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태를 드리인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건너로 쫓겨갔단다
구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년이 몇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줄께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인문평론, 1939.10)
영화 ‘에일리언’을 보면, 끈적끈적한 액체를 흘리고 다니는, 엄청난 힘을 지닌, 마치 파충류처럼 생긴, 그러나 무어라고 규정하기 힘든 괴물이 등장한다. 이 괴물은 그 어떤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부재하는 것도 아닌, 말 그대로 이방인(alien)이다. 규정할 수 없는 이 존재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워 떨며 목숨을 건 투쟁을 벌여 나간다. 이방인은 사람들의 정체성에 혼란을 주는, 용인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듯 인간의 시각에서 보지 않고 에일리언의 입장이 되어 이 영화를 본다면 상황은 어떻게 달라질까? 낯선 공간과 자신을 해치려는 낯선 존재들에 의해 둘려 두려움과 절망에 빠지게 된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생존하기 위해 목숨을 건 투쟁을 벌여야 하는 것은 에일리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강력한 힘이 있었기에 초반의 우위를 지킬 수 있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불행히도 무력한 이방인은? 그는 그렇지를 못하다. 두려워 떨며 구원을 요청하지만 그에게 주어질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이방인이란 나그네와 달라서 돌아갈 고향이 없으므로, 그에게는 희망도 주어지질 않는다. 그래서 알베르 까뮈는 ‘이방인’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을 통해 절망의식을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용악의 ‘오랑캐꽃’을 읽는다. 조선 땅에 거하는 오랑캐는 이방인이다. 적어도 그가 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그런데 이 시에서는 오랑캐땅으로 쫓겨난 유이민들을 가리켜 오랑캐라 부르는 시적 상황을 보여준다. 그들은 오랑캐도 아니면서 오랑캐처럼 취급당한다. 그러니 그들이 돌아갈 고향이 있을 리 없다. 그들은 연약하고 가냘픈 존재들이다. 그래서 이 상황을 이겨낼 방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화자가 이들에 대해 갖는 공감은 그래서 더욱 슬플 수밖에 없다. 그들은 진정 희망을 얻지 못할 것인가. 오랑캐꽃이 되다 무엇이든 사물에는 유래가 있는 법이다. 오랑캐꽃 역시 모습이 오랑캐 닮았으니 붙은 이름이겠다. 그 옛날 고려 시대에 싸움이 붙어 가랑잎처럼 허물어진 오랑캐 군사들이 어떤 것도 살필 겨를 없이 두만강 건너 쫓겨 간 이래로 그네들이 남긴 아낙과 자식들이 능멸 당하여 붙은 이름이겠다. 섞이지 않는 이방인의 피가 설운 숙명 속에 토해져 나온 이름이겠다. 세월이 흘러 이방인들이 주인 행세를 하는 일제 치하가 되자, 수많은 조선인들이 살아남기 위해 두만강 건너 희망의 땅, 하지만 고통의 땅인 만주로 건너는 유이민(流移民)의 대열에 끼어 들었다. 그 곳은 더 이상 악랄한 지주의 수탈이 없으리라, 간악한 일제의 폭압이 없으리라 기대했던 조선인들은 그 곳까지 침범해 들어온 일제와 화적 때들에 의해 그 전과 다를 바 없는 천대와 수탈을 감내해야 했다. 이방인을 피해 온 곳에서 이방인이 되어 온갖 설움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화자는 두만강 너머에서 이런 모습들을 본 사람이다. 오랑캐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조선인 유이민들이 마치 오랑캐처럼 학대받는 그 곳에서 화자는 유이민들이 마치 오랑캐꽃처럼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동정심이 생긴 것이리라. 그들을 가슴에 품고 도닥도닥 위안해 주고픈 연민의 감정이 생긴 것이리라. 그런데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처지를 조선인 전체의 처지로 확대하여 파악하기에 이른다. 이방인들에 의해 오히려 이방인처럼 학대받기로는 어찌 만주 지역의 유이민만 하겠는가. 하지만 이방인 같은 존재야 모든 조선인이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 시에서 연민의 감정은 동시 공감으로 발전해 간다. 곧 내 자신이 이방인이요 오랑캐꽃이 되는 것이다. 이 시에서 오랑캐와 꽃의 외적 유사성으로부터 속성의 유사성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은 주제 형상화에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오랑캐의 뒷모습을 닮아 오랑캐꽃이라 불린 꽃, 이 꽃 같은 유이민들은 배척과 박해에도 머리 숙인 채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여리고 가냘픈 존재들이다. 여기서 개인적 서정은 민족적 공통감(共通感)으로 확장된다. 따지기야 한다면 조선인 모두가 오랑캐꽃처럼 취급당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런 이방인 의식은 이상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하고 물었을 때, 그의 인식 지평에 들어와 있던 ‘남의 땅’ 의식, 곧 식민지 민족의 역사적 체험이다. 이 시는 짧지만 이야기성(性)을 지닌 서사적 서정시이다. 전체 4연 가운데 첫 연은 설화적 배경을 지닌 오랑캐꽃의 유래를 객관적인 태도로 진술하고, 2연에서는 배경 설화를 옮긴다. 3연에서 시간의 흐름을 따라 내려오면, 4연에 이르러 오랑캐꽃과 유이민 사이에 거대한 유사성의 관계가 생긴다. 든든한 역사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서정성이 이 시의 강점이다.
화자를 중심으로 읽기 화자는 처음에 오랑캐꽃에 대해 객관적인 태도를 취한다. 오랑캐꽃의 유래를 전하면서 “~이라 전한다”, “갔단가” 같은 간접 화법을 취한다. 하지만 오랑캐꽃을 꽃이 아닌 유이민으로 여기게 되면서, 화자는 객관적인 시선을 거두는 대신 시적 대상과 정서적으로 교감하게 된다. 시적 대상을 “너”라고 부름으로써 화자는 오랑캐꽃에 감정 이입하고, 이내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하고 그의 슬픔을 방조하는 데까지 이른다. 이런 슬픔의 방조는 매우 긴밀한 내적 친화력 때문에 가능하다. 타인의 슬픔을 방조하는 것은 정서적인 거리가 주어졌을 때의 일이다. 하지만 오랑캐꽃의 심정에 공감하는 화자는 그의 울음을 자기 것으로 만듦으로써 슬픔을 일종의 정화(카타르시스)로 승화시키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러한 심리적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그것은 화자가 오랑캐꽃에 일치하게 되는 상황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곧, 일제 치하에서 고향을 등지고 북방 척박한 만주 땅으로 이주하거나 유랑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 유이민들의 운명 속에서 화자 자신을 보았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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