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합 정서’와 ‘모순 형용’
복합 정서는 일상적으로는 느끼기도 쉽지 않고 또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감정의 고조된 상태이다. 복합 정서는 내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쉽게 답을 주지 않기 때문에 편치 않은 심리적 상태이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병리적 상태로 취급하기도 한다. 생각해 보라. 여러분이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데 그의 모습이 당당함과 비굴함 사이에서 혼란스럽다면, 여러분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러한 병리적 심리 상태가 문학에서는 가치 있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을 정화하고 고양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기도 하고, 그 자체가 성숙의 과정과 지표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문학이 개척하는 인간 내면의 신천지(新天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恨)’의 정서가 그렇다고 하는데,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역설(逆說, paradox)이나 반어(反語, irony)의 심미성이 모두 복합 정서에 근거하고 있음을 고려해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슬퍼하지도 기뻐하지도 못하고 있다―아이러니다.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그렇다, 패러독스다. 그것을 느낀다면 ‘복합 정서’이다. 언어로 표현했다면 이제 여러분은 ‘모순 형용’의 세계에 들어온 것이다. 모순 형용은 단순히 언어의 기교가 아니다. 그것은 복잡하고 설명하기 힘든 내면의 정서가 어쩔 수 없이 어색한 옷을 입고 드러낸 자신의 모습이다.
시적 자아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라고 말한다. 죽어야 파랑새가 될 수 있다면, 이건 아이러니다. 사람들이 파랑새를 원하는 것은 죽고 난 뒤의 일 때문이 아니다. 어차피 현실에서도 만날 수 없는 파랑새이기는 하지만, 바로 현실에서 만날 수 없기 때문에 파랑새가 의미 있는 것이지 죽고 나서야 굳이 좇을 이유도 없는 것이 파랑새이다. 그런데 죽어서 파랑새가 된다니.
하지만 이 파랑새는 ‘푸른 하늘과 푸른 들을 날아다닌다’. 그러면서 ‘푸른 노래 푸른 울음을 울어’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은 알 듯 모를 듯 자신을 위한 파랑새가 타인을 위한 파랑새가 되는 순간이다. ‘푸른 울음’에 이미 그 답이 숨어 있기도 하겠지만, 이제 ‘죽어서/ 파랑새 되리’의 의미가 새롭게 만들어진다. 죽어서 파랑새가 될 수 있다면, 이건 슬프지만 기쁜 일이다. 그렇다, 패러독스다. 이 시의 가장 깊은 의미를 함축한 장면, ‘죽어서/ 파랑새 되리’는 이렇게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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