서 물결치듯 김을 매다 이마의 구슬땀 씻어올리는 여인에게 전하니, 여인이야 이윽고 아픈 허리를 곧게 펴곤 눈앞 가득 일어서는 마을의 정자나무를 향해 고개를 끄덕끄덕, 무언가 일별을 보냈다 하자. 아무려면 어떤가, 산과 강과 들과 마을이 한 초록으로 짙어가는 오월도 청청한 날에, 소쩍새는 또 바람결에 제 한 목청 다 싣는 날에. 1. ○ '전언'. 전하는 말. 발신자의 메시지가 수신자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이를 전달..

공부를 위한 준비/문학범주

[개념의 자리] 공간의 경계, 김소월, '산유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 김소월, 일반적으로 우리가 경험한다고 여기는 공간은 구획되어 있는 장소로 이루어져 있다. 구획됨에 의해 공간은 나뉘고 각 나뉜 공간들은 기능적으로 구분된다. 또한 나뉜 공간들은 나뉘어져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정체성을 공간의 중심에 둔다. 그 정체성의 힘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공간은 구획되는 경계를 갖게 되고 그 경계 내부에 정체성의 거주지를 만드는 것이다. (김소월)에서 '저만치'라는 심리적 거리를 읽어낸 김동리의 해석은 꽤나 설득력 있는 시도였다. 이 어휘가 조성하는 거리감은 닿을 듯하면서도 닿..

공부 중

[인용] 庸工難用 連抱奇材

우연히 이 문구를 인용으로 봤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야. 庸工難用 連抱奇材 (通鑑) 材大難用 (莊子) 직접적인 의미로도 뜻이 깊고 함축된 바도 뜻이 깊네 그리고 안중근의 이 유묵도.

시 쓰고 웃었다

[自作詩] 신분세탁자

주민센터에 들어서자 그 중 누군가의 눈빛이 빛난다 빛났을 거라 생각한다 그는 그의 빛나는 눈빛을 숨길 수 있었을 것이므로 그는 특별한 평범한 사람이다 9급 지방공무원으로 접수대 앞에 앉아 있지만 5급 국가공무원 급의 명예와 4급 국가공무원 급의 책임감으로 모 국가기관에 채용된 지 10년 차 비밀요원이다 일종의 파견으로 저 자리에 앉아 있는 그는 언제나 평범한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렇다는 거다 나는 그의 존재는 알지언정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므로 저 접수대 앞에 앉은 평범한 일곱 명의 한 사람으로 저렇게 앉아 있는 것이다 혹은 일곱 명 전부일는지도 모르지 그는 첨단 정보 기술을 훈련 받지 않았다 그랬더라면 7년 묵은 컴퓨터로 AR VR에 못 뽑아내는 정보가 없는 그의 신통한 능력이 들통나지 않을..

공부를 위한 준비/작품 더 읽기

[작품 읽기] 이수익, 회전문

대형 빌딩 입구 회전문 속으로 사람들이 팔랑팔랑 접혀 들어간다 문은 수납기처럼 쉽게 후루룩 사람들을 삼켜버리고 들어간 사람들은 향유고래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간 물고기 떼처럼 금방 잊혀진다 금방 잊혀지는 것이 그들의 존재라면 언젠가는 도로 토해지는 것은 그들의 운명, 그들은 잘 삭은 음식 찌꺼기 같은 풀린 표정으로 별빛이 돋아나는 시간이나, 또는 그 이전이라도 회전문 바깥으로 밀려난다 그렇다니까, 그것은 향유고래의 의지 때문이 아니라 빨려들어간 물고기 떼의 선택 때문이지 오로지 그들 탓이라니까 그러나 대형 빌딩은 이런 무거운 생각과는 멀리 떨어져 하루종일 팔랑팔랑 회전문을 돌리면서 미끄러운 시간 위에서 유쾌하게 저의 포식을 노래한다 룰루랄라 룰루랄라 룰룰루…… 지금은 회전문의 움직임이 완고하게 멈춘 시간..

공부를 위한 준비/문학적 주제들

[또 역설]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이것은 역설인가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먼지 앉은 석경 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새벽에 준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젖어 있듯이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 있을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 김수영, 1연 또 역설에 대해 글을 쓰게 되었다. 쉽지 않은 주제이다. 하지만 오늘 쓰는 글은 어려운 주제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지극히 단순한 혼동에 관한 것이다. 역설에 대한 지식이 잘못 투입되는 예를 확인하는 것이다. 김수영의 는 밭에 심은, 어느 덧 말라 죽은 것 같은 마른 파..

공부를 위한 준비/문학범주

[개념의 자리] 일상의 아이러니

일상의 아이러니이상, , 박세영, , 이성복, , 기형도, 1 ‘일상(日常)’은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 혹은 항상 그러함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 딱히 주목할 만한 대상도 없고 그렇게 만드는 눈에 띄는 어떤 것도 없다. 어떤 일도 일어나고 있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그래서 오히려 무상(無常)할 뿐이다. 그런데 문득 빈틈이 하나 보인다. 일상의 빈틈 사이로 일상의 질서를 뒤흔드는 낯선 무엇인가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보았다고 확신하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더 이상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다음 두 가지 반응 중 어느 하나를 택하게 된다. “모든 것이 가짜야, 트루먼. 모든 사람이 너를 알고 있고, 이 모든 게 널 위해 만들어졌지.” - “의사 체험도 꿈도 존재하는 정보는..

misterious J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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