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의 '상행'은 반어로 이루어져 있는가?
정호승의 '또 기다리는 편지'에 대한 현장 선생님의 질문에 답하는 글을 올려 놓고
시간이 좀 지났는데
그 글을 읽으신 블로거 박유주 님이 김광규의 '상행'에 대해 댓글로 질문했다.
질문 내용은, 이 시는 반어적 어조를 가지고 있는가, 이 시는 현실을 비판한 시인가이고
답변의 조건은, '김광규 시인의 배경이나 시 본문만으로는 알 수 없는 정보는 배제'하라는 것이다.
반어라는 것부터가 답변의 조건에서 벗어난 정보여서 조건에 맞게 답하기가 곤란하지만
사고의 도구로서 문학적 개념들을 이 조건에서 예외로 하고 답변을 해 보기로 한다.
먼저 시를 읽어 보자.
상행(上行), 김광규
가을 연기 자욱한 저녁 들판으로
상행 열차를 타고 평택을 지나갈 때
흔들리는 차창에서 너는
문득 낯선 얼굴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너의 모습이라고 생각지 말아 다오.
오징어를 씹으며 화투판을 벌이는
낯익은 얼굴들이 네 곁에 있지 않느냐.
황혼 속에 고함치는 원색의 지붕들과
잠자리처럼 파들거리는 TV 안테나들
흥미 있는 주간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다오.
농약으로 질식한 풀벌레의 울음 같은
심야 방송이 잠든 뒤의 전파 소리 같은
듣기 힘든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다오.
확성기마다 울려 나오는 힘찬 노래와
고속 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는 얼마나 경쾌하냐.
예부터 인생은 여행에 비유되었으니
맥주나 콜라를 마시며
즐거운 여행을 해다오
되도록 생각을 하지 말아다오.
놀라울 때는 다만 '아!'라고 말해다오.
보다 긴 말을 하고 싶으면 침묵해다오.
침묵이 어색할 때는
오랫동안 가문 날씨에 관하여
아르헨티나의 축구 경기에 관하여
성장하는 GNP와 증권 시세에 관하여
이야기해 다오.
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작품은 세 가지 방식으로 나누어 읽어볼 수 있다. (매번 그걸 다 해야 하는 건 아니다.)
1.
꼼꼼히 읽기, 혹은 섬세한 읽기(cloze reading)이라고 불리는 내재적 읽기에 따라 작품을 이해해 보면,
화자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다.
그 누군가는 '너'로 지칭되고 있으니 '너'가 가리킬 수 있는 모든 대상이 될 수도 있지만,
시인이 시를 쓸 때 이미 상정한 청자(시인이 기대하거나 예상한 청자, 곧 시인의 의식 범위 안에 존재하는 청자, 시인의 통제 범위 안에 있는 청자)일 것이고
화자가 호명하고 있는 독자일 것이며,
텍스트 내의 진술에 근거할 때 '나'와 동질성을 가진 '너'일 것이다.
여기서 '너'를 곧 '나'로 읽으면 이 시는 화자가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읽힐 것이므로 좀 더 강한 메시지가 형성되겠지만
일관되게 '너'로 읽은 후 그게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의미로 풀더라도
지령적 메시지는 나에게도 그대로 영향을 미치는 진술 구조를 취하고 있다.
다만 표면적 어조에서는 감계와 결심의 차이를 갖는다.
중요한 것은 이 표면적 어조와 이면의 심리상태가 동일한가, 다른가 하는 점이다.
이 답변글의 중심 내용이 아니므로 여기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겠지만, 짧게만 첨언해 두면, 이면적 어조도 같다고 보면, 감계의 어조가 드러난다고 보는 것-즉, '너'에게 말하는 진술이라고 보는 것-은 풍자적 기능을 갖게 되겠지만 결심의 어조가 드러난다고 보는 것-즉, '나'에게 말하는 진술이라고 보는 것-은 반어적 기능을 갖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너'라는 대상이 사실은 '나'와 다를 바 없고, 본심은 '나'라고 보는 해석적 관점을 취해 청자를 자신으로 삼고 있다고 보고
읽기를 계속한다.
화자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
화자가 말하는 발언을 통해 우리는 화자가 상행열차를 타고 있고, 따라서 상경 중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방향성은 특별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제목이 '상행'인 것도 상관성이 있다.
그 기차 안에서 화자는 상념에 잠겨 있다.
이 상념이라는 것이 생각에 골몰하여 주변의 상황과 분리된 화자의 심리 상태, 즉 주변이 아무리 왁자지껄해도 화자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처럼 되어 버리는 상황을 이끈다.
이 상념 속에서 화자는 어떤 현상을 보고 듣고 하는데 실은 듣고 보는 모습이 눈과 귀를 통한 것이 아니다.
그와 동시에 화자가 실제로 보고 듣는 것들도 있는데
진술은 이 둘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농약으로 질식한 풀벌레의 울음 같은
심야 방송이 잠든 뒤의 전파 소리 같은
듣기 힘든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다오.
확성기마다 울려 나오는 힘찬 노래와
고속 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는 얼마나 경쾌하냐.
기본적으로 이 진술에서 화자가 들으라고 말하는 대상은 확성기나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처럼 감각 기관을 통해 경험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 경험은 상상을 통한 것임을 주목하라. 나중에 이러한 모순된 진술의 의미가 드러난다.
반면 귀 기울이지 말라고 화자가 말하는 대상은 풀벌레와 전파 소리 같은 기차 안에서는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상상의 대상이다.
이 말은 이미 화자 자신이 이것들을 이미 상상을 통해 경험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니 화자는, 네 앞에 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듣고 네가 상상하는 것은 듣지 말라.
곧 네 앞에 현현한 것들이 네게 진실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득 낯선 얼굴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너의 모습이라고 생각지 말아 다오.
오징어를 씹으며 화투판을 벌이는
낯익은 얼굴들이 네 곁에 있지 않느냐.
황혼 속에 고함치는 원색의 지붕들과
잠자리처럼 파들거리는 TV 안테나들
흥미 있는 주간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다오.
화투판을 벌이는 낯익은 얼굴, 지붕들, TV 안테나들, 주간지 같은 직접 경험하는 대상을 긍정하며
차창에 비친 낯선 네 얼굴(로 여기서는 읽었으나, 좀 넓게 읽으면 하행선 기차의 사람들로도 읽을 수 있다. 이때에는 기차의 방향이 갖는 의미가 더 커진다.)은
(네 얼굴이 낯설 리 없으므로) 긍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렇게 순서를 바꾸어 보이는 까닭은 보는 것에 대한 대비는 듣는 것에 대한 대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명확하기 때문인데 뒷 부분을 읽어 비로소 '낯선 네 얼굴'이 직접적인 경험 대상이 아닌 것으로 진술되었음을 확인하게 되기에 분석 과정도 이를 따랐다.
이렇듯 직접 경험되는 것은 긍정하여 받아들이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에 집착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화자의 진술은
경험주의적 직관에 따라 살라는 메시지처럼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화자가 그러한 인생관을 피력하려고 이 시를 쓴 것은 아닌 게 분명하다.
만약 그런 의도였다면 시제를 '상행'이라 쓰는 것이 너무도 어색하다.
상행이 시의 주제를 드러내지 않는 이상, 배경 맥락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이 시는 상행열차의 배경 맥락을 보여주는 데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화자가 이렇게 기차를 타고 가며 보고 듣는 과정을 인생으로 환치하고, 다시 여행에 비유하지만
실제로 진술된 내용에서 이 비유(인생은 여행)는 인생 전체가 아닌, 단지 상행열차의 도착까지의 과정에만 대응한다.
열차의 도착지에는 '가문 날씨, 축구 경기, GNP나 증권 시세' 같은 다른 주목할(시 맥락으로 보면, 보고 듣고 말할 만한) 대상이 있고 그것들을 경험하며 사는 것은 여행이라 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 비유가 인생 전체를 여행처럼 여기는, 목적론적이거나(여행은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과정) 수행론적인(여행은 견문과 성찰의 과정) 인생관에 바탕을 두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이이런 점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화자는 왜 여행 중 그 어떤 것에 대해 '되도록 생각을 하지 말'아 달라고 이런 저런 것들이 비교하고 비유하여 말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화자의 진술이 (앞서 이미 드러내 보였지만) 모순되는 것 또한 중요해지는데,
이는 보고 들을 수 있는 것만 보고 들으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을 애써 관심을 갖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지만,
정작 화자가 보고 들으라 하는 것, 이야기하라고 하는 것들도 상상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야기해 다오'라고 말한 대상을 상상의 대상으로 보는 것에는 해석상의 동의가 필요할 수 있겠다. '가문 날씨'는 직접 경험한 내용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가문 날씨'라고 할 때에는 직접 경험하고 있는 가뭄의 현상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경과와 지속, 곧 직접적인 경험들이 축적되어 추상적 개념으로 전환된 '가뭄'이라고 하는 관념에 관심이 있는 것이라 할 만하다.
'아르헨티나의 축구 경기'는 위성을 통해 건네 받은 방송 프로그램으로서의 편집된 현상, GNP와 증권시세는 이보다 더 추상화된 경제적 현실의 지표를 각각 나타낸다.
그러니까 만약 앞서 화자가 직접 경험하는 현실만을 말하라고 한 것이라면 이것들은 편집되고 해석되고 평가된 관념이라는 것이다.
결국 여행 중에는 그저 보고 듣고 가볍게 즐기라고 말하는 것의 실제 진술은 모든 경험에 대해서가 아니라 차창(이것은 인식의 통로이다. 현상학적 읽기에서 좀 더 깊이 다루기로 한다.)을 매개로 통찰하게 된 현실에 대해서만 그렇게 하라는 것인데, 이것이 화자 자신의 모순된 진술과 인식을 전제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모순의 자기 폭로를 뜻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시인이 선택한 표현 전략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표현 전략(그리고 이것이 시의 구조적 층위에서 마련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시의 구조 원리)을
아이러니라고 말한다.
시인이 화자를 통해 이렇게 진술하게 한 것은 우리의 현실 전체(말하기에 따라서는 성찰적 현실, 구조적 현실, 사회적 현실 등등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로부터
직접 경험 가능한 현실(혹은 개인적 현실, 경험적 현실, 경험 현상 등등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로만 시야를 좁히게 만드는 누군가(무엇인가)의 명령을 폭로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 명령은 자기 자신의 입을 통해 나오고 있으니, 내면화된 것이며 달리 말해서는 소외된 것이다.
또한 그 명령은 통찰하지 않는 경험으로는 지당하지만 그 지당함은 우리 자신을 사고하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위험한 것이다.
명령의 실제 주체가 밝혀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그것이 내면화되어 마치 자기 자신의 목소리처럼, 한 개인의 깨달음이나 혹은 지혜의 목소리로부터 나온 것처럼 말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제 화자가 타고 있는 상행열차의 방향이 주는 속성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은 판옵티콘(panopticon)과 구조적 상동성을 갖는다.
여기에 대해서는 구조적 읽기에서 다시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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