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4

시 쓰고 웃었다

[쓰다] 노트북엔 왜 키보드가

노트북은 간편하라고 준비해 놓고 키보드가 작아 어색하다 어색하지만 노트북보다 더 큰 키보드를 꺼내 키보드 앞에 키보드 놓고 글을 쓴다 쓰지 않는 키보드는 먼지 먹어 쓸 수 없고 쓰는 키보드는 거추장스러워 갑갑하다 노트북은 골렘처럼 커 간다 나갈 일 있어도 노트북은 키보드 없이 나가지 못한다 도무지 가방 안이 또 갑갑하다 그냥 책상 위에 놓아두고 이 모든 건 저 쓰지 않는 키보드 탓이다 (2008.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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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초원의 집 1

오후는 아직 멀고 나는 집을 나서 살던 옛 동네 응암동의 언덕을 향한다 거기엔 언제나 까만 염소의 등을 쓰다듬고 있는 빵모자 쓴 꼬마 아이가 있다 아이는 언덕 아래를 말끄러미 내려다보며 작고 동그란 눈을 빛낸다 미안하게도 나는 아이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아마 그건 아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이의 어깨를 짚을 수 없는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나는 아이의 내일을 마치 아이가 나의 어제를 비추어보듯이 비추어본다 아이는 언덕을 내려와 세상에 집을 짓는다 집 너머로 멀리 산이 보이고 그 앞에 언덕이 있다 아이는 꿈을 꾼다 앞산 너머에 바다가 있다 아이는 언덕을 향해 내달린다 앞산 너머에 태양이 숨어 있다 한 패의 소년들이 집 앞으로 몰려든다 열세 살 소년이 별을 달고 여덟 살 소년이 나무 기관총을 매고 여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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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초원의 집 2

일요일 아침 초원의 집 흑백 텔레비전 속 푸른 들판 그 들판의 세 소녀는 향기로운 시내와 공기들의 한가로운 숨소리를 따라 어울리다가 구름들이 저 멀리에 어깨를 맞춘 언덕의 나무 밑에서 잠시 쉬고 있었지 배워야 할 것들이 제 스스로 가르쳐 주는 배워야 할 것들에서 배움을 얻는 절망이 제 스스로 위안을 주는 초원의 작은 집 세상의 모든 학교 (200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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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죽은 빨간 병아리

아빠, 병아리가 죽었어 작은 딸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응, 그래, 그렇구나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그냥 그렇다고 맞장구치고는 신문을 넘긴다 넘기다가 이상하기도 해라 우리집에선 병아리를 키운 적이 없다 나 모르게 꾸미고 있을지도 모르는 가족들의 음모 아이의 비밀 궁금하구나 익숙한 집안 탐문하는 시선 나 없이 이루어졌을 역사의 흔적을 찾아 아닌 척 집안을 살피다가 창가쯤 눈이 멈추었을 때 화들짝 놀란 보라색 튤립 두 송이 옆에선 꽃봉오리 떨어진 대롱이 힘없이 기댄 창가 아빠, 빨간 내 병아리 금세 내 옆으로 달려와 치켜 올려든 손에 길에 떨어져 있었다는 빨간 죽은 병아리 아무리 봐도 시든 튤립 한 송이 (2008.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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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골이나 있다

너무 자주 화 낸다 절반은 아이 때문이라 치고 절반은 이유를 알 수 없다 화를 내는 게 훈계가 될 수 없기에 그냥 화만 내고 있다 화를 낸 까닭에 화 난다 화를 내고서도 카타르시스는 오지 않는다 같은 얼굴을 하고서 억울해 하는 아이를 본다 성이 나 있고 골이 나 있다 그러니까 화가 난 게다 그냥 화만 내는 게 아니라 야단을 치고 꾸중을 한다 야단을 잔뜩 맞고 절반의 이유는 알겠다 절반은 이유가 없다 스스로 다스려지지 않는 것에 화를 내면서 다스릴 수 없는 것에 화를 내고서 곧장 야단을 맞고 나니 그제서 온다, 열패감의 카타르시스 (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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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막차가 심야로

바뀌고 나서 안도의 왁자지껄함이 방해 없는 침묵으로 함께 바뀌었다 바뀌었는데 아무도 기척도 않고 사방이 고요하고 바뀌는 게 없다 우습게도 휴식도 모멘텀도 사라졌다 일년 삼백예순날이 계속 돌아간다 덜컹거리는 것도 없이 바뀌는 것도 없이 (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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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마찬가지

- 오늘의 할일은 내일로 미루고 부지런히 부르면서 - 내일의 할일은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하는 건 결국 마찬가지라는 -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다 알고 보면 더할 수 없이 심오한 저항의 노래를 부르면서 -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다 싱겁게 웃으면서 - 아니다 노는 게 더 좋다 놀면서 - 아니다 노는 게 더 좋다 공부와 마찬가지인 놀이를 즐겼지 - 오늘의 할일은 내일로 미루고 불안한 공기를 떨쳐내려고 - 내일의 할일은 하지 않는다 뿌리치려고 -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골방에 들어가 계속 놀고 -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골방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고 - 아니다 노는 게 더 좋다 개중엔 내일의 시위를 준비하고 - 아니다 노는 게 더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저항은 - 오늘의 할일은 내일로 미..

misterious J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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