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기의 ‘폭포’와 김수영의 ‘폭포’에 대한 해석
이하는 2006년 11월 11일에 당시 2학년이었던 우기성 학생이 개인 메일로 물어왔던 질문입니다. 함께 읽어도 괜찮을 것 같아서 litedu.net에 옮겨 두었던 것을 플렛폼 이전으로 다시 함께 옮겨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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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폭포
이형기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斷末魔)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이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石炭紀)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墜落)을.
나의 자랑은 자멸(自滅)이다.
무수한 복안(複眼)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盲目)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폭포
김수영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이형기의 ‘폭포’에서의 상징적 의미를 ‘인간의 삶에 대한 비극적 이미지’라고 하면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두시에서 서정적 자아의 현실인식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형기의 ‘폭포’는 삶의 일상에서 느끼는 존재의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이라는 관념의 세계를, 김수영의 ‘폭포’는 진실된 양심의 소리를 세차게 토해 내는 '깨어 있는 자'의 모습으로 형상화했다고 하는데 차이점이라고 쉽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형기 폭포는 현실에 인식을 겉으로 드러나도록 적극적으로 표현했고, 김수영은 부정적인 현실을 인식하고 현실 대응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됩니다 .
답변 부탁드립니다.
[A]
과연 폭포가 우리의 관념 속에 형성된, 저 높은 곳에서 굵게 그리고 무섭게 내리꽂히는 물줄기로 모양을 갖춘 그런 대상으로 현실에서도 발견되느냐고 묻는다면, 직접 경험했든 간접적으로 미디어를 통해 보았든 간에 그런 경험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대놓고 말하자면, 이형기의 시에서나 김수영의 시에서 목격한 폭포는 관념적 경험의 대상이다. 그렇게 날카롭고 그렇게 단도직입적이 폭포란, 적어도 (간접 경험까지 포함하여) 내 경험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그럴듯하게 보인다는 폭포 거의 바로 밑에서 쳐다본 나이아가라 폭포도 정신이 하나도 없이 그냥 쏟아져 내리고 세차게 포말을 쏴 대는구나 하는 느낌이었지 송곳 같지도 망치 같지도 도끼 같지도 소나기 같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다시금 말하자면 위 두 시에서 폭포는 그 단어를 꺼내든 순간부터 이미 관념 속에서 구성하여 끌어낸 추상적 대상인 것이다.
이제 이렇게 발견한 폭포에 시인들이 어떤 장식을 했느냐를 살필 시간이다. 이미 경험 대상으로서의 폭포에 대해, 그것이 눈으로 본 것이 아닐 것이라고 했으니 하는 수 없이, 본 것에서 무엇을 빼고 덧붙여 모양을 변형시킨 폭포를 형상화했으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려워졌다. 그 반대로 관념을 구체화하면서 상을 입혔다고 봐야 한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시적 대상은 온전히 시인이 창조해 낸 세계이다. (물론 직접 본 것을 시적으로 형상화했다고 했더라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 편이 설명하기는 좀 더 쉽다.) 그 세계는 어떠한가?
이형기의 ‘폭포’는 일차적으로는 시각화를 통해 형상화를 시도하고 있으나, 형상성의 초점은 강렬한 통증의 감각에 있다. 이것은 폭포가 관조의 대상이라거나 미적 세계로서 독립되어 있지 않고, 곧장 서정적 주체와 연동된, 곧 주체의 자각을 불러내는 시적 계기로서 존재함을 의미한다. 치명적 상처의 결과로서 존재성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되짚어보면, 우선 작품에서 주목할 부분은 폭포가 작품 전체의 역설 구조를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국부적으로는 이를테면 “벼랑의 직립(直立) / 그 위에 다시 벼랑이 솟는다.” 같은 표현을 통해. 이것은 마치 원형 고리의 부재하는 중심부가 고리의 존재성을 증명하는 것처럼 벼랑은 폭포가 갈라내 버린(그렇게 시적 상상이 되는) 폭포의 존재 증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 이면의 본질에서는 ‘단말마(斷末魔)’, ‘종말’, ‘추락(墜落)’, ‘박살나는 맹목(盲目)의 눈보라’처럼 폭포수가 바닥에 떨어진 바로 그 순간, 곧 폭포가 사멸하는 그 순간, 그 끄트머리에서 폭포의 존재성을 확인 받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서정적 주체에게 삶의 원리처럼 각인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 시 구절의 풀이에 도달하게 된다. “나의 자랑은 자멸(自滅)이다.” 시의 전체 구조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 구절의 풀이는 “나의 자랑은 자멸할 것이다.(→ 이렇게 읽는 독자는 ‘자랑이란 결국 덧없는 것이다’로 이해하게 된다.)”이거나 “나의 자랑은 자멸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읽는다면, ‘자멸한다는 것은 오히려 내게 자랑이 된다.’로 이해하겠지.)가 되겠는데, 물론 후자가 더 적절하다.
김수영의 ‘폭포’는 이형기와는 다르게 관념화의 방향으로 진행된다. 먼저 서정적 주체 자신이 이 폭포를 ‘규정할 수 없는 물결’,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 폭포는 애당초 경험된 폭포도 아니었지만 경험될 수 있는 폭포로도 형상화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폭포는 정신의 상태로서 서정적 주체 앞에 존재한다. 폭포가 지닌 속성은 ‘떨어진다’는 것이며 어떤 의미도 없이, 형상도 없이 떨어지는 것은 폭포의 유일한 속성이다. 이 속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폭포에서 소리만 남긴다. 박지원은 ‘일야구도하기’에서 “소리와 빛은 외물이다. 외물은 언제나 귀와 눈에 누가 되어 사람들이 보고 듣는 바른 길을 잃어버리도록 한다.”라고 썼지만, 김수영의 ‘폭포’에서 소리는 열하의 굉포한 강물 소리와는 달리 ‘곧은 소리’이며 물방울과 물방울이 서로 튀며 부딪혀 만들어내는 감각적인 소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박지원의 생각과 과히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두 작품은 몇 가지 측면에서 대비되는 바 있다. 김수영에게 ‘폭포’는 떨어진다는 지향성이 무엇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종결점을 지니지 않은 폭포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이형기의 ‘폭포’와는 달리 바닥에 부딪혀 사라지게 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폭포가 아니라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도 쉴 사이 없이 곧게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폭포가 된다. 그것을 서정적 주체는 ‘곧다’고 받아들이며 ‘고매한 정신’ 같다고 말한다. 윤동주 식 어법이 아닌 바에야 이것은 고매한 정신을 말하기 위해 곧게 떨어지는 폭포를 끌어들인 것이라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해석하는 것이 합당하니, 이형기는 형상을 통해 통각을 강화했다면, 김수영은 청각을 통해 비감각을 강화한 것이고, 각기 이를 통해 얻고자 한 바도 한 쪽이 주체의 삶의 자세라면 다른 한 쪽은 객관화된 정신의 존재 방식이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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