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비유의 배경과 원리
경험 세계와 은유적, 환유적 사고
우리가 경험 세계라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일종의 관념 체계이다. 경험 세계는 우리가 경험한 것들의 목록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목록들에는 선별된 개념이나 이름들이 행과 열을 이루고 있다. (라고 쓰지만) 이 목록을 일컫는 말인 카테고리, 달리 말해 범주는 실제로는 정연한 체계가 아니다. 행과 열은 그렇게 잘 정렬되어 있지 않다. 삐뚤삐뚤한 행과 열에, 중간 중간에는 분기되고 통합되는 부분이 있기도 하고, 행이나 열의 시작과 전개를 두고 벌어지는 쟁투가 어휘들의 가로쓰기와 세로쓰기를 혼란스럽게 한다. 물론 단일하게 존재하지 않는 범주는 서로 연관된 매개를 통해 어떤 것들은 계열로 위계 관계를 맺고 어떤 것들은 범위로 그 설명의 대상을 포괄한다. 그래서 범주는 범주 체계로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1) 하지만 때로는 어느 지점에선가 만나게 될 범주들이 당장은 평행을 달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범주의 행과 열이 펼쳐놓는 이차원 평면 위 혹은 그 아래에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펼쳐질 수도 있다. 2)
경험 세계라는 것이 어느 누구에게는 그래도 비교적 명료하게 느껴질지는 모르나 실제의 경험 세계는 (왼쪽 도해처럼) 정연한 논리화를 위해 실제의 경험 요소들을 억지로 틀에 맞추어 받아들이고 있을지 모른다. 만약 사람1, 2, 3이 전부인 세상에서 그들이 (위 도해들처럼) 서로 조금씩 다른, 혹은 크게 다른 범주를 마음에 체계화해 두고 살아간다고 가정하면, 모두가 공유한 경험 세계라는 것은 관념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일 뿐 그것이 실제 자신이 경험한 내용과 다를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의 경험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다. 혹은, 공유된 경험 세계가 작아져서 나와 다른 세계관, 또는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다른 사람들과는 같은 하늘 아래 공존하고 있다고 볼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눈 앞에 그가 보이기는 한다. 보이기는 하는데,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이것이 일단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생각의 전제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받아들이고 표현하고 소통하기 위해 적어도 다음 두 문제를 해결해야 함을 알 수 있다. 1) 하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험의-사고의-표현의) 범주는 서로 어떤 관계를 맺으며 경험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가 하는 의문에 답해야 한다는 것이고, 2) 또 하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의-사고의-표현의) 범주가 다른 사람과 과연 통용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에 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범주가 실은 2차원적 평면도 위에 펼쳐진 엑셀표처럼 구성되어 있는 게 아니라 3차원적 공간 위에, 게다가 시간의 축을 따라 바뀌기까지 하는 시-공간에 펼쳐진 다차원적 텍스추어처럼 직조되어 있다면,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겠느냐 하는 질문은 여기서는 하지 않겠다. 문제가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져 이쯤에서 그만 두고 싶어지게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여러분은 머리 아프다고 하면서 다들......아니 누군가 경험했음 직한 상황에 대해 한마디씩 거들 수 있을 것이니, 인간이란 대단한 존재인 것이다. 3)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는 대신, 문제에서 탈출하기 위해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에 기대는 방법도 있겠으나, 보편적 개념과 그것의 상위 범주를 버리고 오직 지각된 대상에 의한 지식만을 받아들이는 이 입장에서는 그 지각이 분별되고 명징해지기 위해 불가피하게 동원할 수밖에 없는 '일반적 혹은 추상적인 용어'가 어디에서 주어진 것인지를 설명하지 못하기에 결과적으로 문제 탈출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우리의 경험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사고의 범주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되묻게 된다.
첫 번째 과제에 답하는 과정
언어화되기 이전의 사고, 또는 언어화되지 않고 이루어지는 사고를 상정해 볼 수 있지만, 대개의 사고는 언어라는 통로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사고의 범주는 언어에 기대고 있고 결과적으로 그것을 관찰하는 '표현의 범주'에 기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 이상이 있겠으나 일단 여기서는) 다만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예외적 조건을 갖는다. 하나는 모든 언어가 범주로 정연하게 묶여 있지 않다는 점이다. 어떤 경험을 지칭하는 언어 표상(표현의 범주에 속한 모든 단어들)은 범주 설정 과정에서 계획적으로 발명되거나 창안된 것일 수 있지만 그 이전에 경험적으로 형성되어 유사한 것들끼리 묶여 축적되어 있다가 나중에 범주 목록에 포함되는 것들은 그보다 많다. 전자는 분류를 통해 속성들을 부여받게 된다는 점에서 개념으로 불리게 되지만, 후자는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경험 대상을 지시하는 범위와 심급을 한정하는 정도의 명칭(용어)에 머무르게 된다. 개념과 명칭 들을 단어 수준에서 수집해 놓은 국어 사전을 보면 개념 설명보다 용어 풀이가 더 많이 보이는 것은 모든 단어를 범주로 묶어 분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분류 사전마저 그러하다.) 범주 목록에는 개념과 명칭이 뒤섞여 있게 되고 이는 앞에서 보았던 불안정한 범주 목록이 만들어지는 핵심적인 원인이 된다.
또 하나의 예외적 조건은 경험 대상이 사고의 과정에서 처리될 때 언어 이상의 차원에서 범주 선택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폐쇄적 체계를 갖는 시험 답안지의 정보 처리 과정을 보면 모든 답안지의 각 문제별 반응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선택지 중 하나의 값이 입력되도록 조건화되어 있다. 5지 선택형 1번 문제에 대한 수험자의 반응이 '1번'이라는 표시값에 반응하면 '정답'이라는 해석값을 넣어 2점을 추가하는 식이다. 이 외에는 모두 오류 처리를 하여 0점을 주도록 사전 설정하면, 이 폐쇄적인 채점 시스템은 모든 답안을 정확히 분류하여 목록화할 수 있다. 따라서 1번 문제에 다른 수험자가 '2번'에 반응하면 '오답'으로 0점이 추가될 것이다. 좀 더 복잡한 채점 시스템에서는 보상 원리를 사용할 수도 있는데, 예컨대 정답 중 허용 답에 기본 점수를, 최선답에 가중 점수를, 매력적 오답에 0점을, 그리고 오답에 감점을 주게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폐쇄적 체계가 아닌, 경험 세계의 이해를 생각해 보자. 경험 세계를 설명하는 기본적인 도구(이자 통로)인 언어는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있지만, 이미 그 중 다수를 차지하는 명칭들은 그 지시의 범위와 심급이 경험 주체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지구 상의 지리적 위치에 따라 '눈(雪)'을 나타내는 단어의 수가 각기 다르다는 사실은 언어와 경험의 관계를 설명할 때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예 중 하나이다. 이때 '눈(雪)'을 사고의 범주로서 본다면, 이 말은 사고의 범주를 지시하는 표현의 범주의 범위와 심급은 각기 다를 수 있다는 진술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당연한 듯 전제하고 사용했지만, 이때의 '눈(雪)'은 과연 같은 경험의 범주였을까? 이때 '눈(雪)'에 대한 사고의 내용이 달랐기에 언어 표상이 달라진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면, 사고의 범주 또한 달랐을 것임을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한 내 경험적인 답변은 '공약불가능성'4)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경험의 범주는 폐쇄적 체계가 아닌 개방적 체계로서 이 순환론적 문제상황의 외적인 조건을 보게 된다. 그것은 경험과 독립적으로 경험 주체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담론 환경들이다.
두 번째 과제에 답하는 과정
내가 경험한 것이 다른 사람이 경험한 것과 다르다는 것은 경험의 범주가 복수로 존재하며 그것을 우리가 선택적으로 수용했음을 시사한다. 물론 이 경험의 범주는 그에 선행하는 언어와 연동된 사고의 범주로부터 규정되며, 계기적으로는 사고의 범주에 영향을 미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언어는 경험-사고-표현의 범주들이 상호작용하는 과정 속에 현존하기 때문에 기표 밑에서 기의가 계속해서 미끄러진다. 이는 표현이 경험 대상과 사고를 제대로 지시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표현이 흔적처럼 남아 있지만 사고는 계속 바뀌고 경험 대상도 함께 변해간다는 의미가 된다. 이 때문에 공약불가능성의 문제와 별개로 표현의 범주는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근거이면서 동시에 소통의 장애 요소로서 기능한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는 흔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표현의 범주를 통해 소통을 할 수밖에 없는 제약을 갖는다. 반면 퍼트남(Hilary Putnam)이 쿤을 비판하면서 언급한 '해석상의 관용', 혹은 쿤이 스스로 마련해 두었던 논리로서의 '대강의 번역'이 소통의 가능한 조건이 된다.
지금까지 언급한 범주는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개인에게 요구된 일종의 암묵적 규칙 같은 것이다. 이것들은 교육을 통해 개인이 내면화하며, 내면화의 각 시점은 경험, 사고, 표현이 각기 상이하다. 많은 경우 범주는 표현의 범주에 대한 사전의 학습을 거쳐 사고의 범주로서 형식화하며, 이를 도구이자 통로로 하여 경험을 수용하면서 내면화한다. 이때 사고 과정에서는 개념이 지식의 형식으로서 직접적으로 또한 단선적으로 수용된다기보다는 우선 심상화를 통해 지각적 대상으로 파악된 다음 이때 추출된 속성들에 근거하여 개념화하면서 이해되는 경로를 갖는다. 그리고 핵심적으로 이 이해가 내면화되기 위해, 곧 학습된 것이 되기 위해 개념들은 지식의 형식으로 분류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경험된 세계가 지식의 형식으로 수용되는 범주화 과정이 진행된다. 따라서 지식의 형식은 경험 주체 외부에 이미 있기는 하였으나 경험 주체에게 유의미한 대상으로서 수용되기 위해서는 경험 주체 외부에 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시 구축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범주는 '경험-사고-표현의 범주1'의 내부 반영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고 범주화의 방식이나 결과물 또한 경험 주체가 간여하여 재구축된 것이 된다. 우리는 이를 '경험-사고-표현의 범주2'로 구분할 것이다. 이것은 경험 주체의 내부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범주와 통용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를 다시 표현하여 다른 사람과 경험과 사고를 공유하고자 한다면, 그때는 '경험-사고-표현의 범주2'를 다시 선택할 것이다.
은유적 사고
환유적 사고
(바로바로 생각하고 쓰는 중이라 모든 내용이 체계적이지는 않습니다. 나중에 보충하는 것으로 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 보려고 합니다
각주
1)
여기까지 '범주'라는 용어가 여전히 어렵게 여겨진다면, '세계관'이라는 말로 대치해 놓고 읽어 보기 바람. 이렇게 바꾸어 보면, 세계관은 여러 세계관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으면서 때로 서로 대립도 하는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말로 읽힐 것이다. Marble 세계관은 DC 세계관과는 다르지만 있을 만한 영웅과 악당들은 비슷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평행 우주 세계와 여러 장르의 주인공들이 각자의 세계관에서 활동하면서 전체 세계관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도 비슷하다. 하지만 두 세계관은 마블이 모든 영웅과 악당에게 어느 정도 선악이 혼재하는, 그래서 결함 있는 영웅과 사연 있는 악당이 세계 질서의 방향을 두고 대립하는 데 비해, DC는 세계의 질서를 파괴하려는 악당에 대해 세계를 지키려는 영웅이 대립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마블 세계관에는 현실과 대응하는 실존 장소들이 있고, DC 세계관에는 영웅과 악당을 위해 세팅된 가상의 장소들이 있다.
2)
아래의 예시 상황을 상상해 보자. 이 상황을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표현들은 가족, 동료, 회사를 각각 상위 범주로 삼는 개념과 용어들에서 선택된 것들이다. 가족, 직장 동료, 회사 같은 범주는 또한 가족 관계, 집안, 직무 관계, 회사 간 관계 등의 범주들에서 선택된다. 범주 내의 서로 구분되는 개념과 용어들은 어느 지점에서는 빈자리를 갖기도 하고, 혹은 다른 범주 내에서 서로 연결된다. '직장 동료'라는 범주에서 보면, 나와 윗집 동료는 전체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비교되는 명료해 보이는 행의 계열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윗집 사는 동료'가 어느새 '그 친구'로 바뀌는 것은 그를 타자화하고 같은 성격의 집단에서 배제시키려는 태도를 반영한다. 독자에게는 미안하다. 실은 이 글을 상상적으로 구성하면서 '나'의 태도를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가족 관계'라는 범주는 '직장 동료'의 맥락을 형성하는데, 이 범주가 안정적인 범주 체계를 가졌더라면 '직장 동료'로서 나와 윗집 사는 동료도 안정적인 비교 요소들을 계열로서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가족'과 '윗집 사는 동료의 가족' 역시 '가족 관계'라는 범주에서 보면 비교하기 어려운 이질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호칭 문제, 집안 내력, 취업 배경, 직업 의식 같은 범주의 계열들에서 일종의 범주의 간섭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 내가 한글 문서가 두 가족이나 두 사람을 비교하는 표를 만들면 깔끔하게 내용이 정리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실제로는 비교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을 임의로 비교한 것이 된다. (예컨대, 내 아내의 '오빠'와 윗집 동료의 '여동생'이 비교 셀 안에 들어간다고 해서 그게 무슨 관계겠는가?)
내 가족은 가족 내에서의 관계와 지위를 통해 이름들을 부여받고 범주로 묶인다. 윗집에는 비슷한 또래의 직장 동료가 가족과 함께 사는데 그들도 가족의 범주로 묶인다. 두 집은 비슷하게 비교되고 있지만, 자식의 수가 달라 어느 부분에서는 비교가 안 되는 어긋남이 있다. 두 집의 가족들은 삶의 지향이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해서 주말이나 여가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다르다. 영화, 공연 관람, 여행으로 이루어진 우리집과 여행, 운동, 사교 모임으로 이루어진 윗집은 여행이라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휴양지에서 푹 쉬는 스타일과 도시 골목길을 모험하는 스타일이 전혀 다른 여행의 이미지를 만든다. 윗집 직장 동료의 여동생은 얼마 전 연애를 시작했는데, 상대방이 하필 내 아내의 오빠라는 것이다. 그걸 불과 보름 전에야 알게 되었는데, 두 연인이 곧 우리집과 윗집을 방문한다고 한다. 잘못하면 나와 윗집 동료 사이에는 호칭 문제가 복잡해질 수도 있겠다.
나와 윗집 사는 동료는 회사에서 중간 간부인 팀장으로 각기 다른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다. 나는 대학 졸업하기 전에 뜻하지 않게 일이 잘 풀려 그 어렵다던 회사에 스카웃을 통해 입사했다. 노동자 집안의 장남으로서는 무려 군 생활을 빼고도 대학을 6년 다니며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타진해 가면서 만들어낸 포트폴리오 덕분에 신분 상승을 경험한 셈이다. 그래서 입사 이래로, 특히 팀장이 된 이후로는 더욱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내 팀이 회사 내에서 최고의 팀이 되게 하려는 노력을 해 왔다. 윗집 동료의 집안은 오래 전부터 이 회사와 거래하는 원청 회사를 운영해 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막 대리 직함을 떼고 팀 내 선임 역할을 시작했을 때 윗집 동료가 입사를 했는데 오자마자 제품 개발부 부팀장 자리를 맡게 된 것이다. 원청 회사와 제품 개발 단계에서부터 협력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는 사장의 기대가 있었던 것인지, 우리 회사를 은근슬쩍 먹어치우려는 원천 회사의 음모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윗집 동료의 취업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그쪽 집안의 압력이 있었던 것인지, 그건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친구에게도 엄청난 행운이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건듯만 하면 이 친구는 불만 불만 불만 투성이다.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라 원청 회사 인사부 또는 기획조정실쯤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3)
이 역시 아래 사례를 참조할 것.
소꿉놀이 꼬마(여자, 또는 남자)와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를 하고, 같은 중학교를 다니면서 여자(또는 남자) 친구를 하고, 각자 남고와 여고로 진학한 후에 조금 서먹서먹하면서도 이웃집 또래로서, 같은 학원 동기로서 이성 친구가 되었다가, 졸업하고 한 사람은 대학에, 다른 한 사람은 직장으로 소속이 바뀌어 옛 여자사람 친구(또는 남자사람 친구)라고 부르다가, 어느 날 우연히 불꽃 튀는 시선을 나눈 뒤 애인이 되어 결혼에 성공해서 부부가 되었을 때, 이 둘의 인생에서 서로를 부르는 호칭은 인간 관계의 범주 속에 하나의 요소로서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인간 관계의 범주라는 것이 하나의 목록이 아니다. 만약 하나의 목록에 각 시점의 호칭을 자리잡으려고 한다면 위 도해의 가운데 것과 비슷하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실패할 수 있다. 도대체 '여자사람 친구'(또는 남자사람 친구)는 '애인'과 '이성 친구'와 '동네 친구'와 '친구'와 어떻게 다르고 같다는 것인가. 그러니까 과연 '여자사람 친구'(또는 남자사람 친구)는 어째서 굳이 만들어진 호칭인 것인가. 이 호칭들이 같은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었으니, 우리는 여러 개의 목록이 겹쳐진, 즉 여러 범주가 겹쳐진 3차원적 분류법을 한꺼번에 보고 있는 셈이다. 이 분류법은 시간 차원의 줄에 걸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4)
공약불가능성이란, 쿤(Thomas Kuhn)이 상이한 패러다임 간에는 상대방의 관점에 완전히 접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패러다임이 상이하다는 말을 같은 대상을 다르게 정의한다는 의미로 매우 축약적으로 풀이한다고 하더라도, 이 개념이 뜻하는 바는 결국 패러다임들 간에는 대상에 대한 동일성에 기반한 보편적 이해의 맥락이나 공통된 척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쿤은 이 개념이 극단적 상대주의를 지지하는 것으로 오해될 것을 우려하여 후일에 이른바 '국소적 공약불가능성 테제'를 제시한 바 있다. 공약불가능성은 패러다임 간의 서로 다른 전제와 시각이 갖는 중재 불능성을 정당하게 지적하는 개념으로, 이것이 극단적 상대주의와 순환론적 논리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지식에 앞서 경험을 규정하게 하는 외적인 조건으로서의 언어의 선택적 사용 환경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체 내용
1. 프롤로그: 비유법, 수사법, 그리고 비유 9thpoem.tistory.com/585
2. 비유의 배경과 원리
- 경험 세계와 은유적, 환유적 사고 9thpoem.tistory.com/594
- 비유 표현으로서의 전의 9thpoem.tistory.com/614
3. 하위 개념과 유사 개념
- 하위 개념인 은유와 유사 개념인 아날로지
- 하위 개념인 환유와 유사 개념인 알레고리
4. 전의의 수사적 전략
- 동일화와 속성 투사 : 은유법과 직유법
- 조응과 속성 환원 : 활유법과 의인법
- 연상과 일반화 : 환유법과 제유법
- 암시와 돌려말하기 : 우의법과 풍유법
5. 경계에 있는 비유법들
- 의성법과 의태법 : 모사의 비유와 상징
- 인유 : 텍스트들의 생태계 간의 비유적 관계
※ 이 글의 배경 그림으로 쓰기 위해 가져온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 Ghost in the Shell'(1995)의 한 장면. '생명의 나무'로도 불리는 계통수(phylogenetic tree)는 진화의 계통과 과정을 나무에 비유하고 있다. 이 나무의 정점에는 라틴어로 인간을 뜻하는 'hominis'가 적혀 있지만 나머지는 어류의 명칭들이다. 라틴어의 뜻은 구글 번역으로 확인한 것이니, 정말로 '인간'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확신하지는 못한다.(유전적 계통이든 진화의 계통이든 이상해 보이는 건 당연하니까....) 다만 어떤 생물의 계통이든 간에 그 진화의 정점에 인간이 있다는 의미로 넣은 듯하다. 이 그림의 원 출처는 찾을 수 없었는데, 19세기 독일의 저명한 진화론적 생물학자이자 박물학자, 의사, 화가, 교수 등등이었던 에른스트 헤켈의 유기체의 계통도를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헤켈의 계통도는 몇 가지 형태로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역시 수형도로 그려져 있다. 나무는 단일 유기체이면서 그 가지와 잎사귀들의 형상을 통해 수많은 유기체들을 포괄하고 있는 통합 유기체처럼 이해되기도 한다. 이것은 진화론적인 설명에도 적합하지만 모든 것은 단일한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다는 '공각기동대'의 세계관에도 적합한 비유이기도 하다. (불과 5초 남짓하게 등장하지만) 아래의 장면이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아마도 이 장면에 주제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쿠사나기가 언덕 아래의 도시 야경을 보는 모습이 나오는데, 도시의 불빛들이 마치 방사형 웹처럼 연결되면서 이 도서관 계통수 장면과 오버랩됨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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