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 비유법, 수사법, 그리고 비유
학교 현장에서 곧잘 인용되는 수사법(또는 수사학)의 분류 체계에 따르면, 수사법은 비유법, 강조법, 변화법을 하위 범주로 가진다. (수사법을 다룬 어떤 일본 서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는데 사실 출처도 명확하지 않고 어떤 논리와 근거에서 이러한 분류 체계를 취했는지 역시 밝혀져 있지 않다고 한다.)
수사법으로 통칭되는 것들은 대부분 이 용어의 영어 표현인 figure of speech가 나타내는 것처럼 전언의 형태와 연관된 특징적인 표현 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강조법이니 변화법이니 부르는 것들은 일반적인 어순을 의도적으로 일탈함으로써 문자적 의미가 드러내지 못하는 새로운(이 경우 참신한, 초점화된, 낯설게 보이게 하는) 의미나 뉘앙스를 갖게 한다. 따라서 대개 수사적 전략의 일환으로 사용되는 표현 기법으로도 설명되고 있다. (→ rhetoric)
하지만 비유법의 경우는 '다르게 인식하였기에 다르게 표현된' 배경과 맥락을 가지고 있어서 단순히 수사적 전략이나 기법으로 보기 어려운 특징이 있다. 고전 수사학이 수사법을 scheme(패턴 변환)과 trope(전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비슷한 맥락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비유법을 말하면서 수사법 또는 수사학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 것은, 이것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인지 과정을 경과하며 어떤 효과를 발하는지를 연속적으로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호수>에는 은유법이 쓰였다'는 설명에는 죽은 지식과 확장되지 않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내 마음의 상태를 참신하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그려내기 위해 다른 대상의 속성 일부를 가져와 기존 대상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은유법을 사용하여 <내 마음은 호수>라는 표현을 만들어 냈다'는 설명은 이보다는 조금 낫지만 여전히 지식의 기능과 작용과 그 효과는 이전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하겠는데, 같은 방식의 설명이라 하더라도 앞서 언급한 이른바 '강조법'이나 '변화법' 등에 대해서는 다른 평가가 가능한 것과 비교해 보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어머니의 은혜가 크고 숭고함으로 강조하기 위해 비교가 되는 대상들의 병렬적 진행을 사용하는 대구법과 같은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의미를 강화하는 반복법을 사용하여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라는 표현을 만들어 냈다.
이 예문에서는 목적에 따른 수사적 기법의 기능과 작용과 그 효과가 명확하고, 따라서 대구법이나 반복법이라는 지식의 사용이 지식의 기능과 인식의 작용과 교육의 효과로 연동됨을 보게 된다. 그런데 앞의 은유법의 설명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 까닭은 비유법이 수사적 기법만으로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A를 B로 비유'하기 위해서는 이미 인식 차원에서 A와 B 간의 긴밀한 상응성이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비유법에서는 지식 이전에 먼저 인식이 작용해야 하며, 이런 까닭에 지식은 인식으로부터 만들어질 요구를 받게 된다.
이를 반영하여 이하에서는 수사학적 용어로서의 비유법 대신 '비유'로 표시할 것이다. 아울러 은유법이나 그밖의 비유의 하위 개념들과 유사 개념들에 대해서도 기술의 초점에 따라 용어를 달리할 것인데, 예컨대 은유법은 다루는 내용에 따라 '은유'로, 아니면 '은유법'으로 표시할 것이다.
이제 비유의 지식(따라서 당연히 그 하위 개념들)은 대구법이나 반복법의 지식과 다른 특징을 갖게 됨을 알 수 있다. 비유의 지식은 설명력을 갖는 데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호기심을 일으키도록 요구 받는다. (교육적 지식도 이러한 속성을 갖는다.) 이 호기심은 ''내 마음'이 왜 하필 '호수'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를 거쳐 ''나'와 '호수'는 어떤 관계인가?'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계속 이 질문을 이어가게 된다면, 결국 도달하게 되는 것은 은유적 사고가 바라보는 세계, 또는 우주의 모습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모방적인 이 세계(우주)는 (비록 은유적 사고에서는 도달할 수 없겠지만, 혹은 도달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지만) 우리가 비록 산골의 작은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가는 경우에조차 우리가 살고 있는 그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갖게 하는 원리가 된다. 은유는 그 원리의 실증적 표상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가능성으로서의 진술인 것이고, 은유나 은유법에 대한 모든 설명이 언제나 이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유로 통상 묶이는 하위 개념들이 그곳으로 가는 비밀스러운 통로를 원천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전체 내용
1. 프롤로그: 비유법, 수사법, 그리고 비유 9thpoem.tistory.com/585
2. 비유의 배경과 원리
- 경험 세계와 은유적, 환유적 사고 9thpoem.tistory.com/594
- 비유 표현으로서의 전의 9thpoem.tistory.com/614
3. 하위 개념과 유사 개념
- 하위 개념인 은유와 유사 개념인 아날로지
- 하위 개념인 환유와 유사 개념인 알레고리
4. 전의의 수사적 전략
- 동일화와 속성 투사 : 은유법과 직유법
- 조응과 속성 환원 : 활유법과 의인법
- 연상과 일반화 : 환유법과 제유법
- 암시와 돌려말하기 : 우의법과 풍유법
5. 경계에 있는 비유법들
- 의성법과 의태법 : 모사의 비유와 상징
- 인유 : 텍스트들의 생태계 간의 비유적 관계
※ 신체 비유, 탈신체 비유 같은 비유의 특수 주제들도 다루고 싶은데, 어디에 넣어야 할까.....
- ※ 이 글의 배경 그림으로 쓰기 위해 가져온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 Ghost in the Shell'(1995)의 한 장면. '생명의 나무'로도 불리는 계통수(phylogenetic tree)는 진화의 계통과 과정을 나무에 비유하고 있다. 이 나무의 정점에는 라틴어로 인간을 뜻하는 'hominis'가 적혀 있지만 나머지는 어류의 명칭들이다. 라틴어의 뜻은 구글 번역으로 확인한 것이니, 정말로 '인간'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확신하지는 못한다.(유전적 계통이든 진화의 계통이든 이상해 보이는 건 당연하니까....) 다만 어떤 생물의 계통이든 간에 그 진화의 정점에 인간이 있다는 의미로 넣은 듯하다. 이 그림의 원 출처는 찾을 수 없었는데, 19세기 독일의 저명한 진화론적 생물학자이자 박물학자, 의사, 화가, 교수 등등이었던 에른스트 헤켈의 유기체의 계통도를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헤켈의 계통도는 몇 가지 형태로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역시 수형도로 그려져 있다. 나무는 단일 유기체이면서 그 가지와 잎사귀들의 형상을 통해 수많은 유기체들을 포괄하고 있는 통합 유기체처럼 이해되기도 한다. 이것은 진화론적인 설명에도 적합하지만 모든 것은 단일한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다는 '공각기동대'의 세계관에도 적합한 비유이기도 하다. (불과 5초 남짓하게 등장하지만) 아래의 장면이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아마도 이 장면에 주제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쿠사나기가 언덕 아래의 도시 야경을 보는 모습이 나오는데, 도시의 불빛들이 마치 방사형 웹처럼 연결되면서 이 도서관 계통수 장면과 오버랩됨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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