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와 내용
밥상, 주영현
하루를 마친 가족들 밥상머리 둘러앉습니다.
숟가락 네 개와 젓가락 네 벌
짝을 맞추듯 앉아 있는 가족 조촐합니다.
밥상 위엔 밥그릇에 짝을 맞춘 국그릇과
오물주물 잘 무쳐낸 가지나물 신맛 나는 배추김치
나란히 한 벌로 누워있는 새끼 조기 두 마리뿐입니다.
변변한 찬거리 없어도 이 밥상,
숟가락과 젓가락이 바쁩니다.
숟가락 제때 들 수 없는 바깥세상 시간을 쪼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자리에 둘러앉게 한 것은
모두 저 밥상의 힘이었을까요.
어린 날 추억처럼 떠올려지는 옹기종기 저 모습
참으로 입맛 도는 가족입니다.
「밥상」은 한 가족의 단란한 저녁 식사 공간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밥상 주변을 둘러앉은 네 명의 가족을 ‘조촐’하다고 말할 정도로, 그리고 이 장면을 ‘어린 날 추억처럼’ 보고 있는 화자는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일 터인데, 실은 추억처럼 대하고 있는 그 장면이야말로 추억이 형상을 입었을 것이다. 저 ‘입맛 도는’ 느낌은 필시 관찰 대상이 아닌, 화자로부터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 작품을 통해 구도와 내용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밥상」은 밥상에 조촐히 둘러앉은 가족과 그와 짝을 이루는 수저와 밥, 국그릇들, 그리고 두어 가지 찬들을 그려내 보여준다. 이 짝들은 한 가족이 각기 제자리를 잡고 앉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완전해지는 순간을 보여주는 공간적 구도이다. 그런데 저 ‘조촐한’과 ‘옹기종기’에 어울릴 만한 작은 방안 공간을 생각해 보자면, 밥상에 중심으로 내부로 초점화하는 내부 공간과 ‘바깥세상’으로 확장되는 외부 공간이 중첩되어 있다고 할 만한데, 이 공간들은 숟가락, 젓가락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밥상 위의 바쁨과 식사 시간 제대로 챙길 수 없이 일하고 있는 바깥세상의 바쁨으로 대비된다. 따라서 이러한 구도 속에서 가족과 식기들이 짝을 이루며 만드는 대응 관계는 바깥세상과 밥상이 만들어내는 대응 관계와 중첩적이면서도 동시에 대비적이다.
이쯤이면 흔히 사용되는 전쟁과 안식이라는 이분적 관계가 이 작품의 기본 구도임을 알 수 있다. 밖에서 전쟁처럼 힘들고 지쳐 있더라도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가족 품에서 안식을 얻는다는 단란한 가족의 따뜻한 저녁 시간을 만들어주는 공간으로서의 밥상을 초점화한다. 그런데 여기까지다. 한 가족의 단란한 저녁 식사 풍경을 그린 이 작품이 주제를 사회적 지평으로 넓힐 때 그에 의해 영향 받는 작품 속의 인물들은 여전히 막연하고 모호하다. 아니 그보다 가족(들)이라는 지칭은 있지만 그 실체성은 밝혀지지 않는다. 화자가 말하는 ‘저 밥상의 힘’은 밥상이 아닌 가족들로부터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실체는 마치 밥상인 듯 보이는 것이다.
김광균의 「은수저」에서는 애기 없는 밥상에 놓인 은수저 한 쌍이 결핍과 슬픔을 환기하고, 정현종의 「보살 이유미」에서는 밥때만 되면 모여드는 이 세상 걸신들을 모시는 특별한 식탁이 숭고와 생명성를 환기한다. 여기서 은수저는 그 주인의 부재를 증명하는 표지가 되고, 식탁은 공양의 신성한 공간인 신전을 상징하는 표지가 된다. 이 표지들을 읽게 됨으로써 독자인 우리는 ‘맨발 벗은 애기’와 ‘보살 이유미’를 비로소 구체적인 형상이자 함축적인 의미로서 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영현의 「밥상」에서 우리가 기대하게 되는 것도 이와 비슷한 것이다. 왜 그러한가? 「밥상」이 그리려는 것이 ‘밥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밥상이 아니라면, 어쩌면 그 밥상에 둘러앉은 가족들을 우리는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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