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표현으로서의 전의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이 오묘한 음상을 활용한 긴장은 완고해 보이고 잘 치장되어 있는 사회 체제일수록 그 완고함이 만들어내는 불안정한 일체성이 갈등을 증폭시키는 내적 모순으로 작용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시행에서 '틈'은 결함, 무질서, 갈등, 의도치 않은 과정의 여지 같은 의미를 함축하는 비유로 사용된다. 우리의 경험 세계에서 틈은 형태의 내외 경계 구분이 분명한 둘 이상의 사물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니, 이 진술은 절반쯤은 납득되고 절반쯤은 이상하게 여겨지는 표현이다.
틈, 김기택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 속에 빛을 우겨넣고
버팅겨 허리를 펴는 틈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 년의 시간, 분, 초로 나누어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서울, 거대한 빌딩의 정글 속에서
다리 없이 벽과 벽을 타고 다니며 우글거리고 있다
지금은 화려한 타일과 벽지로 덮여 있지만
새 타일과 벽지가 필요하거든
뜯어보라 두 눈으로 확인해보라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든 천연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틈! 틈, 틈, 틈, 틈틈틈틈틈……
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나 풀잎의 등을 밀어주던
나약한 힘이다
이 힘이 어디에든 스미듯 들어가면
튼튼한 것들은 모두 금이 간다 갈라진다 무너진다
튼튼한 것들은 결국 없어지고
가냘프고 나약한 허공만 끝끝내 남는다
(바늘구멍 속의 폭풍, 문학과지성사, 1994)
전의(轉義)
'전의(轉義)'는 명사로서 '본래의 뜻에서 다른 뜻으로 바뀜. 또는 그렇게 바뀐 뜻'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국립국어대사전의 해당 항목의 동음이의어 열일곱 번째의 뜻풀이로, 이 말 자체가 일상적으로 대하게 되는 것은 아닌 셈이다. 국어사전의 뜻 풀이로 보자면, 전의는 어떤 현상이고 그 현상의 결과이다. 그러니 '전의하다'보다는 '전의되다'로 주로 쓰이고 '전의하다'로 쓰일 때에도 의미상 피동 표현으로 활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국어사전의 어휘 수집이 그러하다는 점에서) 용례적으로 본다면, '나는 이 단어를 이러저러하게 전의했다.' 같은 식의 표현은 자연스럽지 않은 셈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전의를 위해 역할을 해야 할 복수의 주체가 있음을 시사 받게 된다. 말하자면, 전의는 사후적인 해석을 중요한 개념 요소의 하나로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작자나 화자가 의미를 바꾸어 사용했다라기보다는 오히려 독자나 청자가 의미를 다르게 이해했다는 뜻. 물론 작자나 화자는 비유 표현으로 다른 어휘를 가져 왔으니 이 맥락의 어긋난 결은 독자나 청자가 의미를 다르게 이해할 바탕이 된다.
사실 어떤 표현이 본래의 뜻과 다른 뜻을 나타내게 되었다고 풀이하는 것 역시 적절하지 않다. 어떤 표현에 본래부터 붙어 있던 뜻이 있지를 않기 때문이다. 언어 표현은 기호로 태어났고 기호로 살아가다가 기호로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조개껍데기가 조개의 삶을 뛰어 넘어 존재했을 때, 그것은 여전히 조개껍데기였을 뿐이지만, 사람들이 이 초월성에 교환적 가치를 부여했던 것처럼. 따라서 언어 표현은 의도되고 이해될 수는 있지만, 애당초 작자나 화자의 머리로부터 그들의 생각을 가지고 나올 수도 없고 독자나 청자의 머리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들어갈 수도 없다. 그러니 이 설명은 조금 바꾸어 재진술할 필요가 있다.
'전의'란 어떤 표현의 사용이 그 사용의 맥락에서 사람들에게 관습적으로 약속되었던 것과 다른 뜻을 가리키게 되는 것을 말한다.
전의의 요건
'틈'은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다. 그뿐 아니라 제 스스로 생기는 것도 아니다. 튼튼한 것 내부에 있는 요소들 간의 비균질함이 한계치를 넘어 이제는 그 내부 요소들이 경계를 사이에 둔 외부적 관계를 갖게 되었을 때, 그 결과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 틈인 것이다. 따라서 앞의 인용 시행은 일상의 진술에서였다면 다음과 같이 표현되었어야 할 것이다.
"튼튼한 것 내부에도 틈은 생긴다."
어떻게 표현해도 이 표현은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같은 표현으로 바뀌지 않는다. 이 두 표현 사이에는 주체와 상황의 원인과 상황 발생의 필연성에 대한 상충하는 인식이 각기 작용하고 있다. 비유는 애당초 새로운 인식을 바탕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1)
하지만 이제 비유가 사용되어 시행과 같은 표현이 사용되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여기에는 적어도 세 가지 설명되어야 할 것들이 있게 된다.
사고, '사회적 갈등과 모순'(을 의도한 심상이었다고 가정해 보자)으로부터 '틈'을 떠올리게 된 것은 선택적인 과정이다. 달리 말해, 우연한 사태이다. 이 둘을 연상을 통해 연결하게 된 것은 시인(또는 그 누구라도)이 그 연상이 가능한 사고 연상 체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왜 그리 되었느냐는 결국 그의 사고 체계에 주어진 교육적 영향력 때문이라고 설명할 방법밖에 없다. 그 영향력으로 그의 사고 체계는 그의 경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수단과 통로를 갖게 되었고, 그렇게 형성된 경험 세계는 그의 사고 체계를 더 논리화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이 진술은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기는 하다. 현실에서는 같거나 유사한 것뿐 아니라 상이하거나 심지어는 모순되는 연상과 상상과 논리적 연관의 규약과 관습 등이 여러 방향의 교육적 영향력의 내용으로 주어질 수 있고, 그 결과 사람들마다―또한 그 사람 내면에서― 논리적 사고 체계나 신념 체계나 사고 연상 체계 등이 약간씩, 혹은 심대하게 다를 수 있고, 모순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타인에게는 해석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김기택 시인이 틈을 유기체처럼 연상했던 까닭은 무엇일까?'에 대해서는 답하기 어려워도 '김기택 시인이 어떤 방식으로 틈을 유기체처럼 연상했을까?'에 대해서는 우리가 해석할 수 있다.
진술, 비유 표현으로 사용된 '틈'은 모호하거나 애매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틈'은 중의적이거나 이중의 함축(그러니까 '틈'이 함축을 함의처럼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도 어려울 것이니 잠시 후 부연한다.)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미 의도한 심상(원관념)인 '사회적 갈등과 모순'(이라고 가정해 두자.)의 확장된 의미로 '틈'이 떠오른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무언가 결함이나 무질서, 갈등, 의도치 않은 과정이 벌어질 여지 등의 의미를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 이러한 의미를 가진 어휘로서 '틈'을 떠올린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틈'은 명사로서 '벌어져 사이가 난 자리, 모여 있는 사람들의 속, 어떤 행동을 할 만한 기회,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거리' 등으로 공간적 거리의 양상을 나타낸다. 원관념을 보충하는 보조 관념(혹은 target을 가리키는 source)으로서 '틈'은 그러한 의미로서 연결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틈'을 '튼튼한 것 속에서 탄생한' 것으로 다시 연결지으면 (이 시행과는 전혀 별개의 얘기이지만) 이제 시어들의 연결에 균열이 생기게 된다.
해석, 시어들이 연결되어 이해할 수 없는 사고의 연결을 요구 받게 되었으므로, 이제 이 시어들의 연결을 이해할 만한 것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청자나 독자는 결국 '결함, 공백, 갈등, 의도치 않은 과정의 여지' 같은 함축을 해석의 내용으로 제출한다. 이 해석의 능동성으로 인해 비유 표현의 전체 맥락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때 진술의 차원에서와는 달리 해석의 차원에서는 모호성이나 중의성이 생긴다. 비유 표현으로 '틈'이 선택되고 나면 맥락 치환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는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치인데, 시행에서 '틈'만 대체된 것으로 가정할 때에는 시행의 의미가 이상하게 바뀐다.
"튼튼한 것 속에서 무질서는 탄생한다."
'튼튼한 것'과 '무질서'는 그 의미의 지시 대상이 서로 다르다. 혹은, 거꾸로 '틈'만 직접적인 의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강한 통제 기구들 사이에서 틈은 생긴다."
이렇게 되면 마치 통제 기구들 간의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것을 진술한 것이 되고 만다. 맥락 치환은 상징이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비유에서도 요구된다. 특히 비유에서는 맥락 치환을 위해 맥락을 형성해야 할 자리의 시어들이 모두 비유적 대상으로 대체될 필요가 생긴다.2)
인용시에서는 '틈'이 '태어난다'는 표현 부분이 매우 흥미롭다. ('틈'에 관한 언급은 이미 한 바 있고) 위와 같이 비유 구조가 만들어질 때 왼쪽 하단, 즉 '사회적 모순과 갈등'이라는 의도된 심상(이 맞다면)의 과거-현재-미래적 변화에 대한 함축이 가능해지도록 그 하위 속성들이 구축되어야 한다. 인용시의 작시와 독해 과정에는 튼튼한 체제가 허물어진다는 인식론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해석적 내용인 함축을 위해서는 '틈'과 '튼튼한 것'에 무엇인가 변하는 게 있어야 한다.(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변화하는 것'에 대한 발견으로 인해 튼튼한 체제가 허물어진다는 인식론이 가능해진 것이리라.) 변하는 것은 본디 자연의 이치이겠지만, 인간의 인식 체제로는 이 '굳은 철근과 시멘트'로 만들어진 '튼튼한 것'이 변화할 것으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래서 그 역할을 '틈'이 하게 되고, 이때 '틈'은 일종의 유기체적 존재로서 이 무기물적, 혹은 기계적 사회 체제 전체를 변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표현의 차원에서 보면, '틈'이 유기체적 존재로서 함축되는 두 번째 맥락 치환이 흥미롭다는 것이다. 일단 '사회적 모순과 갈등'이 '틈'으로 비유되면서 요구된 맥락 치환이 하나 있고, (실제 작시 과정에서는 거의 동시적이었겠지만, 논리적인 측면에서) '태어난다'는 비유 표현이 그 다음에 선택되면서 요구되는 맥락 치환이 또 있는 것이다. 아마도 시에서는 이러한 맥락 치환이 계속적으로 일어나면서 단순 반복을 피하고 의미의 풍부성을 의도하며 시상을 발전시키고 결과적으로 전체 시상을 주제적 심상으로 통합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3)
전의의 과정
마음의 집 한 채, 감태준
바다를 건너 간 친구한테 편지를 쓰다가
바다를 밀어 오는 쓸쓸함에
밀리고 밀리다가
마음 혼자
아는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는
밤 열한 시
나는 가네, 서울을 나간 사촌은
고향 근처에서 벽돌을 찍는다더니
오늘은 무슨 벽돌을 찍고 있을까
어둠 속은 깊어지고
이제 더 깊어질 것이고
구두쇠 박씨는
지금도 문패 대신 맹견주의표를 붙이고 있을까
처음 보는 집을 나와
2층 3층에서
골목을 내려다보고 있는 집을 나와
담장 안에 숨어 있는 집을 나와
주인 없이 문만 열린 집을 나와
좁은 골목에서 서로
어깨를 밀고 있는 집을 나와
어제도 갔던 집
염치는 없지만 안심하고 머무는 집
소주를 마시고
죽은 멸치 몇 마리를 고추장에 찍어 먹은 잘못 밖에 없는
시인의
홑옷 한 벌이 빨랫줄에 널려 있는 집으로 들어간다
어둠 속은 깊어지고
이제 더 깊어질 것이고
시인 한잔 마음 한잔
신문지를 깔고 잠든 마른 멸치도 한잔
셋이서 구겨진 몸들을 펼쳐 놓고
자거라 자거라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 우는 소리를 재운다
(마음의 집 한 채, 미래사, 1991)
감태준의 '마음의 집 한 채'를 예로 삼아, 하나의 비유 표현이 성립하게 되는 사고-진술-해석의 연쇄 과정을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의도한 심상을 나타내기 위해 특정 시어를 사용하면 시어는 그 심상이 요소로 자리잡고 있는 진술의 의미 맥락과의 거리 정도에 따라 해석의 능동성을 다르게 요구하며 이로 인해 생기는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해당 시어 외의도 다른 시어들에 해석적 맥락을 부여할 수단들을 부여하게 된다. 이것은,
○ 선택한 비유 표현이 진술의 의미 맥락과 가까우면 시어는 보충적 성격을 갖게 되고
해석의 능동성은 덜 요구되며 기존의 맥락이 유지된다.
"시인의 / 홑옷 한 벌이 빨랫줄에 널려 있는 집으로 들어간다" (감태준, '마음의 집 한 채'에서)
→ '홑옷 한 벌'은 빈궁한 생활을 가리키는 제유 표현으로 굳이 '빨랫줄에 널려 있'다는 의미를 해석하지 않아도
전체 맥락이 이해된다.
○ 선택한 비유 표현의 이질성이 크면 그만큼 맥락 치환의 요구가 강해진다.
"바다를 건너 간 친구한테 편지를 쓰다가 / 바다를 밀어 오는 쓸쓸함에 / 밀리고 밀리다가"
(감태준, '마음의 집 한 채'에서)
→ '쓸쓸함'은 '바다 건너 간 친구한테' 쓰는 편지와 대칭적 계열에 놓여 있다.
외로움이 아닌 쓸쓸함으로 표현된 것은
전체적인 맥락에서 무기력함과 서글픔의 기저 감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서 어휘를 꾸며주는 말들이 일반적으로 자동사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바다를 밀어 오는 쓸쓸함'은 '쓸쓸함' 하나의 뜻만 풀이해서는 이해되지 않는 이질성이 있다.
대구를 이루고 있는 시행 간의 관계에서 ('건너간' : '밀어 오는', '친구한테' : '(쓸쓸함에)', '편지' : '쓸쓸함')
편지와 '쓸쓸함'의 대칭성은 소통의 시도이자 관계의 형성을 뜻하는 전자에 대해
후자가 그것의 실패를 보여주도록 하는 효과를 갖는다.
이 경우 '편지를 쓰'는 것에 담긴 정서는 '쓸쓸함'과는 대비적인 것이 될 것이며,
'바다를 밀어 오는'과 '밀리고 밀리다가'는 바다의 너울조차 넘지 못하는 편지, 즉 보내지도 못한 편지가 돌아오는
소통의 실패를 무기력한 감정에 실어 표현한 것이 될 것이다.
○ 비유 표현의 선택은 의도한 심상(원관념)에 대한 상상의 폭과 깊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나는 가네, 서울을 나간 사촌은 / 고향 근처에서 벽돌을 찍는다더니 / 오늘은 무슨 벽돌을 찍고 있을까 ……
구두쇠 박씨는 / 지금도 문패 대신 맹견주의표를 붙이고 있을까"
→ '벽돌을 찍는다'는 궁핍함과 숙명을 '맹견주의표를 붙이고 있을까'는 부유함과 이기적 욕망을
가리키는 대유 표현이다.
의도된 심상이 이런 것이라면, 그 해석은 모두가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겠으나,
이 연이 전체적으로 회상에 기반한 상상을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의도된 심상이란 고향 사람들의 현재의 삶을 말하는 것이 된다. 이 경우,
옛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상상적 관찰은 편지 쓰기의 대리물이라 할 수 있다.
○ 비유 표현의 선택으로 시어들간의 의미 균열이 커질수록 새로운 의미가 형성될 가능성이 커지며
그 대신 선택된 비유 표현 외의 표현들에 새로운 해석이 강제된다.
"시인 한잔 마음 한잔 / 신문지를 깔고 잠든 마른 멸치도 한잔 / 셋이서 구겨진 몸들을 펼쳐 놓고"
→ 이 장면은 신문지 깔고 쭈그려 앉아 소주를 마시는 모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구겨진 몸'은 '마른 멸치'와 형태적 유사성을 비유 표현에 담은 것이라 하겠지만,
외려 '구겨진 신문'에서나 어울리는 '구겨진'의 표현이 '멸치'와 '시인'과 나아가 '마음'에게로 연장되는 것은
형태적 유사성 때문이 아니라 부분적인 형태적 유사성이 핑계를 대고 실제로는
셋 사이의 동질성, 즉 은유적 관계를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구겨진 몸'으로서 (행동의 주체인) 시인은 궁핍한 생활인을,
역시 구겨진 몸으로서 (내적 체험의 주체인) 마음은 위축되어 있는 내면적 자세를
각기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시인과 마음의 분리는 윤동주의 '또 다른 고향'에서 보이던 '백골'과 '아름다운 혼'의 역할로 이해하면
되겠다.
○ 선택된 비유 표현에 대해 함축에 대한 능동적인 해석이 이루어지고 나면
이를 해석적 맥락으로 안정화하기 위해 또 다른 비유 표현의 선택이 요구될 수 있다.
이 경우 재차 맥락 치환이 일어난다.
"자거라 자거라"
→ 우리는 시의 끄트머리에 와 있는 이 시행이 결국 술 먹고 자는 얘기가 되고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여기서 '자거라 자거라'는 쓸쓸함과 서글픔과 고달픔의 하루를 위무해 주는 자장가 소리가 '난다'
느닷없이 자장가 소리가 들리므로, 우리는 이 진술이 말하지 않은 부분들을 살펴야 한다.
이를테면 이 말은 누가 하는 것인가?
이 말을 듣는 사람은 누구인가?
여기에는 시인과 마음과 멸치, 셋이 등장하므로 셋이 말하고 셋이 들었다고 하자.
(다른 해석의 단서가 없을 때에는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마른 멸치도 같이 한 잔 하는 사이이므로
시인과 마음뿐 아니라 이것 역시 삶이 메마르고 쥐어짜여진 보잘 것 없는 작은 존재,
그러니까 최승호의 '북어(北魚)'에서 '북어'와 결은 좀 다르지만 결국 같은 본질의 인간상이라 하겠는데,
따라서 마른 멸치는 시인과 마음의 현신이요, 복수형인 것이다.
그리고 이 셋은 성부, 성자, 성신의 성삼위일체의 대응격인 범삼위일체라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장가는 무엇인가?
자장가가 잠들기를 두려워하는 아기의 공포를 위무해 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기대어
이 시행들을 다시 읽어 보면, 잠은 구겨진 몸이 펼쳐지는 시간 속의 상태이고 이런 점에서는
위로뿐 아니라 치유를 받는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이 치유는 마음이 혼자서 이런저런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자신의 사회적 존재인 시인 자리잡고 있는 작은 집에 왔을 때 결과적으로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집들에서 나와 시인의 집으로 들어간다.)
마른 멸치를 현신이자 복수형이라고 앞서 말한 바 있다.
시인과 마음에 별반 다를 바 없는, 조금 전까지 별 볼 일 없는 안주에 불과했는데
갑자기 더불어 소주를 나누어 마시는 사이가 된 보잘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
이들의 메마르고 쥐어짜여진 생활을 치유하는 위로의 노래
이것이 자장가이고, 이 자장가는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 우는 소리'를 재울 정도의
깊은 공명을 가지고 있다.
전의에 대한 동시공감
비유는 일종의 동시공감, 이심전심의 시스템에 기반하여 소통된다. 이 말은 비유는 직접적으로 그 비유적 대상인 관념(심상)에 대응하는 표상으로서 표상하는 것의 일차적 의미를 나타낼 뿐 그 이상의 의미, 말하자면 상징, 혹은 맥락에 따른 함축 등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 이상의 의미는 독자나 청자가 비유로부터 이차적으로 연상해 낸 것이 된다는 뜻이다. 또한 동시에 그 이상의 의미는 작자나 화자가 의도한 것일 수 있어서 결국 비유를 통해 확장되는 대상의 삼차적 의미나 사차적 의미 같은 것들은 화자와 청자, 작자와 독자 사이에 암묵적으로 열리게 되는 해석적 가능성으로 의도되거나 양해된다는 것이다.2)
(바로바로 생각하고 쓰는 중이라 모든 내용이 체계적이지는 않습니다. 나중에 보충하는 것으로 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 보려고 합니다.)
1)
'태어나다'는 '틈'과 의미상 연결고리가 없다. '태어나다'가 '틈'으로부터 연상되려면 '튼튼한 것 속에서'가 필수적이게 되는데, 이때 '속'이 '튼튼한 것'에 자궁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태어나다'를 연상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이 표현은 세 가지 점에서 생산적이다. 첫째, 표현상 '튼튼한 것'의 물리적 차원의 속성은 '단단함'인데 이를 '튼튼함'으로 바꾸어 표현함으로써 이 속성에 '건강함'의 속성을 추가한 효과가 생긴다. 이 경우 진술은 반전의 의미가 생긴다. 둘째, 결함이든 갈등이든 간에 그것은 '튼튼한 것'의 내재된 속성이 된다. 셋째, 이 '틈'이 태어난 이후로는 생명 활동을 할 것이므로 그 생명 활동의 속성인 결함이나 갈등은 점점 더 증폭될 것이다.
2)
인용한 김에 위 시행에서 '튼튼한 것'이 비유인지 생각해 보자. 아래 도해를 보면, '튼튼한 것'은 어쩌면 시인이 생각했을지 모르는 '완고한 사회 체제'를 가리키기 위해 비유를 든 '굳은 철근과 시멘트'(철근과 시멘트가 하나로 굳어진 상태)의 속성일 터인데, 비유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은 흐름이 있다.
1. '완고한 사회 체제'(target)에서 '굳은 철근과 시멘트'(source)를 떠올림.
(연상에 의한 유사성 발견)
2. '굳은 철근과 시멘트'에서 의 또 다른 속성들을 떠올림.
(속성 추출)
3. '굳은 철근과 시멘트'의 속성 일부를 '완고한 사회 체제'로 투사함.
(심층적 동일성 구성)
4. '완고한 사회 체제'의 관념을 구체화함.
(심상 구체화)
여기서 '강한 통제 기구들'이란 이를테면 법이나 윤리, 경찰 기구 같은 것들일 것이다.
3)
'틈'은 부재의 존재 증명이다. 비어 있기 때문에 채워진 의미 같은 것이다. 따라서 '틈'은 주동적인 주체가 될 수 없고 제 스스로 규정될 수도 없다. 하지만 시인은 '틈'을 '태어난다'고 표현한다. 하긴 '틈'과 연결하여 서술할 수 있는 단어들을 열거해 보니, 불가피한 사정이 있기도 하다. '틈이 생기다/발생하다/나다'. 이 서술들에는 무에서 유가 만들어지는 것 같은 비밀스러운 원리가 작동한다. '벌어지다', '만들어지다' 같은 경우도 마치 유형의 무엇이 존재하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틈'이 어떤 것 내부에서 존재하게 되는 것도, 그 범위를 넓히는 것도 모두 어떤 실재하는 존재로서 이해될 맥락이 생기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불안정성이나 공백, 균열은 그 틈을 가진 전체의 관점에서 규정된 것일뿐 '규정되지 않는, 규제되지 않는, 무엇인가를 변화시키는' 틈의 속성으로 재해석될 수 있게 된다. 틈은 벌어지려는 본성으로 태어난 것이고 한번 태어난 이상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는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전체 내용
1. 프롤로그: 비유법, 수사법, 그리고 비유 9thpoem.tistory.com/585
2. 비유의 배경과 원리
- 경험 세계와 은유적, 환유적 사고 9thpoem.tistory.com/594
- 비유 표현으로서의 전의 9thpoem.tistory.com/614
3. 하위 개념과 유사 개념
- 하위 개념인 은유와 유사 개념인 아날로지
- 하위 개념인 환유와 유사 개념인 알레고리
4. 전의의 수사적 전략
- 동일화와 속성 투사 : 은유법과 직유법
- 조응과 속성 환원 : 활유법과 의인법
- 연상과 일반화 : 환유법과 제유법
- 암시와 돌려말하기 : 우의법과 풍유법
5. 경계에 있는 비유법들
- 의성법과 의태법 : 모사의 비유와 상징
- 인유 : 텍스트들의 생태계 간의 비유적 관계
* 그림 설명
이 글에 덧붙인 그림은 Star Trek 오리지널 시리즈 두 번째 시즌의 에피소드 18 'The Immunity Syndrome(면역증후군)' 의 한 장면이다. 간단히 이 에피소드를 축약하면, Kirk 함장이 이끄는 U.S.S. Enterprize호는 이상한 암흑 지대(Kirk: 'It likes a hole in space.')를 발견하고 탐사선을 보내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탐사선의 대원들이 죽음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Dr. McCoy가 이것이 우주의 기계적, 생물학적 에너지를 흡수하는 매우 단순한 단세포 유기체 같은 것임을 알아내자 Kirk 함장은 Spock와 Scotty를 각각 셔틀에 태워 보내 이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내려 한다. Spock는 이 생명체가 번식을 앞두고 있고 만약 번식이 시작되면 이 생명체가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은하계 전체가 위험에 빠질 것임을 보고한다. Spock와 Scotty가 죽을 위험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Kirk와 McCoy는 앤터프라이즈호를 '항체'로 사용하여 이 생명체를 파괴하기로 결심을 한다. 자살 공격 같은 무모해 보이는 이 작전을 앞두고 .......
그 유명한 'Dr. McCoy's Nod'짤이 여기서 나왔다. 죽을 위기에서 자신을 구하러 오지 말라고 말하는 Spock의 연락에 McCoy는
'입 닥쳐, 스팍. 우리는 지금 널 구하러 가고 있는 중이야.'
그런 다음,
끄덕, 끄덕.
(실제로는 딱 이렇지는 않다.)
Star Trek (1966) - S02E18 The Immunity Syndrome(면역증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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