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이중적 공간으로서의 집
집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 이상한 공간이다. 그것은 보호하는 곳이며 또한 유폐시키는 곳이다. 옛말에 ‘하늘을 지붕 삼고, 구름을 이불 삼고’라는 말이 있어 의지할 데 없는 고아, 정처(定處)할 곳 없이 떠도는 방랑자의 안쓰럽고 서글픈 신세를 빗대었으니, 그래도 쉼을 얻을 수 있고 평온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작지만 지붕이 있어 비를 막아주고 벽이 있어 바람을 막아주는 집이었다. 그러기에 정철이 ‘속미인곡’에서 님에게 잊혀진 자신의 존재를 초라하게 극화시킬 때에도 ‘모첨(茅簷)’과 ‘반벽(半璧)’은 갖추고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집은 동시에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나를 단절시키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벽을 쌓고 문을 닫아 잠그면 나는 그 속에서 타인과의 인연이 끊기게 된다. 사방 가로막힌 이 집은 내게는 감옥과도 같은 공간이다. 하지만 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유배지가 될 것이다. 그러기에 김광균은 밤이 되자 창문을 내리고 불을 끈 외인촌의 밤 풍경을 그려 서로가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근대 시민사회의 단절된 인간 관계를 드러내었던 게 아니냐.
이러한 집의 이중성은 방, 무덤, 조개 등으로 확장되면서 하나의 도형적 상상력으로 상징화된다. 그런데 우리는 기형도의 ‘빈 집’을 읽으며, 그 속에 놓인 보호와 유폐의 이중적 의미가 특이하게 전환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보호를 받기 위해 문을 닫아걸었는데, 다시 보니 그것이 ‘내 사랑’을 유폐시킨 것이었다? 내 사랑을 가두어 버린 그 집에 정작 보호받기를 원했던 내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기형도의 ‘빈 집’에서는 죽음이 느껴진다. 철저히 회의하고 그 결과 허무해지는 덧없음이 그의 시 저변에 깔려 있다. 이것은 어떤 고난과 역경이 있어도 결국 희망으로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정서를 뒤집어 놓은 것으로, 한편으로는 매우 위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정직한 시인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나를 잃어 버렸네
실연을 당한 자의 슬픔을 아는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혹시 지금 실연의 슬픔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있더라도, 나의 슬픔만 못할 것이다. 나는 지금 그 혹은 그녀를 떠나 보내고 빈 방에 남아 문을 굳게 닫아걸고 웅크리고 있는 중이다. 나는 너를 잊을 수 있다. 나는 너를 미워한다. 아니, 나는 너를 사랑한 적이 없다. 이렇게 스스로 다짐을 하면서도 그 슬픔에 어찌할 바 모르고 있다. 잊기 위해 나는 모든 기억을, 모든 열망과 모든 미련을 포기하려고 한다. 그리고 안녕이라고 말하기 위해 편지를 쓴다.
그의 슬픔은 밤새 고통스럽고 그 고통에 밤은 짧기도 하다. 어느덧 미명(微明)이 지나려는데, 그는 아직도 새 아침을 맞을 준비가 안 되었다. 어두운 밖은 겨울 안개들이 자꾸 옛 기억들로 그를 이끌어 가려 한다. ‘이제는 안녕...’ 하고 쓰려는 종이들에는 글씨 대신 눈물이 떨어진다. 안타깝고 절망적인 심정으로 그는 단호히 사랑을 떠나 보내려 하는데, 모든 것들이 사랑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하긴 그에게 ‘짧았던 밤’과 ‘겨울안개’와 ‘흰 종이’와 ‘눈물’은 사랑의 열망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 것들이다. 그것들마저 포기하지 않고서야 사랑의 열망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문을 닫아 잠그고 불을 꺼 완전히 자신을 차단시키고자 한다. 그것들을 보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그는 발견한다. 조가비처럼 문을 닫아걸자, 그곳에 텅 빈 내 사랑이 갇혀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실연한 그 혹은 그녀는 다른 이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을.
결국 이 시를 통해 시인은 ‘텅 빈 공간’인 자아의 내면을 드러내 보인다. 그것은 영혼이 없는, 싸늘하게 식어 있는 주검과도 같은 것이다. 혹은 진주를 빼앗긴 조개, 마지막 남아 있던 희망조차 빠져나가 버린 판도라의 상자일 수도 있다. 그 빈 공간을 바라보는 시인은 마치 훵하니 뚫어진 자신의 가슴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으리라. 하지만 이것은 이미 자초했던 일. 불을 끄고 집 안에 웅크리며 자신을 보호하려 했을 때 이미 벌어지고 있었던 일이다. 캄캄한 공간 속에서 장님처럼 더듬거리고 있을 때, 그는 과연 무엇을 쓸 수 있었겠는가.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 종이들이 글씨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검은 종이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에. 이미 몇 해 전에 썼던 ‘오래된 서적(書籍)’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이를 예견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나의 영혼은 /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는 실연의 상처를 잊는 방편으로 모든 것에서 스스로를 물러서는 방법을 택하였고, 그러기 위해 살아가는 열망조차도 포기하려 했던 것이다.
이 시는 지극히 염세주의적 편향을 지니고 있다. 모든 희망을 버리고 난 뒤에 극적으로 반전되는 초극조차 없다. 그래서 읽고 난 뒤에는 회의가 생길 수도 있으리라. 어쩌면 이런 시도 있을 수 있는가 하고. 하지만 만일 당신에게 그 어떤 희망의 조짐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래도 헛된 미련과 집착으로 상황을 호도하겠는가. 그 절망을 끝까지 쫓아가는 것도 무수히 많은 시적 시도 가운데 하나로 선택할 만하지 않겠는가.
기형도의 시적 세계
이처럼 기형도의 시는 죽음에 대한 사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를 가리켜 허무주의와 비극적 세계관을 지닌 시라 부른다. 늙지 않아 늙어 있고, 살아 있지만 죽어 있는 듯한 시들에서 따사로움이나 희망을 발견하기는 매우 힘들다. 그렇기에 그의 시들은 우리들이 보기에 끔찍하고 충격적인 사태들도 태연하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묘사한다.
아마도 이러한 시적 경향은 시인 자신의 개인사적 배경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가난 속에서 외톨이로 지냈던 유년기의 체험은 그 자신을 빈방 속에 몰아 넣어 왔다. 그의 시들에 사면이 닫힌 방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시들에 자주 등장하는 검은 색의 색채 감각이 딱딱해진 신체 감각 등도 죽음과 관련이 있다. 80년대의 암울한 시대 속에서 시인 자신이 적응하지 못하는 외톨이로서 느낀 세상의 굴절된 이미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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