曠野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렷스랴
모든 山脈들이
바다를 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여선 지고
큰 江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千古의 뒤에
白馬 타고 오는 超人이 있어
이 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陸史詩集, 1946)
해석은 맥락적 단서가 최소화되더라도 가능한 것부터 시도하면서 확장시키는 것이 합당하다.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여 국지적으로 표현된 것과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말하자면, 다른 해석이 그다지 높은 설명력을 갖지 못할 경우 취하게 되는 ‘유보적 판단’의 경우에 한한다.
이런 점에서 여전히 논란이 끝나지 않은 이 대목,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렷스랴”는 닭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로 풀이하는 것보다 더 적절하고 합당하다. 그것은 2연에서 ‘휘달릴 때도’의 ‘도’가 1연과 대응하고 있을 때 그 대응의 관계가 아래와 같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늘-열리다 : 닭-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산맥-휘달리다 : ( )-범하지 못하였다
여기서 빈자리에 놓일 행위의 주체가 무엇이냐가 시 해석의 관건이 된다. 계열축의 관계를 놓고 보면, 이것은 ‘닭’을 통해 뜻하려 한 것과 같으며 따라서 단지 천지 개벽의 신호를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나는 이 부분에서 1연의 대응 관계가 대립적이라고 보기 어렵고 기왕의 해석들이 그러하였듯이 대응하고 있는 관계로도 읽혀지고 있음에 주목하여 이 대응의 전자와 후자를 각기 우주적 차원과 역사적 차원으로 이해해 본다. 그렇다면 이 빈자리는 민족이 되었든, 문명이 되었든, 혹은 인류가 되었든 간에 우주적 차원의 흐름을 침범하지 못하고(간섭할 수 없고) 그에 종속된 또 다른 추동체가 들어오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3연에 의해 다시 뒷받침된다. 3연의 구도는 우주적 차원과 역사적 차원의 대응이 접점을 이루는, 즉 조응하는 국면을 보여준다.
하늘-열리다 : 닭-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산맥-휘달리다 : ( )-범하지 못하였다
광음-(흐르다) : 강물-길을 열었다
굉음과 강물이 일반화된 은유 관계를 갖는 까닭에 2연까지의 대응 관계는 역사적 차원의 ‘독자적이면서도 또한 종속적인’―풀이하자면, 역사는 그 자체의 추동력을 갖게 되었지만, 역사의 추동 방향(필연성)은 우주적 차원에 의해 관장되는― 존재성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시의 전체 국면에 이 조응의 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하늘-열리다 : 닭-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산맥-휘달리다 : ( )-범하지 못하였다
광음-(흐르다) : 강물-길을 열었다
매화-아득하다 : 나-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4연에서 ‘눈’은 후경이다. 곧 아득한 매화 향기를 전경화하는 존재이다. 그러니 그것이 시련의 상징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눈’과 ‘매화’는 또한 우주적 공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우주적 시간이다. 그것에 ‘내’가 온전히 조응한다. 그러니 또한 ‘내’ 앞에 역사적 시련을 상정해 두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오히려 이 맥락에서 ‘가난한 노래의 씨’는 ‘내’게 부여된 소명 같은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5연의 “다시 千古의 뒤에 / 白馬 타고 오는 超人”은 ‘먼 미래’의 사건도 아니고, ‘나’의 행위가 결과할 역사적 전망도 아니며, 오히려 ‘가난한 노래의 씨’에 대한 우주적 차원의 반향이라고 보는 편이 더 합당하다.
하늘-열리다 : 닭-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산맥-휘달리다 : ( )-범하지 못하였다
광음-(흐르다) : 강물-길을 열었다
매화-아득하다 : 나-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초인-목놓아 부르다 :
말하자면 ‘千古’는 우주적 시간이고, ‘白馬 타고 오는 超人’은 우주적 주재자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해석에서 설명이 약한 것은 ‘가난한 노래’와 ‘이 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하는 대목이다. 이것은 명백히 계열체를 이루고 있고, 따라서 그냥 지나치기에는 부족함이 크다. 이 부분은 텍스트 밖에서 가져온 정보로 해소해 버릴 수도 있다. 역사주의적인 맥락에서 읽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앞의 모든 해석들의 기반이 무너지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도 텍스트 내에서 읽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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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한 역사적 맥락을 작동시키지 않고도 기호 사용의 보편적 맥락에 의해 효과가 발생하는 느슨한 유연성(有緣性)에 기대어 문화기호학적, 인류학적 단서들을 텍스트에 적용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텍스트 읽기는 좌절될 까닭이 없다.
그렇다면 해결되지 않은 ‘목놓아 부르다’와 ‘가난한 노래’는 어떻게 풀이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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