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한 고등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메일 내용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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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안산에서 고등학교 문학을 지도하고 있는 ○○○입니다.
재작년에 한양대 특강 때 교수님 강의 들었습니다. 덕분에 시를 이해하는 안목을 넓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매우 기뻤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교수님께 메일을 쓴 이유는 표현기법 중에 반어법과 역설법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싶어서입니다. 학생이 가져온 문제를 풀어주는데 반어법인지 역설법인지 명확하지가 않아서요. 다른 선생님들도 너무 의견이 분분한 상황입니다.
정호승의 '또 기다리는 편지'의 마지막 구절인데요.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이 문장이 비문이 아니고, 표현상으로 모순되지 않으므로 반어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저는 표면적 의미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고, 충돌하고 있으므로 역설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면, 이번 기회에 정확하게 알아서 학생들에게 바르게 전달하고 싶습니다. 모쪼록 명쾌하고 밝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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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마지막 부분이라는 것이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이 부분을 말한다.
질문의 요점은 이 부분의 진술에 사용된 표현 기법이 반어법인가, 아니면 역설법인가 하는 것이다.
표현 기법으로 물었으므로, 이 질문은 문제 설정을 정확히 했다고 할 수 있다.
대개 이런 질문을 할 때면 기법으로서의 용어인지 원리나 방법으로서의 용어인지 분명히 밝히지 않아 논의의 혼선이 생기곤 하기 때문이다. (역설과 반어는 이미 번역된 용어 안에 '설'과 '어'라는 언어로서의 단서를 가지고 있는 까닭에 원천적으로 혼선의 가능성을 갖는다.)
어쨌든 기법으로 따졌으므로, 기법상의 역설법과 반어법에 대한 답장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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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메일 잘 받았습니다.
재작년 특강 때 일을 기억해서 메일을 주셔서
특강에서 과분한 보답을 받은 셈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 간단히 답변만....
표현 기법을 물으셨지요.
기법 차원에서
역설법과 반어법을 따진다면
역설법 : 모순적 어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모순이 되는 두 진술 내용이 모두 참인 경우
-> 이때 단지 두 진술의 단순합으로서 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두 진술을 포괄하는 상위 가치에서 참이 되는 것이지요.
당신을 잃었기에 나는 당신을 얻었습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의 이 비슷한 대목에 역설법을 붙이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그냥 그건 역설도 뭐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충 비슷하지만 역설이 만들어지는 표현을 써 봤습니다.....^^)
이런 표현이 있다면, 잃었다는 진술과 얻었다는 진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지요.
역설법은 두 진술이 모두 참이라는 것인데, 얻기도 했고 잃기도 했다는 식의 참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절충으로는 두 진술이 참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바뀌어야.....
당신을 잃었는데, 잃고 나니 당신이 진정 잃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당신의 가치를 이제사 알게 되었으니 나는 당신을 잃지 않은 것입니다....
반어법 : 질문대로 모순되어 있지 않아서 반어법이 아닌 게 아니라, 모순이 표현된 진술과 내면의 심리 사이에서
발생하는 경우
-> 이때 말한 것과는 다른 마음 상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순이 발생하고,
표면적 진술을 부인하는 것으로써 이 모순이 해소되는 것이어서 반어법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제도 오늘도 아니 잊고 / 먼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작은 따옴표이지요.
이 문장부호는 이른바 '언어에 부수된 표현'이고 달리 말해 '반언어적 표현'이지요.
음성적 실현에서는 분명히 존재하는 다른 목소리가 시를 썼을 때 가려지지 않게 하기 위해 사용한 표지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지막 연에서 따옴표 밖의 말하는 존재와 따옴표 안에서 말하는 존재는
비록 몸뚱이는 공유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서로 다른 주체인 셈입니다.
평소에는 따옴표 안의 말하는 주체가 자신을 드러내는데 이를 'gesture'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 시에서는 사회적 말하기인 제스처 말고 내면의 진짜 목소리가 있는 겁니다.
따옴표 밖의 이 말하는 존재는 시에서는 서정적 주체라고 하고 그의 말하기는 'pose-자세'라고 하지요.
포즈, 이게 내면의 목소리라는 겁니다.
이제 '잊었노라'라고 말하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 볼까요.
님이 하마 나를 잊었습니다. 억울해 죽겠습니다. 나는 여전히 사랑하고 잊을 수 없는데,
님은 나를 잊어 버린 겁니다. 이럴 때, 나도 확 님을 잊고 싶습니다.
하지만 잊는다는 것은 의지로 되지 않습니다. 잊혀지지 않습니다.
만약 언젠가 님이 돌아와 미안하다 사랑한다 이러고 나서면 나는 어떨 것인가.... 미련이 남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존심도 있고, 화도 납니다.
님이 돌아와서 다시 사랑하자고 한다면, 나는 아마도 당신을 잊었어요 하고 뿌리치고 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물론 진심은 아니지요..... 얼마나 진심이 아니냐 하면,
아주 먼훗날에서야 그때서 잊었다고 말한다는 겁니다.
이 말은 뒤집어 말하면 그때까지 잊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잊고 싶지도 않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이 말이 참 묘하지요. '잊었노라' 이건 잊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말은 그렇지만..... 정말 잊었다면.. 이렇게 말하지요.
..... 누구...세..요?
따라서 이런 표현은 내심과 달리 거꾸로 말하고 있으므로... 반어라고 합니다. 표현기법상 반어법이 됩니다.
나는 정호승의 이 시에서 마지막 연 밑줄 친 부분의 진술이 반어법도 역설법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행복하였다'는 말을 뒤집을 만한 다른 가치가 있는 듯해 보이지 않아서입니다.
그러면 역설도 반어도 성립되기 어렵습니다.
이유를 잠깐 밝혀 두겠습니다.
1. 우선 역설이든 반어든 되려면 모순된 심리가 있어야 합니다.
모순된 심리를 이 시에서 찾는다고 가정한다면 행복과 상반된 심리인 '불행'의 값을 갖는 '고독,
헤어날 수 없는 외로움(단지 외로움만이라면 곤란!), 절망, 좌절, 낙심...' 같은 것이
시의 바탕 정서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시를 보면, 서정적 주체는 분명 외로운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당신은 돌아올 줄 모르고,
아마도 돌아올 기색이 없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외로움은 서정적 주체를 불행하다고 여기게 할 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심층적 논리로서 표면적 진술을 뒤집는 반어법은 아닐 것이고,
상반된 가치가 동시에 실현되는 것으로 보기도 어려우니 역설법이라고 하기도 어렵겠습니다.
2. 바탕 정서에 관해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표현의 성격을 규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서정적 주체는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을 잘 새겨 보세요.
이 말이 정말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사랑한다는 말의 속뜻일까?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다고 하는데, 그대는 어제도 오늘도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그저 저녁해를 보면서 그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참 속절 없는 사랑인 셈이지요.
어쩌면 이런 하루하루가 그의 현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매일같이 어둠 밤을 보내며 섬들이 하나둘 사라지고(이 섬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고 있지요?)
외로운 사람들도 하나둘 사라지는 모습을 배경으로 사랑하는 그대를 기다립니다.
'오늘도'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일은 일상적인 일이지요.
그대가 오지 않을 것이 거의 분명해 보이므로
"기다리는 일은 참으로 고달프고 고통스럽다, 그대여 빨리 오라."라는 내심을 갖기는 어렵겠습니다.
그러니 역설법이 사용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3. 그렇다면 표현한 것과는 상반된 속마음이 의미를 결정하고 있을까?
만약 그렇게 가정할 수 있으려면 이 시에서 서정적 주체는
'나는 그대를 기다리는 일이 결코 행복하지 않다. 차라리 당신을 사랑할란다..." 이래야 합니다.
이런 심리는 예컨대 소심남이 사랑하는 사람을 이웃에 두고도 사랑 고백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 스스로를 비아냥거리듯, 혹은 자학하듯 표현할 때나 어울립니다.
만약 반어법이 되려면 이 시의 진정한 진술 내용은 '나는 행복하지 않습니다.'여야 합니다.
그런데 서정적 주체는 이 고착된 생활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보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나는 그대를 기다리는 일만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당신이 이 서정적 주체라면, 나는 더 이상 기다리는 일이 행복하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면 그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속절없이 기다리는, 희망도 없는데 기다리는 일조차 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 존재의 의미를 잃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기다림은 마치 절해 고도에서 구하려 와 줄 구명선 하나 없는데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
표류자의 심리 같은 것 아닐까 싶습니다.
행복하다라는 말은 반어라기보다는 자기 위안에 더 가깝다는 뜻입니다.
이 강력한 자기 최면에 대적할 자가 누가 있을까..... 아마 없을 걸요.
그러니 반어법이 사용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4. 역설법이든, 반어법이든 표현 기법으로 본다면, 특별한 의미를 만들기 위해 시인이 사용한 '전략적 선택'인 셈입니다.
그런 만큼 의미의 변주는 극적이고 일대 사건이 됩니다.
잔잔히 일상의 기록 같은 시에서 이런 전략적 선택이 사용되었으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 시인이 의식적으로 역설법이든 반어법이든 사용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표현 기법은 시인의 몫이지 독자의 몫은 아닙니다.
시인이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는데, 독자가 마치 그런 것처럼 느꼈다면....
그런다고 없던 표현 기법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표현 기법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습니다.
5. 그냥 쉽게 답하고도 싶었습니다. 내가 읽기로(위와 같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잘못 읽었을 수 있습니다.),
이 시는 그냥 있는 대로 받아들이며 읽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나는 그대를 기다린다. 계속 기다려도 오지 않을 게 분명하지만 오늘도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 말고 내가 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내게 기다림은 사랑하는 일이다.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 메아리처럼 되돌아오지 않았을 때 나는 그것이 기다림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나는 기다린다. 그리고 나는 계속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기다리는 일에서 나는 자기 위안을 얻는다.
그럼 열심히 가르치시길...
추신 : 메일을 열자 마자 답장을 보내는 건데요. 사실 이렇게 답을 하기는 했지만, 상호텍스트적 맥락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어요. 이 시의 앞뒤 작품들을 비교해 보는 것도 좋겠는데... 그러면 내 해석이 잘못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메일의 답변 핵심은 표현 기법은 의식적으로 쓰는 것이고, 의식적으로 쓸 때에는 반드시 시적 맥락에 중대한 변주-시의 주제에 영향을 미치는-가 생긴다... 만약 시의 바탕 정서가 그대로 유지되고 그것이 시의 주제와 관련된다면, 특별히 질문한 역설법이나 반어법 같은 표현 기법이 사용되었다고 볼 만한 근거는 없어지고 만다. 독자가 자기 마음대로 읽어서 기법이 생기게 되는 것은 아니다.... 등의 얘기입니다.
인어=반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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