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노트북엔 왜 키보드가
노트북은 간편하라고 준비해 놓고 키보드가 작아 어색하다 어색하지만 노트북보다 더 큰 키보드를 꺼내 키보드 앞에 키보드 놓고 글을 쓴다 쓰지 않는 키보드는 먼지 먹어 쓸 수 없고 쓰는 키보드는 거추장스러워 갑갑하다 노트북은 골렘처럼 커 간다 나갈 일 있어도 노트북은 키보드 없이 나가지 못한다 도무지 가방 안이 또 갑갑하다 그냥 책상 위에 놓아두고 이 모든 건 저 쓰지 않는 키보드 탓이다 (2008. 03)
노트북은 간편하라고 준비해 놓고 키보드가 작아 어색하다 어색하지만 노트북보다 더 큰 키보드를 꺼내 키보드 앞에 키보드 놓고 글을 쓴다 쓰지 않는 키보드는 먼지 먹어 쓸 수 없고 쓰는 키보드는 거추장스러워 갑갑하다 노트북은 골렘처럼 커 간다 나갈 일 있어도 노트북은 키보드 없이 나가지 못한다 도무지 가방 안이 또 갑갑하다 그냥 책상 위에 놓아두고 이 모든 건 저 쓰지 않는 키보드 탓이다 (2008. 03)
오후는 아직 멀고 나는 집을 나서 살던 옛 동네 응암동의 언덕을 향한다 거기엔 언제나 까만 염소의 등을 쓰다듬고 있는 빵모자 쓴 꼬마 아이가 있다 아이는 언덕 아래를 말끄러미 내려다보며 작고 동그란 눈을 빛낸다 미안하게도 나는 아이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아마 그건 아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이의 어깨를 짚을 수 없는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나는 아이의 내일을 마치 아이가 나의 어제를 비추어보듯이 비추어본다 아이는 언덕을 내려와 세상에 집을 짓는다 집 너머로 멀리 산이 보이고 그 앞에 언덕이 있다 아이는 꿈을 꾼다 앞산 너머에 바다가 있다 아이는 언덕을 향해 내달린다 앞산 너머에 태양이 숨어 있다 한 패의 소년들이 집 앞으로 몰려든다 열세 살 소년이 별을 달고 여덟 살 소년이 나무 기관총을 매고 여섯..
일요일 아침 초원의 집 흑백 텔레비전 속 푸른 들판 그 들판의 세 소녀는 향기로운 시내와 공기들의 한가로운 숨소리를 따라 어울리다가 구름들이 저 멀리에 어깨를 맞춘 언덕의 나무 밑에서 잠시 쉬고 있었지 배워야 할 것들이 제 스스로 가르쳐 주는 배워야 할 것들에서 배움을 얻는 절망이 제 스스로 위안을 주는 초원의 작은 집 세상의 모든 학교 (2008.04.17)
아빠, 병아리가 죽었어 작은 딸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응, 그래, 그렇구나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그냥 그렇다고 맞장구치고는 신문을 넘긴다 넘기다가 이상하기도 해라 우리집에선 병아리를 키운 적이 없다 나 모르게 꾸미고 있을지도 모르는 가족들의 음모 아이의 비밀 궁금하구나 익숙한 집안 탐문하는 시선 나 없이 이루어졌을 역사의 흔적을 찾아 아닌 척 집안을 살피다가 창가쯤 눈이 멈추었을 때 화들짝 놀란 보라색 튤립 두 송이 옆에선 꽃봉오리 떨어진 대롱이 힘없이 기댄 창가 아빠, 빨간 내 병아리 금세 내 옆으로 달려와 치켜 올려든 손에 길에 떨어져 있었다는 빨간 죽은 병아리 아무리 봐도 시든 튤립 한 송이 (2008.04.19)
너무 자주 화 낸다 절반은 아이 때문이라 치고 절반은 이유를 알 수 없다 화를 내는 게 훈계가 될 수 없기에 그냥 화만 내고 있다 화를 낸 까닭에 화 난다 화를 내고서도 카타르시스는 오지 않는다 같은 얼굴을 하고서 억울해 하는 아이를 본다 성이 나 있고 골이 나 있다 그러니까 화가 난 게다 그냥 화만 내는 게 아니라 야단을 치고 꾸중을 한다 야단을 잔뜩 맞고 절반의 이유는 알겠다 절반은 이유가 없다 스스로 다스려지지 않는 것에 화를 내면서 다스릴 수 없는 것에 화를 내고서 곧장 야단을 맞고 나니 그제서 온다, 열패감의 카타르시스 (2008.04)
바뀌고 나서 안도의 왁자지껄함이 방해 없는 침묵으로 함께 바뀌었다 바뀌었는데 아무도 기척도 않고 사방이 고요하고 바뀌는 게 없다 우습게도 휴식도 모멘텀도 사라졌다 일년 삼백예순날이 계속 돌아간다 덜컹거리는 것도 없이 바뀌는 것도 없이 (2008.04)
- 오늘의 할일은 내일로 미루고 부지런히 부르면서 - 내일의 할일은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하는 건 결국 마찬가지라는 -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다 알고 보면 더할 수 없이 심오한 저항의 노래를 부르면서 -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다 싱겁게 웃으면서 - 아니다 노는 게 더 좋다 놀면서 - 아니다 노는 게 더 좋다 공부와 마찬가지인 놀이를 즐겼지 - 오늘의 할일은 내일로 미루고 불안한 공기를 떨쳐내려고 - 내일의 할일은 하지 않는다 뿌리치려고 -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골방에 들어가 계속 놀고 -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골방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고 - 아니다 노는 게 더 좋다 개중엔 내일의 시위를 준비하고 - 아니다 노는 게 더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저항은 - 오늘의 할일은 내일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