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급했고 전략은 치밀했고 진심은 통했다
국정원에서 공개한 대화록을 보았다.
얼마나 손질이 되어 있는 건가는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일단 표현되어 있는 것만을 놓고 독후감을 남긴다.
노무현 대통령은 회담의 실질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 김정일 위원장을 수차례 재촉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조금씩 발을 빼는 태도였지만, 대통령은 집요하게 요구하고 요청했다.
대통령의 발화 표현이 당당하지 않다는 얘기들이 나올 것 같다.
나쁘게 읽으면 애원조라고 볼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말투나 어휘 선택은 개인에 따라 천양지차인 까닭에 항시 내 마음에 드는 표현을 쓰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내 개인의 취향으로 본다면, 애원조는 아니라 하더라도 좀 조급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다음 대목을 주목한다.
"위원장께 청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내가 이제 뭐 임기전에 또 올 일이 있으면 와야 했습니다만, 이제 다음 대통령 곧 뽑힐 것이니 제대로 못할 것 같고.... 임기 마치고 난 다음에 위원장께 꼭 와서 뵙자는 소리는 못하겠습니다만, 평양 좀 자주 들락날락 할 수 있게 좀..."
두 가지 의미로 읽힌다.
하나는 전임 대통령의 역할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
또 하나는 후임 대통령이 지금의 회담의 성과를 제대로 이어나가지 않을 것 같다는 예상을 하고 있다는 것.
위원장께 청한다는 표현은 앞서의 발언과 다른 맥락을 쓴 것이다. 개인 차원의 요청이라는 것이다.
왜 이 시점에 이러한 표현을 썼을까. 나중에 호사를 누리겠다고 그리 말했을 것이라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보면, 1
미국의 카터 전 대통령이나 클린턴 전 대통령 같은 전임 대통령의 역할을 맡아 이 회담의 성과인 평화 협력 지대 확대와 평화 체제 구축에 기여하고 싶었던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퇴임 후 후임 대통령이 자신에게 공식적인 특사 자격을 줄지 확신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개인으로서의 역할을 좀 더 강조했던 게 아닌가 싶다. 2
이에 기대어 생각해 보면, 대통령 발언에서 느껴지는 조급함은 이번 회담에서 못을 박아 두지 않으면 후일 어떻게 이 일의 운명이 바뀔지 모르겠다는 불안감 때문이라고 이해된다.
이미 탄핵 소추의 고통스러운 경험까지 있지 않았던가.
노무현 대통령은 회담의 중심 화제를 서해안 평화 협력 지대 구축로 묶어 두려고 지속적으로 화제를 환기시키고 대화를 전환하고 있다.
평화 협력 지대의 구상은 군사 분계 지역을 비군사적 완충 지역으로 만들겠다는 것으로,
누군가 DMZ에 평화 공원을 만들겠다고 공약한 것에 비하면 대단히 현실적이면서 안정적인 평화 전략이라 여겨진다. 3
군사적 기능이 모든 기능을 우선하는 한반도의 1/10 정도의 지역을
군 대신 남북 경찰이 공동으로 관리하고
경제 협력 공단, 철도, 항만, 어업 등에서 남북이 이 지역을 활성화하면
중국-대만 해협보다 훨씬 안정적이며 생산적인 완충지가 확보되는 것일 게다.
아마도 그 지역의 상하한선을 어떻게 긋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오랜 시간 지리하고 위태위태한 협상의 과정이 있기는 하겠으나
남북한 전군의 주요 화력이 집중된 전선에서 군이 후방으로 이동할 수만 있다면
군사적 안보를 위한 현대화, 전략화도 훨씬 수월하지 않겠느냐는 이해타산을
어쨌든 평화 협력 지대는 노 대통령 쪽에서 보면 회심의 기획으로 준비되었다고 생각된다.
그거면 평화 문제와 경제 문제를 일거에 타결할 것이라고 노 대통령은 자신한다.
"나는 뭐 자신감을 갖습니다."
상위 전략으로 하위 전략을 대체하는 것,
혹은 개선된 전략으로 이전 전략을 대체하는 것,
우리는 북한과 관련된 일만 나오면 그에 맞는 색안경을 찾느라 부산해진다.
우리 내부에서는 색안경의 색깔이 다른 것이 색안경 너머로 보이는 타자보다 더 달라보이고
시쳇말로 '틀려' 보인다.
나도 가끔 가야 자각을 하는 색안경이 눈앞에 얹혀져 있어서 그걸로 세상을 보며 사는데, 또 그걸 편하게 여긴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하지만 아무리 색안경이 눈 앞에 얹혀져 있다고는 하나
이 두 사람, 대화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진심은 본래 말의 표현에서 느끼는 게 아니라 그 말에 담긴 태도와 표정에서 느끼는 것이지만
글이니 그걸 직접 읽을 방법은 없는데,
어쩐 일일까.
앞서도 써 두었지만, 이 대화글의 말투는 신뢰할 수 없다. 7
하지만 이 두 사람 대화 속에서 빈번하게 많은 것들을 의식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대통령은 아예 발언 속에 그들을 옭죄는 간섭들을 등장시키고 있고,
위원장은 남한 사람들이 쓴 독재자 이미지 필터로는 이해되지 않는 조심성을 그의 말 속에 담고 있다. 8
튕기고 놀고 시간 때울 형편이 못된다, 그들은.
그들도 눈치 보고 살고 있는 게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은 그 뒷일을 도모하려 했다고 생각하는데.......
아마도 원본에서라면 실제 대화가 이보다 더 나았을 것이다.
그밖의 짧은 촌평
1. 이 글은 중앙일보에 실린 회의록 내용을 보고 썼다.(2013.06.25)
2. 'NLL 바꿔야... 난 위원장님과 인식 같아', '노무현, "연 1회 정도 남북 정상간 만남 있어야"', '김정일 "생억지 싸움, 앙탕질...공동수역 만들면 돼"', '김 "답방은 김영남이... 김대중 대통령과 얘기 돼 있어"', '노 "남 여론조사서 평화 깰 수 있는 나라 1번이 미국"', '노 "서해 평화협력지대 선포를", 김 "남측에 반대 있지요"' 제목 뽑는 것 하곤! 아주 속이 다 보인다.
3. 대화 중 김양건은 허락받지 않고 자꾸 말참견을 한다. 이것 봐라~!
4. "경제분야에서는 동북 3성이 아니라 북을 염두에 두고 동북 4성으로 생각합니다. 경제면에서는 우리 인민들이 좋아합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을 제 정신이 아니라고 치부할 게 아니라면 이 말에 담긴 현실 인식과 그에 대한 문제의식은 인정해 줄 필요가 있지 않은가.
5. 역사는 선의에 의해서만 발전하는 게 아니다.
6. 전문이라며.... 대화 맥락으로 볼 때, 곳곳에 빠져 있는 김정일 위원장 발언 어디 있어, 어디 있어.
(2013.06.25)
- 만약 이러한 의미였다면, 일찍이 대화 중 대통령은 자기 중심적 발화를 많이 사용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 이 점에서 보면, 클린턴보다는 카터 쪽에 롤모델을 두었을 듯 [본문으로]
- 그 누군가가 누군지 방금 확인해 보았다. 박근혜였구나. [본문으로]
- 2급이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혹시 이류를 뜻하는 이급? [본문으로]
- 군의 본질은 전선을 강화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지금까지 전선에 화력을 집중해 왔던 것은 그렇게 해야 군사적 위기감이 극대화되고 그래야 군사력을 강화할 명분과 지지가 확보되기 때문이었다. 만약 전선이 흐려진다면 전선을 만들어 화력을 집중하는 것보다는 첨단화를 하는 편이 훨씬 군사력을 강화하는 길이 된다. [본문으로]
- 포기 [抛棄,暴棄,泡起] 뜻 1) 쓰지 않거나 버리다 2) 하던 일이나 하려던 일을 도중에 그만두어 버림 - 출처 : 다음(Daum.net) / 원출처 :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본문으로]
- 원본 여부를 따질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유보하고 조심하는 말하기는 물론 상대방을 애태울 목적으로 할 수도 있지만, 속셈이나 의도가 있다고 여겨지면 대화 중 그걸 찾아 읽으려고 조심할 뿐 아니라 그것이 미치는 파장에 대한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에 사용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김정일 위원장이 북한에서 유일한 권력자라고 생각할 수 없다. 유일한 권력자를 가진 세상은 지금까지는 없었다. 권력을 유지하려면 권력을 대상화하여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역사가 항상 증명해 왔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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