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표현, 혹은 클리세(cliché)
채송화, 조명제
백로(白露) 가까운 언저리
담장 위에 내어 놓인 분(盆)의
빨강색 채송화
철길도 녹여 휘어뜨린다는
일만 톤의 햇살을 받고도
작은 입 모양을 하고 이쁘게만 피어 웃고 있는
저 역광(逆光)의 황홀경, 그 속에 숨어 있는,
살을 파고들어 뼈를 찌를 듯
매섭게 꽂혀오는 부드러움의
강인한 힘.
이를테면, 나는 시의 배경에 대해 생각할 때에는 배경이 환경이 아닌 풍경으로 역할하게 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풍경으로서의 배경은 그것이 전경과 후경의 관계처럼 초점화된 대상을 부각하는 데 기능하는 경우에조차 그 전체가 하나의 단일한 정조와 분위기를 형성하도록 작용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배경으로부터 만들어지는 이미지와 초점화된 대상으로부터 만들어지는 이미지가 서로 겉돌게 되고, 시 전체로는 엔트로피를 증가한다.
이 시에서 ‘백로(白露) 가까운 언저리’는 작품의 시간적 상황성을 부여하는 배경인데, 정작 배경으로서 기능하는 바는 별로 없다. ‘백로(白露)’는 절기로 양력 9월 8일경으로, ‘철길도 녹여 휘어뜨린다는’, 아직 늦더위가 끝나지 않은 시기이다. 하지만 이미 아침 저녁으로는 심해지고 새벽녘 이슬이 맺히기도 할 것이니, 이때의 시간성을 배경으로 활용하기가 선뜻 용이치 않다. 잘하면 상투성을 벗어난 시상이 만들어질 수도 있으나, 그렇지 못하면 배경으로서의 효용이 무색해지는 부담이 있게 마련인데, 이 작품에서는 초점화된 대상인 ‘채송화’과의 관계 설정이 미완인 채로 남겨졌다. 단지 한자어의 간섭으로 인해 채송화의 시각적 이미지를 여성적이면서도 강한 존재로 받아들이게 하는 착시 효과가 있다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첫 행의 배경 설정을 대하니, 박목월의 「달」에서 읽었던 “경주군 내동면 / 혹은 외동면 / 불국사 터를 잡은 / 그 언저리로”라는 부분이 연상된다. 「달」에서 이 ‘언저리’는 세속과 탈속의 경계지를 가리키며, 그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 오히려 신비로운 공간감을 주는 배경 요소였다. 이것이 ‘배꽃 가지 반쯤 가리’며 가고 있는 달과 만나 현실에서는 목격할 수 없는 비현실적이되 현실화된 풍경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언저리’는 단지 시간의 경계를 말하는 것에 멈추어 있다. 그러니까, 정말로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9월 초에’라고 첫 행을 시작하는 것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저 색채적 착시를 제외하고는.
오늘 우리가 공부할 부분은 표현의 진부함이다. 사실 진부함을 관습으로 활용하는 방법과 그냥 진부한 표현은 다른 것이다. 이 작품의 첫 행은 위와 같은 이유로 그냥 진부한 표현에 속한다. 진부한 표현은 진부함을 활용하는 ‘클리세(cliché)'와는 구분되어야 하는 까닭은, 클리세가 중시하는 것이 타자들의 이해 맥락이라면 진부한 표현은 자신의 이해 맥락을 중시한다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해 맥락이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것이기 때문에, 진부한 표현은 표현 효과의 의도만큼 전달 효과로 실현되지 않는다. 예컨대, ’일만 톤의 햇살‘에서도 ’작은 입 모양‘을 한 채송화에게 엄청난 압력이 된다는 표현 의도는 읽혀지지만, 왜 늦여름의 태양이 여린 채송화에게 그러한 고통을 안겨 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사정이 없다. ’작은 입 모양을 하고 이쁘게만 피어 웃고 있는‘ 모습이 채송화의 본래 속성인지, 저 일만 톤의 햇살과 대비되는 채송화의 의지적 행위인지 또한 암시조차 없다.
클리세의 예를 찾는다면, ‘부드러움의 / 강인한 힘’ 같은 것이 되겠지만, 이것은 일반적으로 내면의 힘이나 유연성, 포용력, 약함이 강함이 되는 역설 같은 맥락에서 사용된다. 이것도 작품에서 찾기 어렵다. 클리세를 쓰고자 한다면, 어차피 작품의 내용 구조는 참신함을 갖지 못할 것이므로 세부에서 관찰의 섬세함이 확보되어야 한다. 예컨대,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시메산골
영 넘어가려고 그래서 울지.
(중략)
불귀(不歸), 불귀(不歸), 다시 불귀(不歸),
산수갑산에 다시 불귀(不歸).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십오 년 정분을 못 잊겠네.
- 김소월, 「산」에서
산새가 우는 것은 떠날 수 없어서, 혹은 떠나야 해서일 것이다. 이는 새가 땅에 내려 앉아 휴식을 취하지만 삶의 본질은 날아다니는 데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반면에) 산새가 텃새임에도 불구하고 사람 속에 살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존재의 숙명을 환기하는 근본적 맥락이 존재하고, 고개를 넘는 구름이 비를 내리듯 산 넘어 가는 산새가 우는 것이 자연스러운 메타 인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성립하는 클리세이다. 게다가 매우 일반적이다. 이러한 경우 시적 성취를 얻기 위해 세부의 발견이 필요하다. 소월은 이 부분을 “불귀(不歸), 불귀(不歸), 다시 불귀(不歸), / 산수갑산에 다시 불귀(不歸).” 같은 표현의 참신성을 통해 해결한다. 이것은 시상의 구체화와 현실화에 기여한다.
「산」에 비추어 보면, 이 작품에서는 클리세의 기능도 크지 않고, 또한 클리세를 활용하는 세부의 관찰 같은 방법도 취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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