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며시 다가와서
나의 어깨를 툭치며
아는 체 하는
그런 詩,
대수롭지 않게
스쳐가는 듯한 말씨로써
가슴을 쩡 울리게 하는
그런 詩,
읽고 나면
아, 그런가부다 하고
지내쳤다가
어느 순간에
번개처럼
번쩍 떠오르는
그런 詩,
투박하고
어수룩하고
은근하면서
슬기로운
그런 詩
슬며시
하늘 한자락이
바다에 적셔지 듯한,
푸나무와
푸나무 사이의
싱그러운
그것 같은
그런 詩,
밤 늦게 돌아오는 길에
문득 쳐다보는,
갈라진 구름 틈서리로
밤하늘의
눈동자 같은
그런 詩.
이 작품이 수업에서 사용이 되기라도 했나? 갑자기 몇 번의 구독수가 생겼다. 그걸 알게 되고 나서 들어와 보니, '응, 나중에 이 시를 가지고 엮어읽기든 작품 해설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적어 놓았던 것 같다. 그러고 한참을 잊고 있었던 셈인데, 비공개 처리를 하지도 않았으니 블로그의 게시글 수만 늘려놓은 작전 같아 보였겠다 싶었다. 다른 일이 있으나, 어차피 누군가 이 시를 읽고, 덧붙여 쓰고 있는 이 글도 읽게 될 것이므로, 급하게라도 몇 개의 아이디어를 적어 두려고 한다.
박목월의 '이런 詩'를 읽는 세 가지 키워드와 플러스 하나.
첫째, 반복과 점층을 통한 주제화
이 작품에서 '그런 詩'는 여섯 번 반복된다. 처음에는... 다음에는, 겉으로는... 속으로는, 언뜻 보면.... 문득 발견하면, 하는 식으로 발견을 통해 그 가치를 인식하게 되는 대상으로 그림으로써 마지막에 '갈라진 구름 틈서리로' 보이는 '밤하늘의 눈동자' 같은 존재로 형상화한다.
둘째, 작품의 눈*
그러니, 시에도 '눈' 대목이 있다면, 끝 부분의 여섯 개의 행을 그것이라 할 만하다.
셋째, 공유된 상징 체계
여기서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의 향기가 느껴진다.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이 몰려가는 /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 " 이 말은 모방이나 표절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매번 인류가 공유해 왔던 비슷한 경험을 새롭게 대하게 되는 것뿐이다. (내가 보기에는 한용운의 유일하게 잘 된 작품이 이 작품인데, 그것조차 오랫동안 축적되며 깊이와 폭을 갖게 된 종교적 상징과 비유 체계의 힘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박목월 시인은 아마도 이와 같은 상징 체계에 익숙해 있었지 싶다.)
+ 1. 모든 계열체가 시가 되는 건 아니라구.
특정 시어의 반복과 병치가 계열체를 이룬다고 해서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밥을 많이 먹어도
배 안나오는 여자
내 얘기가 재미 없어도
웃어주는 여자
난 그런 여자가 좋더라
머리에 무스를 바르지 않아도
윤기가 흐르는 여자
내 고요한 눈빛을 보면서
시력을 맞추는 여자
김치 볶음밥을 잘 만드는 여자
웃을때 목젖이 보이는 여자
내가 돈이 없을 때에도
마음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여자
멋내지 않아도 멋이 나는 여자
껌을 씹어도 소리가 안나는 여자
뚱뚱해도 다리가 예뻐서
짧은 치마가 어울리는 여자
내가 울적하고 속이 상할 때에도
그저 바라만 봐도
위로가 되는 여자
나를 만난 이후로 미팅을
한 번도 한 번도 안한 여자
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
난 그런 여자가 좋더라
여보세요 날 좀 잠깐 보세요
희망사항이 정말 거창하군요
그런 여자한테 너무 잘 어울리는
난 그런 남자가 좋더라
(변진섭, 희망사항)
하지만 이런 특성이 시를 구성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맞다. (결국 해당 시어가 형성하는 심상들이 계열체적으로 통합되어 하나의 시상을 조화롭게─경우에 따라서는 의도적으로 균열을 일으키며─ 형성하느냐에 달려 있다.
* '눈' : 여기서는 판소리의 '눈대목'의 그 '눈'을 말하는 것이다. 판소리에서는 전체 서사의 핵심적인 에피소드를 담아내고 있는 장면이자 오페라의 '아리아' 같이 독립적으로 향유하더라도 훌륭한 음악적 완성도를 지닌 부분을 아우르는 것을 눈대목이라고 한다.
다음은 시에 대한 시 작품들이다. 일종의 '시론시'라고 할 수 있겠는데, 모든 작품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대체로 그러한 경향성을 갖는 작품들을 모아본 것이다. 이런 작품들을 읽을 때에는 시가 무엇인지에 대한 시인의 견해를 보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시작 태도, 시에서 시인이 존재하는 방식, 그리고 시인의 문제의식을 보려고 하는 편이 합당하다. 왜냐하면 대개 시인은 (시에 대해 말하고 있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시를 통해 그 너머의 대상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본심이 있기 때문이다. 시는 일종의 통로이자 경로이지, 경배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
제시된 작품들: 시론(김기림), 나의 시(서정주), 쉽게 씌어진 시(윤동주), 시(박목월), 시, 부질없는 시(정현종),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김종삼), 강의실(오세영), 시(최하림), 내가 언제(이시영), 주둔지(조정권), 누추한 시(나태주)
(시간 나면 이 작품들에 대해서도 풀이를 할 것이다. 다른 글을 통해....)
1. 시론(詩論), 김기림
―여러분―
여기는 발달된 활자의 최후의 층계올시다
단어의 시체를 짊어지고
일본 종이의
표백한 얼굴 위에
거꾸러져
헐떡이는 활자―
'뱀'을 수술한
백색 무기호문자(無記號文字)의 해골의 무리―
역사의 가슴에 매어 달려
죽어가는 단말마
시의 샛파란 입술을
축여 줄 '쉼표'는 없느냐?
공동 변소―
오랫동안 시청의 소제부가 잊어버린 질식한 똥통 속에
어느 곳 쎈티멘탈한 영양(令孃)이 흐리고 간
타태(墮胎)한 사아(死兒)를 시(市)의 검찰관의
삼각(三角)의 귀밑 눈이 낚시질했다
―시(詩)다―부라보―
나기를 너무 일찍이 한 것이여
생기기를 너무 일찍이 한 것이여
감격의 혈관을 탈장당한
죽은 '언어'의 대량 산출 홍수다.
사해(死海)의 혼탁―경계해라
시(詩)의 궁전에―골동의 페허에
시(詩)는 질식했다
안젤러쓰여
선세기(先世紀)의
오랜 폐인(廢人)
시(詩)의 조종(弔鍾)을
울려라
1930년의 들에
예술(藝術)의 무덤 위에
우리는 흙을 파 얹자
'애상(哀傷)'의 매음부가
비장의 법의(法衣)를 도적해 두르고
거리로 끌고 간다
모―든 슬픔이
예술(藝術)의 이름으로
대륙과
바다―
모―든 목숨의
왕좌를 짓밟는다
탁류―탁류―탁류
쎈티멘탈리즘의 홍수
커다란 어린애 하나가
화강(花崗) 채찍을 휘두른다
무덤을 꽃피운
구원할 수 없는 황야
예술의 제단을 휩쓸어버리려고
위선자와
느렁쟁이―'어저께'의 시(詩)들이여
잘 있거라
우리들은 어린아이니
심볼리즘의
장황한 형용사의 줄느림에서
예술의 손을 이끌자
한 개의
날뛰는 명사
꿈틀거리는 동사
춤추는 형용사
(이건 일찍이 본 일 없는 훌륭한 생물이다)
그들은 시(詩)의 다리[脚]에서
생명(生命)의 불을
뿜는다.
시(詩)는 탄다 백 도로―
빛나는 푸라티나의 광선의 불길이다
모―든 율법과
모랄리티
선
판단
―그것들 밖에 새 시(詩)는 탄다.
아스팔트와
그리고 저기 렐 위에
시는 호흡한다.
시―딩구는 단어.
(조선일보, 1931. 1. 16)
2. 나의 시, 서정주
어느 해 봄이던가, 머언 옛날입니다.
나는 어느 친척의 부인을 모시고 성안 동백꽃나무 그늘에 와 있었습니다.
부인은 그 호화로운 꽃들을 피운 하늘의 부분이 어딘가를
아시기나 하는 듯이 앉아 계시고, 나는 풀밭 위에 흥근한 낙화(落花)가 안쓰러워 주워 모아서는 부인의 펼쳐든 치마폭에 갖다 놓았습니다.
쉬임 없이 그 짓을 되풀이하였습니다.
그 뒤 나는 년년(年年)히 서정시를 썼습니다만 그것은 모두가 그때 그 꽃들을 주워다 드리던―그 마음과 별로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제 웬일인지 나는 이것을 받아줄 이가 땅 위엔 아무도 없음을 봅니다.
내가 주워 모은 꽃들은 저절로 내 손에서 땅 위에 떨어져 구을르고 또 그런 마음으로밖에는 나는 내 시를 쓸 수가 없습니다.
(서정주시선, 정음사, 1956)
3. 쉽게 씌어진 시(詩), 윤동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4. 시(詩), 박목월
나는
흔들리는 저울대(臺).
시(詩)는
그것을 고누려는 추(錘).
겨우 균형(均衡)이 잡히는 위치(位置)에
한 가락의 미소(微笑).
한 줌의 위안(慰安).
한 줄기의 운율(韻律).
이내 무너진다.
하늘 끝과 끝을 일렁대는 해와 달.
아득한 진폭(振幅).
생활(生活)이라는 그것.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5. 시(詩), 부질없는 시(詩), 정현종
시로서 무엇을 사랑할 수 있고
시로서 무엇을 슬퍼할 수 있으랴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시로서
무엇을 버릴 수 있으며
혹은 세울 수 있고
허물어뜨릴 수 있느랴
죽음으로 죽음을 사랑할 수 없고
삶으로 삶을 사랑할 수 없고
슬픔으로 슬픔을 슬퍼 못 하고
시로 시를 사랑 못 한다면
시로서 무엇을 사랑할 수 있으랴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6. 시(詩), 문병란
한 그루 나무와 같이
묵묵히 서 있는 저녁의 기도가 아니다.
한밤중 뜨는 달처럼
그렇게 어설프지 않고
푸른 과수원에 넘치는 향기처럼
그렇게 황홀히 젖는 달빛이 아니다.
단단히 쥐어진 주먹
뜨겁게 부딪치는 찰나에 꽃피는 아픔,
벌떡벌떡 숨쉬는 허파 속에 있고
추리고 추린 오늘의 동사(動詞),
온몸으로 으깨리는 눈물 속에 있다.
부드러움 속엔 이미 부드러움이 없고
사랑의 속삭임 속엔 이미 사랑이 없다.
언어는 손가락 새로 빠져나가는 새하얀 달빛
시(詩)는 이미 시(詩) 속에 없고,
손끝에 닿으면 타버리는 한줄기 불꽃
재 속에서 추리는 마지막 사리(舍利)이다.
시(詩)는 가을 하늘에 떠도는 조각구름
강물에 비치는 후조(侯鳥)의 날개가 아니라
시(詩)는 때묻은 발바닥
모독당한 오늘의 양심에 있고
맹물이 아닌
우리들의 뜨거운 눈물,
한방울 이슬이 아닌
우리들의 뜨거운 피를 마시고 피는
모진 장미의 까시
콕콕 찌르는 분노에 있다.
우리들의 시(詩)는 이미 쫓겨난 왕자,
한밤에 부르는 세레나데가 아니고
허리가 꺾인 코스모스
창백한 백합의 흐느낌이 아니다.
엉겅퀴처럼 억세게
들찔레처럼 어기차게
칡덩굴처럼 쭉쭉 뻗어
뽑혀도 뽑혀도 다시 살아나는 뿌리에 있다.
아직도 낡은 연미복을 입은 시인아
이제는 시들은 꽃다발은 던져버려야 한다
가냘픈 피리는 내던져버려야 한다
시(詩)는 시(詩)가 끝나는 데서부터 다시 시작돼야 한다.
아직도 한밤중
흉중에 뜨는 명월(明月)을 안고
아쉽게 매아미 껍질을 어루만지는 손아
황홀히 보석을 들여다보는 공허한 눈아
언어를 사랑할 때
언어는 이미 연금술사의 마술
증발한 맹물 속에 시(詩)는 없다.
시인아!
시(詩)를 버려라, 연연한 마음 속에
이미 시는 없고
부드러운 혀끝에 박힌 까시,
천년의 여의주(如意珠)는 깨어졌다.
보다 뜨거운 가슴을 위하여
보다 피아픈 운율을 위하여
시인아 시(詩)를 버려라
시인아 시(詩)를 배반하여라
그대 교과서 속에서
그대 애인의 눈동자 속에서
진정 그대 시집 속에서
죽어가는 시(詩)의 껍질을 버리고
정수리를 퉁기는 까시가 되라
복판으로 날아가는 창끝이 되라.
(죽순밭에서, 인학사, 1977)
7.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물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민음사, 1982)
8. 시(詩), 송기원
별 빛 하나에도 우리를 빛낼 수는 있다.
한 방울 눈물에도 우리를 씻을 수는 있다.
버려진 정신들을 이끌고, 바람이 되어
한반도에 스민 잠을 흔들 수는 있다.
춥고 긴 겨울을 뒤척이는 자여.
그대 언 살이 터져 시(詩)가 빛날 때
더 이상 시(詩)를 써서 시(詩)를 죽이지 말라.
누군가 엿보며 웃고 있도다, 웃고 있도다.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실천문학사, 1983)
9. 강의실(講義室), 오세영
시(詩)란,
빈 가지 위를 나르는 새,
추적추적
밖에는 비가 내리고,
가을비에 나무 하나 젖고,
시(詩)란
칠판(漆板)에 부스러진 백묵(白墨),
강의실(講義室) 안에도
비가 오는데
침묵처럼 강의도 비에 젖는데
밖에는 함성(喊聲)과
투(投)
석(石).
프래카드 하나 바람에 떨고,
찢긴 노트 한 권 광장에서 울고,
시(詩)란,
칠판(漆板)에 잘못 쓰인 오자(誤字).
밖에는 투석(投石)이 오가는데,
강의실(講義室) 유리창이 깨지는데,
(모순의 흙, 고려원, 1984)
10. 시(詩), 최하림
비 내리는 날은 모두가 허깨비 허깨비
그녀가 푸른 스카프를 두르고 이상한 모자를 쓰고 서양 여자들처럼 도전적인 걸음으로 다가와도 비 내리는 날은 이미 모두가 비이고 죽음이다 지나온 시간들이 멀리 멀리에서 아우성치며 손을 내밀어도 시간들은 이미 죽음이고 추억일 뿐이다
서릿발같이 차가운 세계여 나는 이제 네 앞에 서서 얼굴을 비춰보고 싶지 않다 나는 아름다움과 선함의 본질을 보고 싶지 않다 그것들은 모두 구겨지고 짓이겨지고 뒤죽박죽되어 시간 속에서 시간꽃이 된다
세계여 나의 시는 이제 비 맞은 나무 비 맞은 새 비 맞은 들녘
이런 시를 쓰면서 제법 나는 시인인 체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엿먹어라, 지금은, 가을, 대지에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11. 내가 언제, 이시영
시인이란, 그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우주의 사업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언제 나의 입김으로
더운 꽃 한 송이 피워낸 적 있는가
내가 언제 나의 눈물로
이슬 한 방울 지상에 내린 적 있는가
내가 언제 나의 손길로
曠原광원을 거쳐 내게로 달려온 고독한 바람의 잔등을
잠재운 적 있는가 쓰다듬은 적 있는가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
12. 은둔지, 조정권
시는 무신론자가 만든 종교.
신 없는 성당.
외로움의 성전.
언어는
시름시름 자란
외로움과 사귀다가 무성히 큰 허무를 만든다.
외로움은 시인들의 은둔지.
외로움은 신성한 성당.
시인은 자기가 심은 나무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
나는 나무에 목매달고 죽는 언어 밑에서
무릎 꿇고 기도한다.
시인은 1인 교주이자
그 자신이 1인 신도.
시는 신이 없는 종교.
그 속에서 독생(獨生)하는 언어.
시은(市隱)하는 언어.
나는 일생 동안 허비할 말의 허기를 새기리라.
(고요로의 초대, 민음사, 2011)
13. 누추한 시, 나태주
시인이여, 책 속에는
그대 쓰고 싶은 시
그대가 원하는 시가 없다
시인이여, 책 속에는
그대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시
주어야 할 시가 이미 없다
부디 책 속에서 나오라
연잎에 빗방울 떨어지듯
뛰어내려라
그리고는 주변을 살펴라
거기 그대 시가 있을 것이다
일상의 누추함, 그렇고 그런 속에.
(어리신 어머니, 서정시학, 2020)
(2017.3.29) 텍스트 입력
(2021.03.12) 글로 바꾸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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