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운이 깔린 저녁이다
전황이 질척일 낌새다
흉흉한 소식을 전하는 전령 같이 밤 바람이 지나자
배수진마냥 도로를 뒤로 하고 희고 검은 참호들이 진지전을 펼친다
ㅡ 하지만 그들은 이동한다 ㅡ
참호마다 눈을 밝히고 짧은 사이렌을 수시로 울려 공습에 대비하는,
준비된 자들이 그 참호 속에 있다
ㅡ 그들은 이동한다 ㅡ
이내 대규모 공세가 시끄럽게 방어진을 흔들겠거니
하던 예상과 달리
하늘은 조용히, 거스를 것 없이
지상에 강림한다
ㅡ 그들은 어디론가 이동한다 ㅡ
그들은 떠나고
벽과 담들은 무너져 버린 전세를 보도한다
하늘은 지상을 거의 점령했고
간신히 남은 전선의 중간지대에서
담배 한 대 피울 동안의 낭만스런 능청을 연기할 여유도 빼앗기고
참호에서 내쫓겨
잠시 담벽으로 피해 서 있던
오후마저 피로했던
외로운 병사들이 남겨져 있다
배수진도 소용없이
죽어서도 하늘을 침공해야 할 형벌을 받은
하늘로 거꾸로 매달린 불신자들이다
필패의 운명이 지상의 몫일 때
외로운
병사들은 매번 하늘의 공습 앞에 내보내진다
빈몸으로 병사들은 매번 하늘의 공습을
받아내며 빈몸으로 병사들은 매번 하늘의
공습을 받아내며 본다 매번
외롭게
벽과 담들이 증거하는 역사의 기록을
거기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보아라, 간판들 비에 젖는다
간판의 글자들 사이로 빗물이 흘러내린다
어디에 붙었던 것인지 모음 'ㅏ'를 흔들어 아아아아
글자들을 씻어내고 눈물만 남겨놓는다
그리고 나면 거기에
이름 없이 일하던 자들의
불립문자가 성립할 것이다
(20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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