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다음 질문에 대한 답변 글입니다. 질문 글은 이 글이 끝나는 부분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이 표현은 역설입니까?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 내 가슴 설레느니, //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 바라노니 나의 하루하루가 / 자연의 믿음에 매어지고자 //
내 대답은 '아닙니다'입니다.
이제 그 까닭과 함께 '역설'의 인식적, 표현적 특성에 대해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이 블로그에는 역설에 관한 몇몇 글이 있습니다. 검색을 통해 함께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유튜브 콘텐츠는 아니지만, 구독도 권해 드립니다. 나의 노트북 속 조각 문서 파일들로 있던 것들을 공유하기 위해 수시로 올리고 있는 중입니다.
배경
William Wordsworth의 시 'Rainbow'를 소개하는 글에는 빠짐없이 포함되어 있는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시 구절은 아마도 시인의 시대에도 속담의 형태로 전승되고 있던 잘 알려진 경구(aphorism)였을 것입니다. 낭만주의 시인으로서 속담 인용이 시작 태도로 가당키는 한 일이냐고, 낭만주의 시라면 시인만의 경이로운 발견, 새로운 상상력, 자유로운 정신, 천재성 등이 추구되어야 하지 않겠냐고 반문해 볼 만합니다. 워즈워스는 영국의 낭만주의 운동을 이끌어냈던 시인, 그와 '서정 민요집(lyrical ballads)'를 함께 출간한 코울리지가 이론가로서 낭만주의의 환상성이나 초월성 등을 강조했던 것과 비교하면 소박하고 진실된 언어로 어머니 같은 자연과의 교호적 관계를 노래하는 서정시인적 특성을 보여준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에도 드러나는 것처럼 그는 유년 시절의 순수한 마음과 자연에 대한 동경이 인간의 본성이며 시골 사람들의 소박한 언어가 훨씬 더 순수하고 생명력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오래 된(?) 속담이 그의 시에 사용되었던 것은 그것이 새로운 발견이자 생명력을 지닌 언어의 한 표상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분석
어떤 독자라도 시를 읽을 때 1행부터 읽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지만 시의 의미가 구축되는 과정은(혹은, 표현을 달리하자면, 시를 이해하는 순서는) 1행이 그 출발점이 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시에서 시인의 발견의 시점과 작시의 출발점은 같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시인의 발견의 시점―또는 착상의 시점, 아니면 시를 쓰게 된 발단―을 찾고자 한다면, 여러분이 목격하는 시적 사건(상황)의 최근 시점, 즉 현재와 가장 가까운 과거의 경험적 사태를 찾으면 됩니다. 예컨대,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이 발견의 시점은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에 있습니다. 전체 12행의 시에서 일곱 번째 행이 이 시를 쓰게 된 발단이라는 뜻입니다.1)
'Rainbow'에서 시인이 시를 쓰게 된 발단은 어느 부분일까요? 시적 발견이 이루어진 부분, 시 전체의 출발점으로서 착상이 이루어진 곳, 거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찾은 곳은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부분입니다. 이 시의 1연은 언뜻 보기에 현재 시점과 가장 가까운 듯 보이지만, 이 진술은 발견 이전에 경험된 사실을 드러내 보이는 부분입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발화의 전제를 뜻합니다. '내 가슴 설레'는 것은 이미 일어난 일이고 반복적인 사건이며 현상적인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일이 시인에게 하나의 경험이 되는 것은 그것이 성인이 된 현재에도 동일하다는 발견입니다. 그리고 이 발견이 일어난 시점이 경험이 시로 전화하게 되는 착상의 시점이기도 합니다. 이제 이 착상으로부터 경험이 의미 있는 단위로 조직됩니다.
우리는 시에서 의미를 이루는 최소 단위가 심상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두 가지 방식으로 이 의미 있는 단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이러한 심상들이 몇 개나 있는가 헤아려 의미 요소를 상정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심상들의 관계를 따져 심상이 시상으로 확장되거나 발전하는 과정(혹은 구조)을 살펴봅니다.2) 이 방식들로 분석해 보면, '어린 시절'과 '다 자란 오늘'의 경험은 유사한 심상으로 단일 계열체를 만들고, '내 가슴 설레'는 것은 '죽음'과 대비되면서 이중 계열체를 만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 자란 오늘'에 이어지는 '쉰 예순'이 그 앞의 심상들과 단일 계열체를 확장할 수 있느냐 여부는 '하늘의 무지개'와 '내 가슴 설레'는 것이 하나로 혼융되는 경험이 '쉰 예순'에도 여전히 지속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죽음'보다 못한 상태에 놓이게 되겠지요.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는 이 혼융의 경험을 한 '나 어린 시절'로부터 발전하는 관계의 심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의 믿음'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결국 '자연의 믿음'은 '하늘의 무지개'와 '내 가슴 설레'는 것이 하나로 혼융된 것을 뜻할 것이며, 따라서 같은 듯하지만 실은 의미상 구분되며 발전한, 그리하여 전자가 현상적 사실인 것에 대해 후자가 (내적 경험에 의해 발견된) 본질적 진실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유사한 심상들은 심상의 변주로 묶여 시상을 이루고 있으며, 대비되는 심상들은 심상을 구조화하는 방식으로 시상을 이루고 있고, (앞의 심상과 달라진) 어떤 심상은 그 자체가 시상으로 통합되면서 시상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정리해 볼까요? '다 자란 오늘'을 기준으로 하면, '내 어린 시절'은 '하늘의 무지개'와 '내 가슴(의) 설레(임)'가 서로 조응하는 현상적 사실, '다 자란 오늘'은 '내 어린 시절'이 지금에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경험적 발견, 그리고 '쉰 예순'은 경험적 발견이 잇닿아 있는 본질적 진실에 각기 대응합니다. 미래에 해당하는 진술이 아직 경험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마지막 연결점은 '자연의 믿음'이 실현될 기대이고 희망을 말하는 진술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아이가 어른의 아버지'라는 발견에서 '자연의 믿음'에 대한 깨달음으로 연결되는 것이 이 시의 의미 구조인 셈입니다.
해석
역설이란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둘 이상의 개념이나 가치들이 공존하면서 이 모순이 상위의 통합된 원리에 의해 통합되어 합목적적으로 이해되는 것을 말합니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표현이 역설이기 위해서는 이 진술이 시간 패러독스(time paradox)에 놓여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내 아이는 나의 아버지' 같은 직접적인 모순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3)
그런데 이 시에서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에는 이러한 모순이 생기지 않고 있습니다. 이 구절의 풀이가 적어도 두 가지 이상 가능하기 때문에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스승의 비유 : 표면적으로 아이가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은 모순이 됩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의 모습을 보며 어른인 나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와 같은 해석을 하게 되는 경우는 어떨까요? 여기서 '아버지' 자리에 '스승'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것인데, 이렇게 넣고 읽어 보면 너무나 쉽게 모순이 풀려 버립니다. 이때 '아버지'는 양육하는 자로서 가르침을 주는 자인 곧 '스승'을 대리하는 확장된 비유로 사용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비유가 확장된다면, 만물이 인간의 스승이 될 수 있고, 따라서 확장된 비유로서 인간의 아버지가 될 수도 있게 됩니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 아이는 어른의 스승
§ 배움은 직접적인 가르침에 의해, 또는 적극적인 사사(師事)에 의해 일어날 수 있다. 후자의 경우, 가르침이 없더라도 배움이 가능하다. (여기서는 반면교사는 논외로 함.)
§ 아이의 생각과 행동을 보고 오히려 어른이 깨달음을 얻어 배움에 이르렀다면, 이 표현을 사용하는 데에는 전혀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는 그 구절만 떼어놓고 보면 스승의 비유로서 아버지라는 표현을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전혀 문제될 것 없습니다. 하지만 작품에서 같은 계열체를 구성하는 '내 어린 시절'과 '다 자란 오늘'의 관계를 고려해 본다면, 내가 어린 시절의 나를 보면서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A가 B에게 배운다는 것은, 적어도 A와 B이 서로 다른 존재로서 인지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시에서 '거울 모티프' 등을 통해 잘 드러나는 관계 구도이기도 합니다. 작품의 맥락으로 보면, 적어도 '내 어린 시절'과 '다 자란 오늘'은 동일성의 관계에 있고 남은 문제는 '쉰 예순'과의 관계일 것이므로,
원형의 비유 : '내 어린 시절'과 '다 자란 오늘'이 동일성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는 '어른인 내가 자연에서 느끼는 설레임은 내 어린 시절 순수함 속에 존재했던 자연의 믿음이 아직 마음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같은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때 '아이'는 '순수함'의 의미를 갖는 그 무엇이 됩니다. 그리고 이에 의해 '아버지'는 그것이 후대로 유전되는 '근원', 또는 '원천', '원형'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순수함은 원형으로 유지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또한 그것이 순수한 존재이기에 시간이 흐르면서 쉽게 오염되고 훼손될 수 있는 연약함을 갖습니다. 마치 '아이'가 그러한 것처럼 말이지요. 이렇게 이해한다면, 이 시가 문제 삼는 것은 '쉰 예순'이 되었을 때에도 그 순수한 원형이 남아 있는지일 것입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마음이 설레는 것, 그것은 자연과의 조응이며 합일이고 시인이 자연의 믿음이라 부른 것입니다. 이 자연과의 조응은 세계의 본질적인 가치이고 존재의 마땅한 원형이겠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이 관계에 균열이 생기면서 그 가치가 훼손되는 일이 생기는 것이지요. 낭만주의를 열었던 시인으로서 워즈워스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이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질문들
자, 이제 몇 가지 질문을 해 볼 차례입니다. 첫 번째 질문. 어떤 구절이 비유 표현이라고 할 때, 그 구절은 동시에 역설이 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비유와 역설은 진술의 성격과 그 진술 내용에 대한 인식과 그 진술의 내용에서 구분됩니다. 비유에서는 그 진술이 매우 그럴 듯하고 그 근본에서는 진실에 근거하고 있다고 인지하고 있으며 그래서 결국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믿음을 말한다는 특징을 지닙니다. 이 진술에는 새로운 발견이 자리잡고 있지만, 발견은 발화 이전에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역설에서는 그 진술이 불가능을 말하고 있고 그 불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가능한 사태가 실현되고 있다는 발견, 따라서 그 진술이 결국 진실이라고 하는 발견을 말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새로운 발견은 발화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 비유는 독자나 청자에게 발견의 몫이 있지만, 역설은 작자나 화자에게 더 큰 발견의 몫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비유라면, 그것은 '아이'에게서 '아버지'의 속성이 발견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진술하고서 '아이'와 '아버지'가 서로 모순된다고 말하면, 그 말이 오히려 모순이 됩니다. '아이'와 '아버지'가 동일성을 갖는 것은 의미의 심층에서이고 이 층위에서 '아이'와 '아버지'는 모순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유이거나 역설일 수는 있지만, 비유이면서 역설일 수는 없습니다.
두 번째 질문.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하고 있듯이 구절을 따로 떼어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인가요? 다들 그러지 않습니까? 인터넷에서 이 구절을 검색해 보면, 시 전체를 보여주는 경우는 별로 없고 대부분 경구처럼 인용하여 그 뜻을 풀이하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이 시의 일부분으로 존재하는 것과 별개로 이미 속담으로 전승되어 오고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속담으로서 사용된다면, 앞서 우리가 비유의 하나로서 언급한 '스승' 같은 의미로 이해되겠지요. 여전히 역설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게다가 '스승'이라는 비유로서 사용되는 맥락에서조차도 역설이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앞서 밝힌 바와 같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설은 일종의 인식 체계, 혹은 체계화된 인식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드립니다. 비유는 맥락에 의해 비유 체계가 만들어집니다. 어떤 비유가 형성될 때, 비유의 원관념(target)은 보조관념(source)로부터 투사된 속성 하나만을 갖습니다. 그 속성으로 원관념이 존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그대 모습은 장미'(네, 민혜경의 노래 제목 그대로입니다.)는 맥락 없이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때 '장미'의 속성 중 하나가 '그대 모습'으로 투사됩니다. 이러한 투사는 한 번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여러 번(병렬적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들은 동시적으로 실행될 수 있고, 어떤 것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장미'의 속성이 아름다움(형상), 자기방어(가시), 화려함(색감), 정열(색감), 금지된 대상(생태) 등과 같다고 한다면, 아름다움과 정열, 자기방어와 금지된 대상 같은 속성들은 함께 실현될 수 있고, 그 외의 조합도 가능하지만, 화려함과 자기방어는 대개 함께 실현되지 않는데, 이는 서로 다른 맥락에서 이 속성들이 활성화되기 때문입니다.4) 따라서 만약 비유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려면 체계화된 맥락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와 달리 맥락이 제한적이거나 혹은 맥락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로 비유가 제시된다면 투사된 속성은 제한적이거나 (어떤 맥락을 연결짓느냐에 따라) 선택적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상징의 경우는 그 자체가 체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상징을 위해 별도의 맥락이 주어질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맥락이 없이도 (정확히 말해서는 이미 상징 안에 맥락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상징은 스스로 맥락을 만들고 그 내적 맥락의 연관을 통해 상징 체계를 구축합니다. 가장 빈번한 예로 언급되는 '별'을 놓고 생각해 볼까요? '별'이 상징이 될 때에는 '별'과 '지상', '별'과 '밤', '별'과 '나', '별'과 '하늘' 등의 상징 구도가 생성됩니다. 이것은 이상과 현실, 희망과 절망, 꿈과 꿈꾸는자(혹은 영원성과 구도자), 가장 빛나는 가치와 가치의 체계 등과 같은 의미망을 구축하며, 이에 따라 이 구도에 드러나지 않았던 '천상'과 지상', '낮'과 '밤', '별'과 '별들', 혹은 '나'와 '우리' 같은 의미 관계들이 활성화됩니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 등장하는 별들이 신석정의 '들길에 서서'의 '푸른 별'과 같은 대상은 아니지만,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이 별들이 그냥 물리적 세계의 별이 아니라, 보조 관념으로서 비유적 대상인 별이 아니라, 화자에게는 모두 어느 정도 이상화된 대상(속에 존재하는 요소들), 곧 상징이라는 점은 신석정의 시에서나 그밖의 별이 등장하는 많은 시들에서 공통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보면, '별'은 서로 다른 시대와 서로 다른 세계에서 서로 다른 시들을 통해 모습을 보이게 된 경우라 하더라도 작품과 작품을 건너뛰어 내밀한 연결점을 가진 동일성의 존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 번째 질문. 그렇다면 복수의 요소들 사이에 모순이 있고 그 모순에도 불구하고 그 요소들이 공존하고 있다면 역설이 되는 걸까요?
이 질문은 혼동될 만합니다. 모순을 이루는 요소들이 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은 모순의 비활성화된 부분이 진실이 되는 아이러니(반어)와는 구분되는 것이니, 역설이라고 할 만도 하지요. 그러나 모든 경우에 이러한 공존이 역설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우선 단지 형용모순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모순의 공존은 있을 수 없는데 있는 것을 가리키지만, 이때 '있다'는 것은 담화적 차원의 규정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기쁘고 또한 슬프다'. 이 진술은 반드시 역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네모 난 동그라미'와 같이 실재할 수는 없지만 발화될 수는 있는 진술이기 때문입니다. 역설이 되기 위해서는 이 모순의 상황에서 가치의 초월이 일어나야 합니다. 가치의 초월을 통해 상위 범주에서 이 모순을 통합하는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져야 비로소 역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수사적 기술로서의 역설법―형용모순―과 인식의 방법으로서의 역설을 구분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역설이 가져오는 새로운 발견은 발견의 차원을 한 층위 높이는 것이며, 기존의 인식 층위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새로운 인식 층위에서 저절로 보이게 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만약 그러한 사태가 보이지 않는다면 해당 시는 기대나 소망을 노래하는 진술일 것이고, 이때에는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같은 시에서처럼 반복과 변주에 의해 병렬적으로 진행되는 구조를 취하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대개 적은 갯수의 시행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입니다.
2)
이러한 심상들에는 유사한 것이 있고 대비되는 것이 있으며 다른 것이 있습니다. 유사한 것과 대비되는 것은 계열체(단일 계열체, 이중 계열체)를 구성하면서 병렬 전개를 하겠지만, 다른 것은 발전해야만 의미 있게 통합될 수 있습니다.
3)
내 아이는 내가 낳음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내 아이가 낳음으로써 존재하게 된다.... 시간이 순환적이라면 몰라도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라면 이것은 '부친 살해 패러독스'가 되는 것이지요. 이 부친 살해 패러독스가 시간 패러독스입니다.
4)
이 속성들을 꽃말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질투,우정,청순 등과 같은 꽃말은 해석의 영역, 그것도 어떤 맥락에서 의미를 갖게 된 원관념의 속성과 관련이 됩니다.
(2021.03.22) 시작
(2021.03.26) 끝
아래 글은 이 글보다 일주일 앞서 질문 형식으로 써서 올린 글입니다.
표현에 관한 질문입니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이 표현은 역설입니까?
여러분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드리기 위해 일주일 후에 이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립니다.
혹시 의견이 있으시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2021.03.15)
단서
접근 방법의 하나로 용례 확인하기가 있습니다. 각 예에서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의 의미를 새겨 보기 바랍니다. 그런 다음, 역설의 논리에 이 진술의 맥락이 부합하는지 평가해 봅시다.
많은 육아 소재 영화들에는 ‘어른아이’가 등장한다. “아이를 키움으로서 철없던 어른이 오히려 성장한다”는 식. 대표적으로는 일본 영화 <버니드롭>, 차태현 주연의 <과속스캔들>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들보다 더욱 어른아이에 집중한 영화가 있다.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인 독립영화 <아기와 나>. 제목만 보면 장근석 주연의 동명 영화가 떠오르지만, <아기와 나>(2017)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여타의 영화들과의 가장 큰 차이는 아이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영화는 군대를 전역하고, 이제 겨우 20대 중반에 접어든 도일(이이경)의 심리에 오롯이 초점을 맞췄다. 친자의 의심, 여자친구(정연주)의 실종, 어머니의 건강 악화 등 ‘막장’스러운 소재까지 등장하지만, 이는 모두 도일의 답답한 마음을 위한 장치들일 뿐. <아기와 나>는 누구에게나 한 번쯤 찾아오는 감당하기 힘든 시간을 겪는 애어른의 성장을 담담히 그렸다.
(김진우 기자, '부모가 된다는 것’ 각양각색의 육아 소재 영화들', 시네21, 2018.11.28)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내 가슴 설레느니, A rainbow in the sky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So is it now I am a man ;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Or let me die !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
바라노니 나의 하루하루가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자연의 믿음에 매어지고자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William Wordsworth, 'Rainbow')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시인의 감수성을 지닌다.
나이가 들면서, 계산, 경쟁, 소유, 탐욕의 유혹을 거부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질주하는 동안에 그 감수성을 잃어버리거나 무디어지게 된다.
시인의 눈에는 어른들의 부질없음으로 보이고, 철모르는 어리석음으로 보인다.
그래서 아이가 어른의 아버지이다.
(신유길,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왜?' https://www.youtube.com/watch?v=H0FrgSliJ4k )
그림 설명
글에 덧붙어 있는 사진은 독립영화 '아기와 나'(감독 : 손태겸)의 한 장면입니다. 도일(이이경)은 군 전역을 앞둔 말년 휴가 중 여자 친구에게 아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아직 사회에 나갈 제대로 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녀와 결혼을 결심하게 되지요.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그와 아기를 남겨두고 사라져 버립니다. 게다가 학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다니던 헬스 클럽의 일자리를 잃게 되고, 설상가상 아기를 데리고 병원을 갔다가 자신이 아기의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아기에 대한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친구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도일은 아기를 기르겠다는 의외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절박하게 사라진 여자친구를 찾으며 동시에 아이를 기르는 과정에서 서서히 아버지가 되어 가는 도일의 모습이 그려지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 대해 언급할 때 아이를 통해 어른이 성장해 간다는 모티프를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와 연결시키곤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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