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들의 수다
교수 담화의 다섯 가지 요소
최지현(국어교육과 교수)
담화 중에는 담화 참여자들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가 담화의 형식을 통해 드러나고, 유지되고, 심지어 야기되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종교 담화, 경찰 담화, 법정 담화, 의료 담화 같은 것들……. 이 담화들은 고해 성사나 취조, 심문, 문진 같은 담화를 통해 담화 참여자인 신부(목사, 스님 등도)와 신자, 경찰과 피의자(증인, 심지어 피해자까지), 검사(변호사, 법관 등도)와 피고(증인, 심지어 원고까지도), 그리고 의사와 환자 간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를 보여준다. 알게 모르게 그 관계를 강화한다. 어떻게? 일반적인 의사소통 관계에서와 달리, 이 관계에서는 아는 자가 묻고 모르는 자가 답을 해야 한다. 답을 하는 자는 묻는 자의 심중을 따라 답을 해야 하지만, 그걸 알기 어려우니 근본적으로 취약한 지위에 놓이게 된다.
여기 이와 같은 담화가 또 있다. 수많은 교실 담화들에서 교사는 학생들에게 묻는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선뜻,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의도한 대로 답을 해 주기를 기대한다. 학생 쪽에서 보면, 이건 천만의 말씀이다. ‘알고 있으면 왜 물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알고 있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것이 학생의 지위를 만든다. 교사가 교실에서 우월한 권력을 가지고 통제적 지위를 누린다면, 학생이 교실을 뛰쳐나가지 못하게 만든 교육 제도의 꼼꼼한 시행 세칙들 말고도,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의 방법, 즉 교실 담화의 작동 방식에 기대는 바 크다.
우리는 교실에서 학생이 자발적으로 의문을 갖고 질문하고 탐구하는 것에 대해 상상해 보는데, 그러한 상상은 가끔 젊은 시절 청춘의 교생 선생님의 모습으로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교육실습하러 갔을 때의 장면, 짓궂은 학생들이 자신으로서는 알 도리 없는 궁금증을 밤새 조사하고 암기하여 순전히 그 젊고 순진한 교생을 골려 먹을 심산으로 질문하던 장면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교실에서 자발적인 학생의 질문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두려움은 잠시일 뿐이고, 현실로 돌아와 보면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다. (이건 순전히 강연용 발언이다. 다행히 내 강의실에서는 질문하는 학생들이 있기는 있다.) 학생들은 침묵으로 교실의 불평등한 교육적 권력 관계에 동조한다. 그 행위가 자신들에게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튼 이것이 오늘 나눌 이야기의 상황 조건이다. 그 교실이 중등학교 교실이 아니어도 아무 상관이 없고, 나처럼 사범대학 교수가 아니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오늘의 주제는 ‘교육적 의사소통은 어디까지 가능한가’이고 그 가능의 방향은 ‘개선’에 있다.
교육학을 공부하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 보자. 레프 시메노비치 비고츠키. 통칭 비고츠키라고 부르는 인물이다. 폴란드 동쪽과 러시아 서쪽 사이에 위치한 벨라루스의 오르샤에서 1896년 출생한 그는 대학 졸업 후 교직에 있으며 인지 및 언어 발달에 관한 실험적, 이론적 연구들을 수행했으며, 오늘날 발달 심리학의 개척자 중 한 사람으로서 추앙 받고 있다.
우리는 그가 제안한 중요한 이론적 개념의 하나인 ‘근접 발달 영역(Zone of Proximal Development)’, 줄여서 ZPD에 대해 주목할 것이다. 이 개념은 교육학에서는 비계(scaffolding)와 관련하여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요점은 다음과 같다. 아동의 발달은 단일한 선형적 발달을 갖지 않고 발달의 가능역 속에서 분포한다. 발달의 가능역은 마치 학생들의 시험 점수를 채점할 때 표준적이든 혹은 비표준적이든 분포가 나타나는 것처럼 발달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한 범위를 말한다. 이 개념이 교육에서 중요한 까닭은, 가능역의 어떤 지점의 발달 수준은 그 발달의 가능한 범위까지의 발달이나 지연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서 교육자의 지원에 따라 발달의 실현 정도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ZPD는 발달에 시간차가 존재하는 까닭을 설명하며, 발달 속도가 아동마다 다른 까닭을 설명하고, 학습 집단이 균질적이지 않은 까닭을 설명한다. 또한 아동의 능력을 실제 구현된 것 외에도 잠재적 가능성의 범위까지 고려하여 평가해야 하는 까닭을 설명하며, 교육적 지원이 효과를 보일 가능 범위가 어떠한지를 설명하고, 더불어 교육이 실행되지 않는 원인도 함께 설명한다.
ZPD의 도해에 약간 추가해 본다. 상단의 굵은 붉은 선은 이 아동과의 교육적 관계를 이루고 있는 교육자의 능력 수준을 나타낸다. 교육 내용이나 학습자의 변수를 달리하면, 이 붉은 선은 우측 상단으로 올라가는 학습자의 발달 수준과 만날 수도 있다. 수정된 도해에서 하단으로 내려오는 두 개의 가는 붉은 선은 교육적 의사소통의 가능한 조건이다. 교육자는 아동의 근접 발달 영역 내에서 비로소 의미 있는 교육적 의사소통을 수행할 수 있다. 이 조건이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교육적 의사소통을 위해 바꾸는 것은 교육자의 위치이다.
나는 해마다 국어교육과 신입생들을 위한 ‘국어교육론’ 과목에서 교사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능력에 대해 소개를 하곤 하는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학습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 갖추게 되기를 기대하는 국어 능력, 둘째, 학습자가 현재 갖추고 있는 국어 능력, 그리고 셋째, 학습자와의 교육적 의사소통을 위한 중재 능력. 아마도 이러한 규정은 사범대학의 다른 학과나 전공의 교육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도 이 규정은 교사뿐 아니라 대학 교수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세 가지 능력의 요체는 교육자의 변화를 통해 학습자의 발달이 일어나는 것이며, 그 역은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에게는 훌륭한 교육자의 역할 모델 같은 것이 있다. 내가 전공으로 삼고 있는 문학교육에서 특히 자주 인용되기는 하지만, 이를테면 키팅(Keating) 같은 교사 말이다. 사물을 끊임없이 다른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면 책상 위에 올라가는 교사. 책상 위에서 링컨에게 바친 헌사인 월트 휘트먼의 시, ‘캡틴, 오 마이 캡틴!’을 외치며 자유의 정신을 말하는 교사. (교실 칠판 위의 사진은 주인공이 휘트먼이다.) 자신의 걸음으로 걷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게 하기 위해 교실을 벗어나 내정에서 학생들을 걷게 하는 교사. (이 표현은 바로잡아야 한다. 교실 밖으로 아이들을 나가게 한 것이 아니라 내정이 교실이 된 것이다.) 교육의 절대화된 권위를 깨뜨리며 문학 교과서의 서문을 찢게 하는 교사. 키팅은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학교 체제에서 학생들의 자유로운 정신과 가치 있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며 새로운 교수법으로 학생들을 일깨운다.
여기까지가 우리의 머릿속에 기억된 키팅의 이미지이다. 이러한 교육자를 현실에서 만나기 쉽지 않겠으나, 그래서 더 강렬하게 각인된 자유로운 영혼의 교육자의 이미지다. 영혼의 울림에는 감복이 제격이므로, 영화 속 학생들은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공감하여 키팅을 따른다. 그들은 제 발로 책상 위에 올라선다.
하지만 이 이미지에는 빈틈이 많다. 키팅의 교육관은 자유를 따르라는 것이지만 그의 교수법은 자신을 따르라고 한다. 그의 교육관은 계몽적이지만, 그의 교사상은 메시아적이다. 그가 자유를 말할 때, 그 아름다운 이름인 자유는 철저히 낭만주의적이다. 그가 문학 교과서의 서문을 찢게 했을 때 학생들은 두려워하다가 이내 환호하지만, 그에게 찢어버려야 할 권위는 고전주의적 문학관이었다. 그가 재직하고 있는 학교는 미국 버몬트 주이지만, 그의 교실에 걸린 지도는 그가 사랑하는 낭만주의 시의 나라 영국을 보여준다. (휘트먼은 미국 시인이다.)
어떤 의미로 보면, 낭만주의적 교육이 실행되는 과정이기도 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그 교육이 성공했을 때와 실패했을 때를 모두 보여준다. 두 가지 모두의 원인은 같다. 교육은 자발성에 기초하고 흥미와 열정과 자연적 본능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관점. 어떤 학생들은 가르침을 깨우치며, 키팅과 같은 사람으로 성장한다.
그렇지 못할 때의 교육을 떠올리면, 나는 키팅을 위해 한 표를 던지기 힘들다. 여기 미국 캘리포니아주 롱비치의 어느 고등학교가 있다. 학군의 평준화와 함께 도시 빈민, 갱단에 의한 범죄, 계층과 인종 간 갈등 등등의 문제가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는 학교이다. 과거의 명문 학교로서의 영광은 그 유산에 아직도 취해 있는 교사들로 하여금 새롭게 편입된 지역 출신의 학생들을 탐탁치않게 여기게 하고, 학교의 전통적인 교육 방법은 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학교 밖으로 나가 갱단의 일원이 되거나 총탄에 희생되게 하는 아이러니를 만든다.
이 학교가 윌튼 아카데미(‘죽은 시인의 사회’의 영화 무대인 미국 동부 명문 기숙학교)와 비교할 만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다들 총기 사고로 친구들을 잃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영화 ‘위험한 아이들(Dangerous Minds)’에서처럼 아이들은 교실의 교육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들을 나누고 분열시키고 싸우게 하고, 그래서 고립된 개인으로 사회에 던져지게 만드는 이 촘촘한 제도의 억압적 그물은 스물세 살의 초임 교사 에린 그루웰(실존인물이다. 당연히 영화 제목은 그녀가 학생들과 함께 쓴 책 ‘The Freedom Writers Diary’에서 온 것이다. 프리덤 라이터스는 150명 학생들을 통칭한 필명이다.)로 하여금 자신이 준비했던 교육과정을 전면적으로 바꾸게 만든다.
이 다음부터는 영화에 담겨져 있고, 책에 담겨져 있고, 실제 인물의 삶을 통해 계속되고 있으니, 여기서 뒤늦은 본론이자 결론을 말해 보고자 한다. 이 부분의 핵심은 교사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교육은 교육과정과 학습자와 교사의 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쉬운 설명 중의 하나이다. 이 정태적인 모형을 좀 바꾸면 비고츠키의 근접 발달 영역에 대한 도해처럼 변형할 수 있다. 학습자는 교육과정이 의도한 내용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발달한다. 만약 교육이 성공적이라면. 여기에 교사가 수행해야 할 역할이 있다. 나는 이것을 ‘교육적 중재’라고 부른다.
무엇을 중재하는가? 표면적으로는 학습자와 교육과정을 중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것도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교육과정은 문서로 확립되고 교과서로 구체화되지만 결코 성취기준을 타협하지 않는다. 교육과정은 학습자가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학습자가 변하게 되는 것은 교육의 과정을 통해서이다. 교육이 실행되지 않았는데 학습자가 변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모순이 생긴다.
이 모순을 해소하는 역할이 교사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비유해 왔다.(물론 이 표현 자체는 예시를 위해 만든 것이다.) 교육에 당을 입혀서 먹기 좋게 만든다. 학생들을 잘 꼬드겨서 교육이라는 당의정을 먹게 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고 다가서지 않았지만, 어쨌든 교육이 이루어졌다는 마법이 일어난다. 실제로는 이렇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부분 화살표를 좀 더 정밀하게 들여다본다. 거기에 ‘교수학적 변환(didactical transposition)’이라는 과정이 있다. 이 개념에 대해서는 수학교육이나 과학교육을 연구하시는 교수님들이 친숙하게 느끼실 것이다. 수학교육학자인 쉐바야르(Shevallard)가 제안한 개념이니까. 간략히 핵심만 말하자면, 교육의 내용이 되는 것들은 대부분 학문적 지식에서 비롯된 것들인데, 교육은 이 지식을 교육적 목적에 맞게 재구성하여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때 지식의 변형이 발생하는데, 그는 이 과정을 교수학적 변환이라고 불렀다. 교수학적 변환은 이 과정에서 지식의 형질 변형, 곧 원래의 의미와 가치가 훼손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고려의 목적을 가진다.
교수학적 변환은 이 개념의 토양을 반영하듯 주로 교육 내용과 관련한 지식을 대상으로 다루었다. 그런데 이렇게 교육적 목적으로 지식이 변환되는 경우에도 여전히 학습자는 그 지식을 수용할 수 없는 교육적 불가능성의 조건에 놓일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중간 언어’라고 부를, 지식을 다루는 도구 언어가 학습자에 적합하게 갖추어져 있지 않을 때이다. 중간 언어에는 우리가 교육 용어, 학습 용어, 또는 교육과정 용어(curriculum terminology)라고 부르는 것들과 학습자의 사고를 돕는 기술 용어(descriptive word)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은 우선적으로 학습자가 자신의 사고 수준에서 이해 가능해야 하고, 모방할 수 있어야 하고, 내면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 변환된 지식이 수용될 수 있다.
이 전체 과정을 교수·학습의 과정으로 재진술할 수 있다. 이 일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교실이며 강의실이므로, 이 과정은 교실 담화의 과정으로 재진술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일을 주도할 존재가 교사이며 교수일 수밖에 없으므로, 이 과정은 교수 담화의 과정으로 재진술할 수 있다.
교수 담화로 재진술했을 때,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명확한 과제를 알게 된다. 교수 담화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요소를 갖는다(고 썼지만, 사실 이제 이야기를 마쳐야 하는 상황이다. 하나하나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가 없다. 고로 제목이 성급했음을 성급하게 인정하고 빨리 물러서는 방법밖에 없다). 설명, 지시, 호명, 발문, 송환.
이 다섯 가지는 학습자와 교육과정을 중재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완결적 구성이다. 설명과 지시는 학습자와 교육과정을 직접적으로 연계시키며, 호명과 발문은 교수자의 중재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송환은 이 과정을 점검하고 조정한다.
설명은 교육 내용을 학습자에게 전달하는 과정이다. 설명을 통해 학습자는 지식을 내면화한다. 이 과정은 사회화라고 고쳐 말하기도 한다. 설명의 핵심은 학습자의 이해 가능한 범위로 학습 내용을 조정하는 데 있고, 이렇게 변환된 지식을 학습자가 수용할 수 있도록 중간 언어 지대를 확장하는 데 있다. (그러니까 교수자는 학습자에게 이 두 가지를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설명 이후에 교육의 목표점이 이동하면 학습자가 그 지식의 실행할 수 있도록 지시할 수 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설명은 호명을 이끌고 호명은 지시나 발문을 이끌게 된다.
지시는 학습자가 수행을 통해 기능적 지식의 숙련이나 탐구를 유도하는 과정이다. 지시를 통해 교수자는 학습자의 학습 과정을 효과적으로 조직한다. 학습자의 수행과 교수자의 지시는 학습자의 근접 발달 영역 내에서 접점을 이루고, 수행의 질과 양상은 교수자가 제시한 도구 언어를 학습자가 완전히 내면화하거나 자신의 중간 언어 지대 내에 수용하느냐에 달리게 된다. 지시 이후에 교육의 목표점이 이동하면 학습자가 그 지식을 마음속에서 구성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다. 형식적으로는 지시는 호명을 이끌고 호명은 발문을 이끌게 된다.
설명과 지시는 지식의 두 층위, 혹은 두 측면을 다룬다. 명사적 지식과 동사적 지식. 후자는 수행을 통해 존재한다.
호명은 교수자의 개입을 통해 학습자와 교육과정을 중재하는 과정이다. 호명을 통해 학습자와 교수자는 교육적 의사소통의 관계를 형성한다. 호명은 개별, 집단, 전체를 대상으로 실행될 수 있고, 그때마다 교육적 의사소통의 성격이 달라진다. 설명은 그것을 통해 재구성된 교육적으로 변환된 지식의 이해 정도와 속도, 그리고 양상을 점검하기 위해 호명을 대상을 특정한다. 따라서 전체를 대상으로 호명할 때와 개별 학습자를 대상으로 호명할 때 그 호명의 성격이 달라진다. 호명은 반응을 동반할 때 비로소 호명으로서 기능하게 되는데, 좋은 반응을 동반하기 위해서는 호명이 무지의 심판으로 기능하지 않아야 한다. (이와 별개의 이야기이지만, 학습자의 호명은 교수자의 호명에 비해 좋은 교육적 의사소통을 만들 가능성을 갖는다.) 호명은 대개 발문으로 이어지지만 이 경우에는 설명을 뒤따르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지시로 이어진다.
발문은 교수자의 개입을 통해 학습자와 교육과정의 중재 여부나 정도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발문을 통해 교수자는 학습자로 하여금 (학습 과제의 이행 정도와 별개로) 학습 과제를 명확히 인식하게 할 수 있다. 발문은 (교육적으로 불평등한 교육관계를 반영한다는 평가가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학습자로 하여금 학습을 촉발시키는 기능을 수행하는 적극적인 교육적 기능을 갖는다. 설명이나 지시 없이도 발문만으로도 교수·학습의 과정이 실행될 수 있다.(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이 그러한데, 주지하다시피, 물론 이 경우에는 이미 학습자는 교육과정이 의도하는 교육적 지식에 ‘암묵적’, ‘무의식적’으로 도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호명과 발문은 교육적 의사소통의 매개적 행위로서 설명과 지시를 근거로 삼는다. 호명은 다시 발문으로 이어지지만, 그 종착점은 발문에 대한 학습자의 반응에 대한 교수자의 평가 송환이다.
그리고 교육의 과정에 계기적이고 지속된다는 점에서 송환은 다시 설명과 지시로 이어진다.
'공부 중 > 국어교육'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표준비] 언택트 시대, 국어교육의 방법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 것인가 (0) | 2021.03.03 |
---|---|
[강연] 사범대생을 위한 교육학 논술: 다섯 가지 포인트로 접근하기 (0) | 2017.11.17 |
[강연] 손금, 그리고 손수건 (스팟명강의, 2016) (0) | 2016.12.23 |
[임용시험] 발표, 직접 교수법, 통합 수업 (0) | 2015.01.16 |
[임용시험] 2014학년도 중등 임용 시험 서술형 주관식에 대한 첫 번째 생각 (0) | 2013.08.11 |
[교과서] 검정 교과서 정책에 대한 자문 내용 요약 (0) | 2013.06.22 |
[발표] 사적 언어는 국어교육의 공적 담론장에 들어오게 될 것인가 (0) | 2013.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