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돌아가신 아버지는 은퇴 전에는 목사이셨다. 32년인가 목회 활동을 하셨는데, 그중 절반 이상 병중에 계셨다. 그래도 젊은 시절에는 매우 활달하셔서 일에 대한 욕심도 크고 타지로 다니시기도 꽤 하셨더랬다. 해외 선교도 자주 나가셨는데, 그 당시 선교사를 지원 받는 처지에 있던 한국의 상황에서 외국으로 선교를 나간다는 건 어린 나이에도 좀 이상하게 여겨졌다. 나중에 생각하기로, 그건 아버지의 자기 성취욕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봉사하는 교회의 규모는 내가 대학생이 되면서 집을 벗어나기까지의 20년 가까이 별로 바뀐 게 없었다. 게다가 이미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른바 기독교의 부흥기에 동료 목회자들의 교회는 준대형이나 대형 교회로 커 가고 있었다. 그 시절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다른 방향으로의 모색이 필요하기도 했을 거다. (1978년에 미국에서 큰 교통사고가 일어나면서 거의 돌아가실 뻔했던 아버지는 인생의 큰 변화를 원치 않게 겪으셔야 했다. 은퇴의 시간은 길고 고통스러웠다. 교회는 작은 교회로 멈추었고, 그것은 오히려 내게 축복이었다.)
해외 선교를 다니신 곳은 주로 미국이거나 영어 사용 국가들이었다. (이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하기로....) 확인할 길은 없으나, 그래서 영어로 의사소통 하기가 가능하셨던 것 같다. 그 무렵, 그러니까 70년대 초중반 가끔 교회에는 교회 규모가 감당하기에 턱도 없는 미국 선교단이 들르기도 했다. 교회 규모가 작으니 그쪽 입장에서는 마치 텔레비전의 '지구촌 체험' 같은 경험을 하고 갔을 게 틀림없다. 교인들은 주로 뚝방 건너편의 영세민들이었고 주로 중노년층이었다. 찾아온 사람 반, 교인 반이 만나 무엇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뱃지를 받은 거라든지, 밴허, 예수의 일생, 또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smiley face'가 등장하는 영화를 본 것이라든지, 과자를 받았던 기억도 있고(아!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탈지분유를 받았던 기억도 있다. 그 6.35적 같은 얘기를 여전히 경험하고 있었구나....), 종이 턴테이블도 받았었다.(종이로 만든 턴테이블에 일반 LP의 절반 지름이 되는 판을 올리고 펜 등으로 돌려 소리를 내게 하는....)
그렇게 왔던 선교단원 중에 한국에 상주하는 분들도 있었는데, 그중 한 분이 한국명으로 '최희준'으로 불리셨던 목사이셨다. 그분은 전쟁 전에 친부를 잃은 아버지에게는 대부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이 글의 본론이 이제 나온다. 아버지는 그분에게 나를 소개할 때마다 '존'이라고 하셨다. 혹시 짐작할 만 하시는지.... 지현은 '현' 때문에 발음하기 곤란하고 뜻도 새길 수 없었을테니 말이다. 지현을 줄여 말하면 '쫀'이 된다 이 말씀이다. 그런데 '존(John)은 요한의 영어식 이름이었으니, 아버지로서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그분에게 설명하기도 기억하게 하기도 편하셨을 것이다. 엉겹결에 나는 존이 되었고, 그분과의 인연은 그 후로 30대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분은 내 결혼 주례를 서기도 하셨다. 지금은 작고하셨을 텐데....)
아무튼 쫀이 된 나는 당연히 이름이 너무 평범해서 불만이었다. 사실 누구에겐가 내 이름 말고 다른 이름으로 소개된다는 것이 불편했다. 국민학생 최지현은 아버지에게 항거했다.
"그럼 둘째 지호는 '쪼'예요?"
"그렇겠지."
"쪼.... 쪼...."
언제나 그랬듯이 아버지는 뭔가 숨기던 게 들통 나면 보이시던 어색한 웃음을 보이셨다. 하지만 그 반응 뒤에 '조'란 이름에도 그 나름의 논리가 있었다는 걸 뒤에 알았다. Joe란 이름도 성경의 요셉(Joseph)에 기원을 두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되니, 나는 더 불편했다. 요한은 운명이 기구했고, 요셉은 형보다 팔자 펼 인생이었다. 다만 한 가지, 내 국민학교 시절인 그 당시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조'들은 소설에서나 TV에서 흑인 노예들이었다. ㅋㅋ
영어식 이름이 필요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유년의 '존'은 고등학생 이후로는 들어본 적도 없고 듣고자 한 적도 없다. 그러다가 2003년 캐나다에 방문 교수를 나갔다. 생존 영어를 막 끝내고 생활 영어가 필요하게 되었을 때, 커뮤니티센터의 영어 교습 프로그램에 들어가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기어이 영어식 이름이 필요하게 되었다. 지현은 어렸을 때나 커서나 외국인들에게 발음하기 고약한 이름이었다. 내가 지금 가르치는 수지, 보라, 세나, 보영, 유진....... 뭐, 이런 이름들은 얼마나 편한가. 굳이 영어식 이름을 갖지 않아도 그냥 전환이 되고. 그나저나 어쩌겠는가. 영어식 이름을 쓰려고 고심하다가, 그 나라 사람도 아닌데 이름의 유래를 따져 만들기도 그렇고.... 해서 You may call me Jay. 이랬다. 그 후론 쭉 '제이'가 영어식 이름이 되었다. Jihyun의 약자 J. 써 놓은 이름 J. Choi.
지금은 뭐, 제이(Jay)에 큰 불만 없다. 불만이 있다면, 왜 '최'는 '초이'가 되는가 하는 것. 그렇다고 'Che'라고 그럴 듯한 이름을 성 삼아 쓸 수도 없고.... 뭐, 그렇다. 더 쓸 일은 많지 않겠지만....
결론이다. 세 줄 정리한다.
교과서 막판 작업 하느라 출판사로 오면서 'Juno Hair' 간판을 봤다.
그런 간판이 꽤 많더라.
부럽기도 하고 그 자체가 불만이기도 한 이중적 감정 앞에서 나는 그 감정의 근원을 말로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한때 쫀이기도 했던 제이라 불리는 사람이, 2012.03.18)
사진 속 그(존 조)는 스타트랙에서 인상적인 모습(그것이 꼭 연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을 보였던 한국계 배우이다. 6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한다. 그러면, '존'은 역시 얻은 이름이겠다. 나와 동생이 한 배우의 이름과 성에 붙어 있어서 인용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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