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 한하운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보리피리, 인간사, 1955)
이 작품은 썩어 가는 육체 속에 깃든 한 불우한 자아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시이다. 그의 소망은 죽음을 통해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시적 자아는 이러한 아이러니를 회피하거나 미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은 체한다.
자신의 삶을 모질게도 포기해 버릴 수 없다면, 어쩌면 이것이 유일하게 취할 수 있는 태도일는지도 모르겠다. 당시로서는 나을 수 없는 병이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던 나병에 걸려 살이 문드러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했던 시적 자아로서는 오히려 그러한 몸뚱이를 가벼이 버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는 체념의 어떤 포즈를 보여줌으로써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런 처지에서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 시의 아름다움은 고백이나 독백의 어투를 버리고 노래를 취하는 데서 비롯된다. 흔히 3보격이라 부르는 세 마디 리듬을 짧게 끊어 배열하고 최소한의 시어들로 전후의 짧은 대칭 구조를 만들어 놓은 이 시를 낭송하기 위해서는 가볍고 율동적인 마음가짐이 필수적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런 마음가짐을 갖지 않고서는 이렇게 노래하기란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적 자아가 위선적이거나 가식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시적 자아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아프게 자신의 육체를 비워 왔던 것일까. 도대체 ‘파랑새’가 무엇이길래…….
어떤 배경에서 이 시가 나왔을까?
2003년 현재 새로 발견된 한센병(나병, 문둥병) 환자가 41명에 불과한 우리나라는 세계보건기구(WHO)의 보고에 따르면 80년대 중반 이후 이미 한센병 퇴치에 성공한 나라이다.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약제도 개발되었을 뿐 아니라 활동성 환자를 따지더라도 500여 명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극히 희귀한 질병은 우리의 관심에서 거의 멀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1970년에는 매년 1300 명 가까이가 새로 한센병에 걸리고 있었고, 그보다 이른 시기에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병에 걸리고 있었다. 한센병은 그 병증(病症)으로 인해 특히 사람들이 두려워하거나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 병이었다. 1940년까지는 이 병은 일단 걸리면 약이 없는 ‘천형(天刑)’으로 알려져 있었다. 물론 몇십 년이 지나서도 대개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생각한 데에는, 이 병이 피부에 종양이나 반점, 궤양 등이 생겨 흉하게 변해 가는, 말하자면 몸이 썩어 들어가는 병이었기 때문이다. 이만한 형벌이 또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날 때부터 이 병을 지니고 태어났다면, 그건 ‘천형’이라고밖에 볼 수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이 이 병에 걸린 ‘문둥이’에 대해 엄청난 편견과 혐오증을 갖게 된 것에는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이미 조선시대부터 이들은 단순히 육체적 질병을 지닌 환자로 여겨지기보다는 위험한 범죄자나 패도자(悖道者)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병이 낫기 위해서 어린아이의 간을 빼어 먹는다는 흉측한 혐의를 받아야 했다. 그러한 인식이 얼마나 일반적이었는지, 실제로 그러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일제시대에는 이들을 아예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정책이 집행되었다. 1916년 일제는 소록도에 집단 환자촌을 만들고 한센병 환자들을 모두 그리로 내어 몰았다. 그곳에서 그들은 기본적인 인권마저 박탈당한 채 처참하게 살아야 했다. 심지어 그들은 자식을 얻을 수 없도록 강제로 정관수술을 시행 당함으로써 ‘멸종의 대상’이 되기까지 했다. 1940년대에는 이미 약물치료 방법이 개발되었지만, 그것이 그들을 자유롭게 만들지는 못했다. 해방 후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은 일제라는 정치적 결박에서 풀리게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곳에 묶여 있었다. 그것은 사회적인 질병이었던 것이다.
1920년에 태어난 시인은 아직 어린 나이였던 17세 때(1936년)에 한센병 진단을 받았다. 그 후로 평생을 ‘나환자’로서 살아야 했는데, 이 경험은 그에게 평생 슬픔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슬픔이 우리에게 강한 공감을 주는 것은 이 병이 이러한 사회적인 질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의 맥락으로 볼 때, 심장병이나 간경화증, 당뇨병, 고혈압 같은 질병 때문에 이 시를 썼다고 보기에는 저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가 말하는 속뜻이 참으로 깊다.
어째서 이 시의 어조는 우울하지 않은 것일까?
이 시에는 그의 다른 시들처럼 시인 자신과 일체화된 시적 자아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천형(天刑)으로까지 여겨졌던 한센병에 걸린 시인의 내면이 이 시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죽음으로써 결박이 풀리는 파랑새에 대해 노래한다. 결코 우울하지 않은 목소리이다. 만약 3보격이 음악이나 무용 같은, 4보격이 회화나 산보 같은 리듬을 가졌다는 일반론을 받아들인다면, 이 목소리의 발걸음은 가벼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반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짧게 끊어지는 행들과 간결한 형식, 무겁거나 추상적이지 않은 시어들로 이루어진, ‘죽는다’는 상황을 빼놓고는 동요 같기도 한 순박한 표현이 슬프거나 우울한 정황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상하다. 천형(天刑)을 받은 자, 몸이 문드러졌다 하여 문둥이. 죽을 때까지도 고칠 수 없는 병을 안고 조금씩 조금씩 산 채로 썩어 가는 그 이는 대명천지(大明天地)에 제대로 나설 수조차 없는 저주받은 사람이다. 밤이 되면, 비로소 마을 밖 들판에 서서 운명을 탓하며 스스로를 저주하는 사람이다. 자기를 긍정하고 싶어도, 사람들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은 문둥이다.
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사람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밝은 세상을 볼 수 있는 것, 고쳐 말하여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밤중에만 그는 세상에 나설 수 있었기에, 그렇더라도 남들은 모두 창을 내리고 문을 굳게 닫은, 아무도 없는 세상에나 나설 수 있는 것이었기에, 그의 염원은 지극하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슬프거나 우울하지 않다. 왜 그런 걸까? 그는 죽음으로서만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죽었을 때에야 비로소 육체에 들붙어 있는 형벌의 자국을 지울 수 있으리라 여긴다. 그는 죽으면 파랑새가 되리라 기원한다. 파랑새가 되어 훨훨 자유롭게 날아 보고 싶은 것이다. 파랑새가 되어 마음껏 울고 또 웃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는 생각한다. 파랑새가 됨으로써 흉터를 가리기 위해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했던 그 아픈 과거를 잊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래서 그는 집요하게 푸른 하늘과 푸른 들, 푸른 노래와 푸른 울음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파랑새가 된다면, 이제는 사람들에게도 희망을 전해 주는 메신저가 될 수 있는 게 아닌가. 희망의 새인 파랑새가 된다면, 천형의 고통을 당하는 이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게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여기서 시적 인식은 급속히 비약한다. 파랑새가 됨으로써 자신의 슬픈 숙명을 초월하고, 그리고 나아가 모든 숙명들을 초월하게 한다!
숙명의 고리는 그것에 의해 고통당하는 이에 의해서만이 풀어질 수 있다고 한다. 원한의 사슬은 피해자의 용서에 의해서만 끊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시에서 ‘파랑새’는 개인적 차원의 희망에서 인류적 차원의 희망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사람들에 의해 기피되고 사람들에 의해 저주 받은 이가 사람들의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의 극적인 전환은 그 자신이 극한적인 상황, 곧 죽음을 담보하여 운명과 정면 대결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죽음을 통해 비로소 천형을 벗어내고 화자는 파랑새가 된다. 파랑새는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못 다했던 속내를 알린다. 그것은 개인적인 기쁨도 슬픔도 아니요, 같은 운명의 모든 사람들과 나누는 집단적 기쁨이자 동시에 집단적 슬픔이다.
그래서 이 시에는 김소월의 ‘접동새’나 서정주의 ‘귀촉도’보다는 오히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유사한 정조가 흐르고 있다. ‘푸른 하늘/ 푸른 들’이나 ‘푸른 웃음/ 푸른 울음’ 같은 모순 형용에 담긴 복합적인 정서면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 ‘파랑새’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새는 보통 시적 자아의 내면 심리를 반명한 투사체로 시에 등장한다. 육체적 실체로서 ‘나’는 그리하지 못하기에, 그 대신 새를 등장시켜 자신의 염원을 대리 충족시키는 것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파랑새’ 역시 시적 자아의 소망이 충족되기 위해 선택된 대리물이다. 그런데 시적 자아가 파랑새가 되기 위해서는 죽어야만 하는 비극성이 있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보자면, 파랑새는 시적 자아의 비원(悲願)이 담긴 소망의 구현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파랑새의 속뜻에는 희망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도 하며, 이는 자신의 희망뿐 아니라 자신과 마찬가지의 운명에 놓여 있는 타인들의 희망까지도 포괄하는 것이다. 곧, 시적 자아가 죽어 파랑새가 되면 세상 곳곳을 다니며 울고 노래하겠다고 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는 희망의 메시지가 될 것을 기대하는 뜻을 지닌다.
시인이 모리스 마테를링크가 쓴 「파랑새」를 읽었을지는 알 수 없다. 만약 그가 이 작품을 읽었고, 그것이 시의 이미지 형성에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한다면, 이 시는 현실에 대한 시적 자아의 따뜻한 긍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마치 가난한 집 아이들인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모험 끝에 도달하는 ‘행복의 궁전’처럼, 멀리 있는 것이 아닌 바로 앞에, 바로 옆에 있는 현실에서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여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내게 천형을 주었으나 내게 세상은 여전히 천국이다. 이런 인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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