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방문교수로 캐나다가 머물던 2004년 5월 22일 리테두넷(litedu.net)에 올린 글입니다. 플랫폼 변경으로 인해 이곳으로 옮겨 둡니다.
이 글의 제목을 퀸 메리 초등학교(Queen Mary Elementary School)의 평화교육이라고 달아야 하나...괜히 부풀려 글을 쓰는 건 아닌가... 하고 잠시 고민을 했다가 그대로 가기로 했습니다. 근처에 있는 유힐(University Hill Elementary School)에서도 같은 걸 봤기 때문이지요. 그게 이겁니다.
딸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퀸메리 초등학교(Queen Mary Elementary School)입니다. 1학년부터 7학년까지 있고 학년당 20여 명 단위의 두 개 학급이 있어서 전체 학생수가 300여 명쯤 됩니다. 이곳 밴쿠버에서 착한 아빠되기 실천도 7개월을 넘겼는데, 지난 번엔 아이 마중을 나가 학교 운동장 옆을 지나치다가 보니, 담장에 평화의 걸개 그림들이 걸려 있었습니다.
각각의 그림들에는 평화를 기원하는 내용이 형상화되어 있더군요. 수행과 노작을 중시하는 이곳의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걸개들을 보면서 평화교육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문학교육에서 평화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우리나라는 평화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 절박한 상황에 놓인 나라이지요. 아무도 그걸 부인하지 않습니다. 미군 철수를 외쳤던 것도, 미군 한강 이남 철수 반대를 외쳤던 것도, 그것이 모두 전쟁의 공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의 대선이나 이라크 침공 같은 국제 정치 환경의 변화도 남북 문제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나 조바심을 갖게 합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남북의 분단과 대치 상태는 가족을 생이별시킨 잔인한 운명처럼 여겨집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대를 이어 책임져야 하는 원수가 있는 듯합니다. 예전에 독재자들이 정적을 제거하고 정치적 억압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줄줄이 써먹었던 간첩단 사건이나 테러 사건, 혁명 음모 사건 등도 남북 분단을 평화가 아닌 전쟁의 조건으로 보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휴전 협정이 남북을 차가운 전쟁 상태로 남겨 두고 있다는 사실은 막대한 군사비(국방비) 지출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피부로 느껴지는 삶의 질적 수준에 영향을 미치지요. 대개 어디에 원인이 있는 것인지는 잘 알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만....
그런데, 이러한 모든 평화의 절박한 연유들이 우리의 평화 교육에서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쉽게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이미 우리 세대에도 분단의 문제는 전쟁 세대가 겪은 직접적인 육체적, 심리적 고통으로부터 한걸음 물러서 있고, 전쟁은 점차 첨단전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자가 테스트해 보세요. 질문. 남북의 동포가 어깨동무를 하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는 장면은 당신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가?(한 가지를 빼놓고 모두 고르시오) (1) 슬퍼진다 (2) 가슴이 벅차오른다 (3) 행복해진다 (4) 마음이 따뜻해진다. 답....
만약 당신의 선택이 (1)번이나 (2)번을 빼놓은 선지들을 택하는 것이라면, 당신 역시 자신을 실증의 자료로 삼고 있는 셈입니다.
어쩌면 한국 전쟁과 분단 문제는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100만 명 이상이 죽은 르완다의 이른바 '인종 청소' 사태와 보스니아의 코소보 사태 등보다 덜 체감적이며, 최근의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지에서 벌어진 전쟁/학살보다 덜 심동적일 수 있습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우리 조국의 분단 문제만큼 우리에게 평화교육의 역사적 당위성을 안겨주는 것은 없다는, 그동안의 회의한 적 없고, 의심한 바 없었던 믿음에 비추어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러한 현상도 사실일 것입니다.
나에게 평화는 참으로 많은 고통을 동반하는 도전의 과정입니다. 통일 독일보다 더 극심한 분노와 증오의 경험을 할 수밖에 없을 거라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네들은 전쟁 이후에 분단되었지만, 우리는 분단 이후에 전쟁을 겪었고, 그것도 '동족 상잔'이라 불리는 참상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수십 년 이내에 정치적 통일을 이루었다고 한다면, 월남한 남한 사람들이 북한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어떤 일을 벌일지 끔찍하기도 합니다. 이데올로기 같은 것은 댈 것도 아닙니다. 역시 말하자면, 통일을 통한 평화란 장밋빛 같은 희망과는 거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참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분단은 어떤 경우로든 평화에 적대적입니다. 그러기에 분단의 지속을 끊어내는 평화 운동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통일 교육도 분단 고착화에 반대하는 교육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다음 세대에게 분단이 남의 일 같고, 통일이 낭만적인 것으로 삼기에는 너무 무거운 주제인 상황에서, 관념화된 통일 교육으로 평화교육을 삼을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아이들에게 평화를 소재나 주제로 한 작품을 읽힐 때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넓게 살피지는 못했지만, 그간 우리가 초점에 두던 것은 분단 문제에 뿌리를 둔 소재나 주제들이 주류가 아니었던가요? '초토의 시', '장마', '학', '학마을 사람들'... 교과서에 실린 이런 작품들은 어떤 윤리적 가치에 기여했을까요?
그보다는 좀 더 아이들의 경험 세계에 근거한 평화의 문제에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요? '평화'의 어휘 목록을 한번 점검해 봐야겠어요.
(2004.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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