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게시물은 다음 카페 '현대시 공부하기'에도 올려 놓은 것입니다... 만, 회원 아닌 학생들도 있고 해서...)
재호 군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래서 답변을 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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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텍스트의 특성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빈자리에 있다. 그리하여, 수용자는 이전의 독서경험과 일상적인 경험, 곧 기대지평으로써 그 빈자리를 메꾸어 가는데, 이것이 바로 심미적 경험의 확장이며 그 자체 교육적인 구조를 갖게 된다.” 구인환 외「문학교육론」발췌
각주 1. “카스너에 따르면 세계는 공간세계와 시간세계로 양분된다. 공간세계는 과거, 즉 이상적인 관념의 세계이고, 시간세계는 현재, 현실적인 정신의 세계이다. 총체성을 간직한 공간세계가 파괴되면서 시간의세계가 도래했는데 루카치는 공간세계가 상실됨을 인식하고, 이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문학' 을 선택한다. 즉 그는 <현실과 이상>,<개인과 사회>,<예술과 삶>의 괴리를 극복하고 총체성의 구현을 위해 이성, 정신이 문학적으로 형태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차봉희.「루카치의 변증-유물론적 문학이론」발췌
맨 위의 글에서 두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첫째, ‘문학텍스트는 본질적으로 빈자리를 가질 수밖에 없다.’ 저는 여기서 말하는 빈자리가 무엇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단순히 1번 글의 ‘현실과 이상’ 의 괴리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수용자가 개입하지 않은 텍스트는 필연적으로 불완전하다는 뜻인지 말입니다. 둘째, 이러한 빈자리를 메꾸는 데에 왜 ‘심미적’인 경험이 필요한지의 이유입니다. 문학이 현실을 아름답게 형상화했기 때문에 수용자가 문학을 받아들일때도 역으로 미적 형상화를 거쳐야 하는 건지 의문입니다.
질문이 두서없어 죄송합니다. 맨 위의 글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 각주에 달려있는 루카치-에 대한 글을 찾아보았는데, 이해가 되기는 커녕 머리가 더욱 헝클어진 느낌입니다. 제가 루카치의 총체성의 개념을 잘못 이해한 것인지, 대체 맨 위의 글이 루카치의 이론과 어떤 면에서 관련되어 있는지(심미적 경험의 확장과 이성과 정신의 형태화는 같은 것인지) 제대로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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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두 가지이다.
1. ‘문학 텍스트는 본질적으로 빈자리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말에는 먼저 알아 두어야 할 전제가 있다. 그 전제란 다음과 같다 : 문학 텍스트는 ‘비문학’ 텍스트를 구성하는 일상의 언어와는 다른 언어적 특성을 지닌다. 본질적으로 함축적이며 표현 형식도 일상의 언어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문면에 드러나지 않은 의미 맥락을 취하며 (상황 맥락에 의해 그 의미가 결정되는 비문학 텍스트와는 달리) 많은 경우 의미 맥락이 자기 완결적이다.
이러한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문학 텍스트는 자기 완결적인 의미 맥락을 구성하는 그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이 논리를 문학적 관습(장르 관습) 또는 양식성이라 부른다.
예컨대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라는 시 구절은 자기 완결적 의미 맥락을 갖추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이해 과정에 투입된다.
∙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왜?)
∙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어떤 이유 때문에)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 여기서 상대방이 나를 역겨워하며 떠나는 상황과 상대방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내가 그 상황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것이 공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인해 의미상 공기 제약(한 문장 안에서 의미의 모순 없이 함께 쓰일 수 없다면 사용되지 못하는 제약)이 생기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사용되었으므로 무엇인가 합당한 이유가 발생해야 한다는 논리가 생김.
∙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 독자가 임의로 해석해서 의미상 모순이 없이 합당하게 진술이 성립하도록 하는 의미 맥락을 괄호 안에 넣게 됨.
그러니까 위 시 구절에서 괄호 안의 빈 진술은 ‘빈자리’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밤중에 홀로
수선(水仙)과 마조 앉다.
향기(香氣)와 입김을
서로 바꾸다.
생각은
호수(湖水)인 양 밀려와,
인생(人生)은
갈매기같이 처량(凄凉)쿠나.
여기에서 내 마음은
검은 물결에 싯기는 마플 한 오리.
아아, 수선(水仙)
나는 네가 부끄러워.
(김동명, 수선 2)
위 작품에서 “향기(香氣)와 입김을 / 서로 바꾸다.”라는 표현은, ‘바꾸다’가 무언가를 서로 바꿀 ‘주체들’의 동등성을 요구하며(그렇지 않으면 탈취거나 공여일 것이므로), 그 양 주체의 상호 의사를 요구하고, 서로 바꿀 만한 것으로서 그 무언가의 물질성 및 가치 동등성 또한 요구한다는 점에서 공기 제약에 위배되는데 이 또한 사용되었으므로, 독자는 이를 완결된 의미 맥락으로 만들기 위해 적극적인 해석을 하게 된다. 이 과정은,
∙ 향기(香氣)와 입김을 서로 바꾸다. (어떻게 가능해?)
∙ 향기(香氣)와 입김을 (누구와) 서로 바꾸다.
→ 그 ‘누구’는 작품에서 ‘수선’이라고 했으므로, 수선화를 의지를 갖는 인격체로 호명한다는 조건에 공기 제약이 풀림.
∙ 향기(香氣)와 입김을 ( ) 서로 바꾸다.
→ 독자는 수선에 인격성을 부여하고 그 인격성의 해석함으로써 이 시 구절을 완결된 의미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됨.
그러니까 독자가 이해하는 ‘이별의 상황’과 ‘수선의 인격성’은 문학 텍스트에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는 빈자리이면서 독자가 적극적으로 채워 넣는 의미의 연결고리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단, 이것도 알아 두어야 한다. 빈자리 개념은 문학 텍스트가 비문학 텍스트와는 ‘다른’ 언어적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가져야만’ 성립한다는 것. 만약 문학 텍스트가 비문학 텍스트와 언어 구성 면에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면, 빈자리 개념은 문학에 고유한 특성이라 볼 수 없다. 원래 텍스트는 그런 거라는 뜻이다.
또 하나 알아 둘 것도 있다. 빈자리는 독자의 능동성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독자 임의로 그 맥락을 채워 넣을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되어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러니까 본질은 독자의 능동성이 아니라 텍스트의 의미론적 제약인 것이다. 다만 그 제약이 협소하지 않은 것뿐이다.
2. ‘빈자리’를 채우는 데 왜 심미적 경험이 필요한가?
빈자리는 전제로 한다면, 문학 텍스트는 ‘비문학’ 텍스트와 달리 텍스트의 의미 맥락이 논리적으로 구성되는 것 이상의 맥락 단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논리적 의미 맥락이라 함은 일종의 전형적인 상황 논리를 뜻한다.
“십일 월 하늘에 비가 내렸다. 나는 우산을 가지고 집을 나섰다.”
이 예문에서 비가 오는 실제 상황은 이슬비에서 진눈깨비 비까지 다양하고 그 상황이 가능하게 하는 후속 사태들은 그보다 더욱 다양하다. 만약 이슬비가 온다면 우산 없이도 나갈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혹 누군가는 십일 월에 비가 온다는 것만으로도 핑계 삼아 집을 나서지 않을 수도 있다. 반면에 아무리 진눈깨비 비라도 사연이 있다면 우산 없이도 집을 나설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문자로 새겨지면 실제의 다양한 상황 맥락들은 표준화된다. 독자에 따라 다른 해독의 맥락이 만들어질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이 문맥이 만들어지는 상황 맥락은 표준적인 것이다. 그것은 내가 집을 나설 때 우산을 가졌다는 이유로 인해 비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가 가능해지는 표준이다. 그런데,
“십일 월 하늘에 비가 내렸다. 나는 해바라기꽃 치켜 들고 해 맞으러 집을 나섰다.”
이렇게 써 놓고 나면, 그리고 역시 중요한 전제가 이러한 진술이 문학 텍스트에 고유한 것이라고 한다면, 십일 월 비에 해바라기꽃을 치켜 들고 집을 나선 것은 일상의 언어 질서로는 이해하기 힘든 사태가 된다. 이럴 경우, 이 진술이 헛소리일 뿐이라고 여긴다면 아무런 긴장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진술이 참된 것이라고 여기려면 그럴 만한 논리를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때의 논리는,
“나는 칠백 원짜리 라면을 사면서 오천 원짜리 지폐를 내고 고작 삼천 원을 거슬러받았을 뿐이다.”
이러한 진술에서처럼 계산이 잘못 되었다거나 기만을 당했다거나 혹은 유원지 등에서 샀을 것으로 추론되는 논리와는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십일 월 비에 해바라기꽃을 치켜 들고 집을 나선 사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전후 맥락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일단 유치하게라도 ‘미쳤을 거야, 그 친구는.’ 하고 상상해 볼 수도 있다. 그래도 사연은 훨씬 구체적일 것이므로 비와 해바라기꽃의 상관성을 그럴듯하게 만들어주는 상황이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관계에 더욱 집중하여 미치지 않았더라도 그럴 만한 상황을 상정할 수도 있고, 아예 우리가 이제 친숙하게 여기는 상징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설명도 빈자리에 대한 전제가 있어야 성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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