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2004년 5월 18일에 리테두넷(litedu.net)에 올린 글입니다. 플랫폼 변경으로 이곳으로 옮겨 둡니다.
구상 시인을 추모하며
2004-05-18 07:41:06
(이 사진은 당시의 모습이 아니다. 80년대 후반 '공간 사랑'의 시낭송회에서, 박희진 시인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문학 소년은 문학 청년으로 크다가 시인으로 장성하지 못했다. 하긴, 그 시절 같은 또래로 함께 습작하던 친구들이 모두 그러했으므로 그리 유감스러운 일도 아니다. 재능이 없다고 되물린 이런 저런 취향들마냥 내게 시를 쓰는 일은 재능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떤 사건들은 적어도 문학 청년으로는 좋은 계기였다고 할 수 있겠다. 모든 일이 그렇듯, 계기는 우연히, 멀고 먼 우회를 거쳐, 아는 듯 모르게 찾아오는 법이다.
그 중 어떤 계기에 관한 이야기다.
한껏 기교를 부려 시를 쓰던 고등학교 시절, 그냥 과거의 한때로서가 아니라 80년의 고등학교 시절, 학교는 선생님들의 흘러간 개인사들이 삐죽이며 돌출하는, 마치 거의 다 짜낸 치약튜브에서 뽑아져 나온 치약마냥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공간이었다. 그러니까 이 공간에서는 과거가 현재에 개입해 여전히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이는 여전히 문학 청년이었고, 어떤 이는 잘 나가던 종로 과외 교사 모습 그대로였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이 가르치는 정치 교과서의 위선과 허구를 지독한 독설로 비판하는(말 한마디 하기 조심스러웠던 그 갑갑했던 시절에 말이다! 하지만) 염세주의자였다.
그리고 어떤 이는 '남산'에서 고문 당한 이야기를 그리 자주 이야기했다. 어찌하다 대공분실에까지 끌려가게 되었는지는 지금 아무리 기억을 되돌리려 해도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염세주의자였더 정치경제 과목 선생님과는 달리, 냉소적이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열혈 분노를 내비치지도 않았다. 하여간 왜 자꾸 그 이야기를 자꾸 꺼내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도 예의 다른 선생님들과 비슷한 이유였으리라 짐작된다. 말하자면, 학교를 패퇴한 군사들의 최후 보루로 여겼던 것 아닌가 싶은 거다.
아무러면 어떠랴. 나도 그 시절에는 미래를 꿈꾸기보다는 꿈꾸기를 꿈꾸고 있었을 따름이다.
어쨌든 이 분은 단소를 전공한 음악 선생님이었는데, 한 주나 두 주 걸러 한 번씩은 당신이 작곡한 국악 가요를 가르쳐 함께 부르게 하셨다. 가사는 대개 박희진 시인의 시에서 따온 것이었다. 하도 박희진 시인에 관해 말하시기에, 도대체 박희진이 누구야 하고 친구들끼리 수군해곤 했던 기억이 있다. 하긴 그 시절의 우리들에게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제대로 알려졌겠는가.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곡을 붙였다고 해서 그걸 제대로 알아 보는 것도 아니었는걸.
당시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서울대를 60명 넘게 입학시키면서 신흥 명문고라는 이름을 얻는 대가로 입시 학원처럼 건조한 곳이었다. 여기서 나는 잘도 버텨냈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더니, 누릴 수 있는 게 너무 많았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선생님들의 낭만적인 미련도 크게 한 턱했다. 나는 거의 학력고사 첫 세대인 셈이고, 선생님들은 본고사 제도가 없어진 것이 몸에 아직 익지 않았던 때였기 때문이다. 하여 숙제에는 연극이나 공연 관람 같은 것이 있기도 했다.
뭐,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지금도 알 도리는 없다.
어느날 음악 선생님은 느닷없이 시 낭송회를 다녀오라고 하셨다. 시 낭송이라면, 그 당시에는 닭살 돋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한창 남성이 꿈틀거리는 10대의 남학생들에게 그 여고생 취향 같은 일이라니...
비원 근처에 있는 공간사랑을 찾았다.(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곳은 공옥진의 춤과 김덕수 등의 '사물놀이'가 초연된 곳이기도 하다.) 소극장을 알게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기도 했지만, 극장 안은 작았고, 낮고 높은 블럭들로 서로 조화를 이룬 객석이 있었다. 무대쪽은 붉은 벽돌 벽과 흰 벽이 어울리고 '공간 시낭송회'인가 하는 플레카드가 걸려 있었다. 아마 수요일쯤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 마임을 하고 나니, 연달아 두어 사람이 나와 자작시를 낭송했다. 사실 별 감흥은 없었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돈 키호테. 노래가 죽은 시의 시대에 여전히 노래로 시를 부르는 사람들의 모습은 좀 그래 보였다. 그럼 그렇지.... 하고 있는데 잠시 후에, 박희진 시인이 나와 낭송을 한다. 그게 수업 시간에 음악 선생님이 귀에 박히게 가르쳐 주신 노래와 묘하게 오버랩되었다. '...검은 머리 파뿌리되도록...' 머리 속으로 흥얼거리는 노래 따라 낭송이 운을 맞춘다. 그렇게 시를 쓰는 사람도 있는 게로구나.
거기에 50대 중반의 구상 시인이 앉자 있었다. 박희진 시인의 차례가 끝나자 끝 순서로 사회자는 그를 소개했고 그 소개에는 그가 전쟁 전 북한에서 핍박 받은 일과 월남하여 휴머니즘에 기초한 시를 썼던 일과 문단에서 매우 소중한 시인이라는 것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그 후로 시인이 타계한 지금까지 그에 대한 소개는 내리 이렇다.) 그 역시 자작시를 낭송했다. 이제는 그 시의 제목도 분명치 않다. 게다가 이 글을 쓰고 지금은 내 자신이 멀리 다른 나라에 나와 있으니 전집을 찾아 확인할 길이 없다. 허나 이 또한 아무러면 어떠랴. 그때 나는 시의 시 낭송을 듣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안색과 풍모와 크지도 않으면서 온몸을 떨어 말하던 목소리, 이런 것들을 보고 듣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는 할아버지였다.
그 이후로도 그는 할아버지였고, 결국 할아버지로 타계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 시종 청년같은 단단함과 모순됨 없이 어울리고 있었다. 내내 나는 그것이 의문스러웠다. 왜냐하면, 좋아하지 않는 시인은 좋은 인상과 느낌을 주지 못하는 법이기에.
그의 시풍은 내가 그의 시를 처음 대했던 고등학교 1,2학년 시절을 지낸 후로는 더 이상 선호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3학년이 되면서 나는 이미 성정보다는 위트에 감동하고 있었고, 포용하는 것보다는 날카로운 각을 세우는 것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나이를 조금 더 먹자 오래 된 종이내음이 나는 김소월과 정지용의 시집을 구하려고 청계천 일대를 뒤지고 다니기도 했지만, 그는 낭만주의자는 아니었다. 한때는 북한에서 탈출한 것이 무슨 훈장격이나 되는 것마냥 그에 대한 수식으로 굳어져 있기에, 그것 때문으로도 싫어한 적이 있었다. 내가 종교에 회의감을 갖게 되었던 대학 3학년 말경에는 그가 모든 것을 신앙으로 해소해 버리려고 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초토의 시'를 가르치던 무렵 나는 그가 전쟁에 너무 깊이 상처받아 실존적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내내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내내 변함이 없이 살다가 죽었다. 나는 그의 인생에서 욕될 만한 어떤 것들 아직도 듣지 못했으니, 그쯤이면 그의 시는 이미 일관한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훌륭하다.
(2004.05)
외려 내가 변했다.(마지막 문장은 옮기면서 덧붙임)
(20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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