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캐나다 방문교수를 가 있던 2003년 9월에 서신 삼아 리테두넷(litedu.net)에 남겨두었던 글을 플랫폼 변경으로 인해 이곳으로 옮겨 둔 것입니다.
밴쿠버는 습기가 많은 도시입니다. 가을철로 접어들면서 더욱 그렇습니다. 하긴 이곳을 오기 전부터 여러 사람이 여름을 지내고 나면 비로소 비와 더불어 살 거라고 얘기해 주었는데, 실감하고 있습니다.
바다가 늘상 내 옆자리를 지키고 있고, 안개와 비와 진눈깨비가 이틀이 멀다하고 이 가을을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래도 바다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이곳 밴쿠버는 감성적인 도시라고 합니다. 아침의 깊고 푸른 바다를 스텐리 공원을 배경으로 바라볼 때면, 한낮에 울울창창한 수많은 숲속을 걸을 때면(4시면 벌써 퇴근들을 하고 있습니다. 벌써? 이곳 사람들은 새벽 7시면 일하기 시작한다네요. 뭐, 내 생활 리듬은 이곳에서도 굳건히 유지되고 있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8시에 이미 다들 일하고 있는 모습은 몇 번 보았지요. 앗차차- 오늘 11월 24일 오후 4시 반인데 해가 저물었습니다. T_T), 늦은 오후 짙은 안개밭을 지날 때면, 황혼녘의 지는 해를 볼 때면.....
정정합니다. 요즈음은 거의 매일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있으니까 위의 것은 잘 맞지 않네요. 하지만, 어쨌든 하루 종일 내리는 비를 보고 있을 때면, 자살의 충동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그걸 말하려고 이 글을 쓴 건 아닙니다.
어제는 오랜만에 TV를 시청했지요. UBC 내의 Faculty House가 좋은 몇 가지 이유가 있어요. 그 중에 하나는 기본 유틸리티 비용을 포함한 월세에 기본 채널이 50개가 넘는 TV수신이 제공된다는 것이지요. TV 수상기는 와이드 TV. 날 초청한 이곳 교수께서 그냥 빌려주신 이 명품은 80년대 초반 제작한 소니의 초기 리모콘 사용 모델입니다. 실은 상태가 좀 좋지 않아 화면의 위와 아래가 잘려 있습니다.고맙게도 덕분에 늘상 모든 프로그램을 와이드 화면으로 보고 있는 중이지요.
그런데, 그 화면에 이글스(eagles)가 나온 거예요.
2003.09.
80년대 초반에 나를 미치게 했던 이글스
Los Angeles보다 아름다운 곳인 West Coast에서 음악 활동을 했던 이글스
Hotel Califonia보다 아름다운 노래인 I Can't Tell You Why를 불렀던 이글스
으흐흐....
소파에 푹 몸을 담그고 무릎을 모아 턱에 괴고 열중을 했습니다.
Hell Freeze Over라는 공연의 중계(사실은 이것 DVD로 나왔지요. DVD 틀어주는 거였는데....)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지요.
역시 나왔군요.
I Can't Tell You Why
문득 Timothy B. Schmit의 눈을 보았습니다.
십여 년 이상을 잊고 있었나 봅니다. 내게 저런 눈이 있었더랬는데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I can't tell you why.
문득 내 삶의 무료함이 전혀 투정같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나 정말 헛 살고 있는지도 몰라.
한때 나도 그들처럼 살 기회가 있었단 말이지요.
그 눈가에, 눈동자에, 감은 눈의 두어 줄 떨리는 선 위에
비굴함이 느낌 그대로
조급한 욕정이 느낌 그대로
어깨를 기대면 몸이 푹 가라앉는 것처럼 편해지는 몰입이 느낌 그대로
둘째 딸 정윤이의 얼굴 표정에 나타난 것 같은 기쁨이 느낌 그대로
왜소해지는 아빠와 남편의 지위로 당황하는 불안과 조바심이 느낌 그대로
뭐 그런 느낌들이 숨겨지지 않고
원시적으로 느껴지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기회가 말이에요.
잊고 있었어요.
번듯한데, 쑥 빠져버린 신발처럼 발을 뺄 수도 없고 그대로 있을 수도 없는
어설픈 삶의 모습으로 살고 있었단 말이지요.
나 어떡하죠? 너무 똑똑해져 버렸어요.
빨리 바이올린 교습소나 찾아봐야겠어요.
죽기 전에 배워야겠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던 것의 하나였거든요.
아이스하키도 배워야겠고(골프는 못 배우더라도)
사진 열심히 찍어서 수만 장을 만든 다음에 우연히 잘 나온 사진으로 전시회도 열어야겠고
대학원도 새로 다녀야겠고.
그런데 책도 내야 하는데......
나 어떻게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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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서 손해 보는 덧글.
시간이 나니까 별 쓸 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네 하고, 또 문득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데 시간 없습니다. 억지로 이 글 쓰고 있습니다. 머리는 그만 쓰고 아침에 사용할 회의자료 준비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벌써 아침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황해 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흔에 철부지 같은 생각하고 있어서....
그 철부지가 그리워지고 있어서 다시 적잖이 당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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