烏瞰圖 : 詩第一號
13인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第1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2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3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4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5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6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7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8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9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10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11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12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13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13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이었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1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2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2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1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適當하오.)
13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여도좋소.
「오감도(烏瞰圖)」는 도면이다. 거기에는 평면 공간이 있고, 평면 공간에는 시간이 없다. 시간은 입체 공간 속에서나 환유되는 범주이다. 평면은 다만 하나의 벽으로서 시간에 구속됨 없이 우리 앞에 나선다. 우리는 달려도 질주하지 아니하는 아해들의 모습에서 안도한다. 그것은 절규를 환기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절규」를 닮은 이 도면은 스스로를 ‘재현시킨다’. 전후 구문을 대칭적으로 전치시키면서 자신의 뒤집어진 이미지를 계속해서 복사해 낸다. 어디에도 이 골목에 13인의 아해가 있어야 하는 당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기에는 스탬프에 잉크를 잔뜩 묻혀 이쪽 저쪽으로 찍어 대는 경박함이 엿보인다. 이러한 경박함은 무의미함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컴퓨터를 사용할 줄 알고, 또 그것을 가지고 문서를 작성할 줄 안다면, 당신은 손쉽게 이쪽에서 저쪽까지, 그리고 또 저쪽에서 이쪽까지를 구역으로 정해 복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신에게는 일관성 없는 대칭과 전치(轉置)의 복사 작업이 일일이 베껴 쓰는 필사 작업보다 오랜 시간과 빈번한 선택을 필요로 할 것임에 분명하고, 그래서 경박함이란 고통스러움과 시종(始終)을 동반한다.
그러나 참으로 당신에게 고통스러운 것은, 습관적으로 기표들을 떼어 내고 붙이게 만드는 강력한 텍스트적 질서로부터 당신이 기꺼이 벗어나려 해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당신은 ‘第1의’ 하고 띄고 ‘兒孩가’ 하고 띄고 또 다시 ‘무섭다고’ 하고 띄고 ‘그리오’ 하고 엔터키enter-key를 부르게 되는 손가락의 관성으로부터 스스로를 억제하기 위해 무진장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第1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라며 한 번에 구문을 완성하려면 적어도 ‘第1/2/……’와 ‘兒孩가/도’의 차이로 하여금 각기 분할된 국면을 가질 수 없게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第1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와 ‘第2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는 동일하면서도 타자일 수밖에 없는 마주보는 이미지가 된다.
이런 이미지들을 짐짓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복사해 내는 행위를 경박함이라 본다면, 경박함은 일찍이 모더니즘이 발견한 ‘20세기적 이미지’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진기, 복사기, 영사기, 비디오 디스플레이어 따위의, 일찍이 유래 없던 대규모 복제의 형식들이 재생된 사진, 확대된 복사 용지, 복제된 비디오 테이프, 녹음 테이프 등과 같은 기표들을 통해 이러한 경박함의 이미지를 메시지에 동반 전송하고 있을 때, 그것은 20세기가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필름을 찾아 나서는 폴라로이드 사진의 귀향기(歸鄕記)와 같이 느껴지게 된다. <비디오 드롬Videodrome>의 제임스 우즈James Woods가 자신의 뱃속에 비디오테이프를 집어넣었을 때 발견했던 것과 똑같이, 나탈리 콜이 그녀의 작고한 아버지 넷킹 콜과 한 자리에서 노래할 때 발견했을 것과 똑같이, 현실과 가상이 만들었던 견고한 벽은 무너져 내리고 동일자(同一者)는 타자(他者) 속에 존재하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詩第一號>를 산종된 의미로서 발견하게 된다. 한 예로 제8행을 보자. 거기에 있는 떼어 낼 수 없을 듯이 붙어 있는 ‘그리오’라는 서술어를 들여다보자. 이 서술어의 주체는 누구인가. 제1의 아해인가, 제2의 아해인가……, 그럼 제6의 아해, 제7의 아해……, 혹은 서술적 위치인 시인 이상(李箱)? <第6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는 ‘제6의 兒孩도 (제1/2……의 兒孩가) 무섭다고 그리오’로도, ‘제6의 兒孩도 무섭다고 (제7/8……의 兒孩가) 그리오’로도, 또 ‘제6의 兒孩도 (제 스스로가) 무섭다고 그리오’─게다가 이 말은 시인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이기도 하니까─ ‘제6의 兒孩도 무섭다고 (나는 당신에게) 그리오’도 될 수 있다. 음성적 발화 맥락에서라면 결정적인 의미를 실현시켰을 법한 ‘그리오’는 문자적인 공간 ─그러니까 문자들이 계열체적으로 적층을 이루는 공간─ 속에서 그것의 확정을 지속적으로 유보시키는 것이다.
물론 이 맥락에서 ‘무서움’과 ‘무서워함’의 구별이 그리 느닷없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이성의 단순한 분류화에 의해 검열될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괄호 속의 문자들에 대해서처럼 이런 말에 혐의를 둔다. 사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설혹 텍스트 속에서 13명이나 되는 아해들을 끌어 모을 수 있다 해서, 그들 중 어느 누구를 이쪽 아니면 저쪽에 정렬시킬 수 있겠는가. ‘무서움’은 공교롭게도 대상의 이미지와 이미지에 대한 감정 모두를 아우르는 명사형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어느 곳에 있기도 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텍스트의 거의 전부를 이루는 이러한 대립과 그 대립의 해소 끝에 마지막 행이 제시되었을 때, 우리는 ‘길이 끝나자 여행이 시작되는’ 지점에 서게 된다. <13인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여도좋소.>는 ‘두려움’과 ‘두려워함’이 만드는 수많은 대립의 흔적들을 지우려 하는 만큼이나 그 대립의 분포 자체를 활성화시키려고 한다. 기표의 현상은 과정 그 자체이다.
우리는 이 골목에서 무엇에겐가 쫓기던 악몽을 꾼 적이 있다. 미로 같은 이곳은 달리다 보면 막히고 막힌 벽 어딘가에쯤 작은 문이 열리고 그 문을 통해 도망치다 보면 또 다시 벽으로 막히고……, 우리는 몸 하나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방 하나가 남을 때까지 달리고 또 달린다. 그 속에 웅크려 숨고 싶어하는 욕망이 가로막힌 벽 위로 문을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길 양쪽의 벽을 넘지는 못하는데, 이 벽은, 그것이 있든지 없든지, 외통의 골목으로 달릴 수밖에 없게 하는 억압으로 존재한다. 바슐라르의 표현을 뒤집어 사용하자면, ‘골목’이라는 공간 자체는 거주할 수 있는 밀폐 공간도, 혹은 웅크리고 잠시 숨어들 수 있는 구석도 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의 개방성이 그 너머를 알 수 없는─그 너머가 있는가?─ 벽으로 인해 불완전하고, 방향을 스스로 통어할 수 없는 외통목으로 인해 불안정하다는 점 때문에, 골목은 3차원적─수평적 도로와 수직적 벽으로 구성된, 그래서 필연적으로 시간성을 부여받게 되는─ 공간으로 되어 있으면서도 1차원성을 은유한다.
「오감도」가 조감도(鳥瞰圖)를 환기시키고 있는 한, 일단 우리는 <詩第一號>를 수직선상에서 내려 볼 수 있겠다. 여기서 우리가 모든 공간 형식을 끄집어내어 논할 이유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것은 2차원적 공간에 속한다. 그러나 이런 공간을 관찰하는 에고심리학자는 앞뒤를 재며 보충 설명들을 달기 십상이다. 즉 ‘이치에 맞는’ 사건의 선후를 ‘합리적인’ 해석을 위해 항시 대기시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하게는, 길 옆의 벽 너머로 ‘밖’의 공간을 마련해 두고 있어서, 그는 골목길을 내달리는 아해들의 공포를 공감할 줄 모른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니까 그는 마치 미로 속 흰쥐를 바라보는 관찰자가 되어 버리고 마는데 ─마치 주해된 시인 이상처럼─, 미로의 왼쪽, 혹은 오른쪽 몇 칸쯤 건너 출구가 있는 것 같이 포즈를 취하는 점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그것에 관해 말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것은 시간성으로의 복귀를 뜻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이 우리로 하여금 반발하게 한다.
그 대신 우리는 이 텍스트 속의 아해와 같은 위치에 스스로 서서 그(들)의 질서(상상계)로 들어서려 하는데, 그러면 골목은 영락없이 수직으로 절단된 단면이 된다. 이것도 2차원적 공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때에는 시간축이 공간축으로부터 잘라 낸 1차원적 공간(수직적, 계열체적 더미)만을 점유하게 될 것이며, 공간축은 역으로 시간의 절연(絶緣)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시간의 절연 속에 드러나는 공간의 은유적 성격이다.
이때 우리는 아해들을 어떤 모습으로 어디쯤에서 발견하게 될까. 13인의 아해를 어떤 상징으로 이해했든 간에, 지금까지 연구자들은 이들을 입체 공간 속에서 보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입체 공간 속에서 아해(들)이 실제로 달리고 실제로 달리지 않는 모습을 상상하기란 도대체 어렵기만 한 일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도면 위에 아해들의 위치를 도저히 확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시간성을 필요로 하는 운동이 한 순간 그 지점에 있으면서 동시에 없는 모순을 안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하긴 지금 우리가 이 텍스트를 그림으로 묘사하려 할 때에도 곤혹함은 마찬가지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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