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동산 청솔잎을 빗질해주던 바람이
무어라 무어라 하는 솔나무의 속삭임을 듣고
푸른 햇살 요동치는 강변으로 달려갔다 하자.
달려가선, 거기 미루나무에게 전하니
알았다 알았다는 듯 나무는 잎새를 흔들어
강물 위에 짤랑짤랑 구슬알을 쏟아냈다 하자.
그 의중 알아챈 바람이 이젠 그 누구보단
앞들 보리밭에서 물결치듯 김을 매다
이마의 구슬땀 씻어올리는 여인에게 전하니,
여인이야 이윽고 아픈 허리를 곧게 펴곤
눈앞 가득 일어서는 마을의 정자나무를 향해
고개를 끄덕끄덕, 무언가 일별을 보냈다 하자.
아무려면 어떤가, 산과 강과 들과 마을이
한 초록으로 짙어가는 오월도 청청한 날에,
소쩍새는 또 바람결에 제 한 목청 다 싣는 날에.
1.
○ '전언'. 전하는 말. 발신자의 메시지가 수신자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이를 전달할 전언자가 개입한다는 말. 하지만 전언자의 역할은 의견을 보태거나 해석을 하는 게 아닌, 말 그대로 발신자의 말을 그대로 전하는 말. 그러기 위해 전언자는 발신자의 메시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또 정확히 표현해야 한다는 의무, 그리고 그럴 수 있다는 권능.
○ '~라고 하자', 또는 '~라고 치자'. 가정이나 전제의 기능을 갖는 동사구. 하지만 가정보다는 전제로서의 성격이 좀 더 강하고, 그렇더라도 '전제라는 조건을 두는' 단호함보다는 '조건이라는 전제를 포기하는' 유연성이 좀 더 강한 의미론적 피동의 진술. 말하자면, 네 말이 옳다고 하자면서 이를 통해 상대방과의 대화를 유지하거나 혹은 상대방을 논리의 구조 안에 묶어두려고 하는 패시브의 결계.
○ '아무려면 어떤가'. 무엇인가 남아 있다는 속내. 그것은 싸우지 않아도 자기 것이라는 평정심. 그 '아무'를 뛰어넘는 초월의 논리가 있다는 선언, 혹은 그 '아무'의 논리든, 혹은 그걸 뛰어넘는 초월의 논리든 결국 하나로 귀결되는 것 아니냐는 깨달음. 그리고 이런 말의 대잔치보다 중요한 건, 물러나 삶의 진면을 여유 있게, 너그럽게, 겸허하게 바라보는 것이라는 자세.'
2.
대개 시는 은유의 세계를 갖는다. 그것이 시인의 언어화하지 않은 생각들을 대신하여 언어의 옷을 입는다. 드물긴 하지만 단 하나의 은유적 관념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도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은유들은 연대하여 시적 발화를 이룬다. 은유가 확장되면 사물들 하나하나가 은유적 대상물들을 갖게 되는 은유의 체계, 은유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그것은 대은유의 세계이다.
이 작품은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여기 등장하는 소나무, 바람, 미루나무, 여인, 정자나무 같은 것들은 무엇의 은유가 아니다. 그것들은 그것들이고 그것들이 속한 하나의 세계로 통하는 길이고 그 세계가 당신에게 열리는 문이다. 은유의 체계 없이 시는 환유적 연쇄들로 채워져 있다. 이것은 흔하지 않은 예이다. (은유적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전언의 형식에 관한 것들 사이에서 형성된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심지어 이 환유는 서로 얽히지 않은 다발로 확산한다. 마치 날줄로 엮는 실 없이도 직조가 가능한 것인 양, 직진한다. 한 가닥을 잡아 따라가 보면, 이렇다.
솔나무가 속삭였다. 그 소리를 바람이 들었다. 바람이 강변으로 달려가 미루나무에게 전했다. 미루나무가 잘 들었다 하며 잎새를 흔들고 강물 위로 구슬알을 쏟아냈다.
다른 한 가닥은 이렇다.1)
솔나무가 속삭였다. 그 소리를 바람이 들었다. 바람이 보리밭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여인에게 전했다. 여인이 잘 들었다 하며 고개를 끄덕여 마을의 정자나무를 향해 일별을 보냈다.
이 확산되는 씨줄의 다발은, 지루하지만 않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반복될 것이다. 왜? 저 땅에 붙박힌 발신자 '솔나무'는 자신의 말을 전해 줄 전언자 '바람'을 가지고 있고 시간의 흐름은 그의 주도권 아래 있기 때문이다. 솔나무는 크게 말할 필요도 없다. 속삭여도 바람이 다가와 듣는다. 반복해 말할 필요도 없고 못 미더워 확인할 필요도 없다. 바람은 충직하기에 감응하여 '초록 바람'이 되어 말을 전하기 위해 달려간다. 일단 이렇게 전언이 시작되면 사방팔방으로 솔나무의 말은 전달될 것이다.
또한 이 확산되는 씨줄의 다발은, 다 말하지 않은 채로 남겨져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듣고자 한다면, 우리는 더 많은 다발로 펼쳐질 새로운 전언의 경로를 만나게 될 것이다. 바람의 말을 들은 미루나무는 '강물 위로 구슬알을 쏟아'낸다. 그것은 잎새를 흔드는 것과 같은 공명의 반응이다. 이번에는 미루나무가 전언자가 되고 이어 강물이 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람의 말을 전해 들은 여인은 고개를 끄덕여 정자나무에 일별을 보낸다. 그녀도 전언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그 후에 정자나무도 그리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소문의 확산과도 비슷한 구조를 지녔다. 소문은 누가 그랬는지도 알 사이 없이 순식간에 세상에 퍼지고 천지사방은 소문으로 가득 차게 된다. 솔나무의 속삭임, 곧 초록 바람의 전언도 그렇게 세상을 물들인다.2)
3.
산문도 아닌 것이 이렇게 환유적인 연쇄의 의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 시적 담화로서 긴장성을 유지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시가 가지는 리듬은, 혹은 시적 세계의 생동감은 이러한 시상의 흐름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일까? 형태상 반복과 변주에서 리듬의 요소가 발견된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이 리듬의 효과를 상쇄하는 방향으로 사물들의 환유적 연상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통합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이 든다면 이 작품이 우리로 하여금 전언의 내용에서 전언의 형식으로 시선을 돌리도록 만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작품에서 전언의 내용은 우리 모두가 알 수밖에 없고 너무나 당연하여 왜 그러한지 따지지도 않는 대상이 되고 있지만, 전언의 형식은 꽤나 흥미롭고 그래서 자연스레 묻게 하기 있기 때문이다.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말하기 방식3)은 다음 도해와 같다.
○ 전체 시적 발화를 주도하는 화자는 위 도해에서 '화자 B'로 표시된다. 이 화자는 선행한, 하지만 시에는 드러나지 않은 주장, 혹은 물음4)에 대한 응답을 통해 작품 상황에서 이루어졌을 대화 전체를 상상하게 하고 있다. "~라고 하자"라는 진술은 화자가 방금 전 청자로서 들었던 또 다른 화자 X의 발화에 대한 반응이다. 그런데 이 맥락이라면 화자 B의 응답을 듣게 될 청자는 화자 X여야 할 것이나 시적 발화 전체를 두고 보면 독자 또한 청자로서 그의 말을 듣게 되어 있어서 이른바 엿들은 청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 전체 시적 발화를 주도하는 화자 B가 말하는 내용에는 그가 목격한 장면에서 진행된 담화 상황에서의 화자 A의 발화가 포함되어 있다. 이 담화 상황에서 화자 A인 '솔나무'는 청자인 '바람'에게 어떤 말을 전하며 '바람'은 이번에는 전언자로서 화자가 되어 '미루나무'에게 전파한다. 그리고 이는 연쇄적으로 마치 파문이 이는 것처럼 확산된다. 화자는 이 전언의 과정을 엿들은 청자로서 그들 사이의 연쇄적 대화가 공간적으로 확산되며 전체 공간을 가득 채운 사태를 목격한다. 하지만 화자 B는 그들 사이에 전파되는 전언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는 듯한 태도(gesture)를 보인다. 내용에 관해 기껏 언급된 것이라고는 '무어라 무어라' 하나뿐이다.
○ 화자 B가 목격한 화자 A와 그 전언자들의 발화에는 말하기의 여러 형태들이 등장한다. '속삭임'이 있고 '전하는 말하기'가 있다. 그리고 말을 대신하여 태도와 동작으로(즉, 고갯짓으로) 일별을 보내는 것도 있다. 이 작품에서 화자 A와 관련된 사태들이 일련의 환유적 관계를 갖고 있다고 하였으나, 같은 계열체로 자리 잡은 가장 두드러진 은유적 관계도 여기에 자리잡고 있다. 잎새를 흔드는 것, 구슬알을 쏟아내는 것 같은 바람에 호응하는 것들이 또한 전언의 형태가 된다.5)
○ 반복적인 것은 '솔나무'로부터 '바람'으로, 거기서 '미루나무'로, 그리고 '강물'로, 그 다음의 이름 남기지 않은 무수한 대상들로 옮겨가며 이루어지는 청자와 화자의 교체, 반복적인 화자들의 등장, 그리고 역시 반복되고 있을 전언의 내용들에 있기도 하겠지만, 그들의 말을 엿들은 청자/화자가 독자인 우리를 새로운 청자 삼아 전해 주는 목격담에도 존재한다.6)
4.
'(무엇을 했다)고 하자'라는 표현은 대개는 상대방이 주장하고 내가 반박하는 가운데 내 편에서 한 수 물러서 상대방에게 유리한 판을 펼쳐놓으며 대화를 유지하려 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상대방의 의견을 일부 수용하더라도 내게는 그보다 더 강력한, 혹은 그 변화된 상황을 여전히 통제할 수 있는 더 상위의 논리가 있다는 자신감이 반영된 것이 이 표현이다.
'아무려면 어떤가', 이 말은 '(그렇게 했다)고 하자' 하고 응답한 끝에 내어놓은 판단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렇게 했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근본(원칙, 전제, 핵심, 본심, 의도 ……)은 (그렇게 했다는 사실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같은 유보적 조건과 원칙론적 입장이 뒤따르는 것이 자연스럽고 논리적이다. 그러니 '아무려면 어떤가'는 세 번이나 반복한 '(그렇게 했다)고 하자' 뒤에 오기에는 뜬금없고 합당하게 여겨지지도 않는다.
다만 이 시적 발화의 세계가 이미 대은유의 상상적 공간인 바에야 불가능한 논리도 없을 것이므로, 이미 벌어진 이 발화의 '빈자리'를 채워 보기로 하자. 이 발화 자체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나올 법한 말이다.
여기 동네 애들끼리 싸우고 있다. 티격태격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하면서 말다툼이 점차 격화된다. 그러는 중 한 의젓한 아이(또래가 아니라면 동네 형이라도 괜찮소)가 '그게 뭐가 중요해? 날도 좋은데. 멱이나 감으러 가자.' 이렇게 말하면, 방금 전까지 핏대 올리며 논쟁하던 아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아직은 서먹하지만) 함께 냇가든, 바닷가로 달려간다. 말하자면, 멱 감는 것에 비하면 말다툼은 잊어버려도 아무 상관 없다는 인식의 초월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또 말하자면, 이 말에는 그런 과정을 거쳐 도달하게 된 '지금 여기'의 어떤 상태가 갖고 있는 '질적 변화'에 주목하는, 그리하여 이 이전까지의 전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는 발견의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그 발견이란 것은 무엇인가? 전언의 흐름을 좇다 보니 어느샌가 '산과 강과 들과 마을이 한 초록으로 짙어가'고 있더라는 발견이다. 전언자인 '바람'에 모두 호응하여 스스로 전언자가 되기로 나선 마당에 그러다 보니 이미 세상이 초록이 되어 버렸음을 알게 된 마당에, 뭐라고 말했는지 알 필요가 있는가, 말한 대로 되고 있는지를 물을 필요가 있는가, 그리고 누구의 말인지를 묻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5.
'짧은 두 번째 연의 진술'. 두 개의 연으로 이루어진 많은 시들이 앞이 무겁고 뒤가 가벼운 형태를 취한다.7) 연들 사이의 등가성에 기초하여 가벼운 형태는 오히려 무겁다. 그래서 거기에 주제가 자리잡게 된다.
6.
<했던 말을 조금 바꾸어 반복한다>
아래 그림은 화자A가 그의 말을 전해 줄 전언자들(화자A-1, 화자A-2 ……)를 연쇄적으로 호출해 내는 과정과 이를 '엿들은 청자'8)가 독자인 청자에게 화자로서 전언하는 과정을 도해화한 것이다. 이 구도로 보면, 화자B는 이 작품의 서정적 주체의 기능이지만 그 기능이 화자A(및 그 변이들)와 같은 것으로 보아 발화의 성격은 '증언'에 해당하고 증언의 진리치는 그 발화의 원천인, 솔나무를 화자로 동원한 어떤 존재에서 기원한다. 화자A의 전언자인 '바람'이 '초록 바람'인 것은 화자A인 솔나무가 상록수로서 항상 초록빛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A가 상록수인 것은 이 '초록'이 어딘가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발현임을 뜻한다. 이는 '초록이 번져 온 천지에 퍼지게 된 것' 또한 다른 어떤 것의 환유로 보지 말라는 선언이기도 하다. 이렇게 되면 '솔나무'는 화자이면서 하나의 상징이 된다. 그리고 그 상징의 이면에 화자B이자 목소리의 주인공인 이 시의 서정적 주체가 목격한 진정한 존재가 있다.
이를테면 이 시는 그 존재의 현현 과정에 대한 증언인 것이다.
이 작품은 말에 관한 시이고, 말이 불필요한 세계에 관한 시이다. '전언'은 부산스럽게도 들려오는 듯하지만, 실은 '아무려면 어떤가' 하는 말그만두기의 자세를 달리 말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말이 필요 없는 세계에 관한 시이며, 있는 그대로로 충분할 정도의 '청청한 날'에 관한 시이다.
아, 그렇지. 말이 필요 없는 그런 세계를 본 적이 있었지. 거기도 구름이 있어도 청청하기만 한 그런 날이었어.
(중국, 매리설산)
각주
1) 2연 첫 행을 단서 삼아, 이 작품을 산, 강, 들, 마을이 순차적으로 연결되는 시상의 변화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이 경우 바람은 '솔나무'의 속삭임을 듣고, '미루나무'의 (잎새를 흔드는) 행동에 담긴 의중을 파악하고 각기 '미루나무'와 '여인'에게 전언을 한 셈이다. '솔나무'에서 시작된, 혹은 '솔나무'로부터 전언이 시작된 흐름이 '산', '강', 들', '마을' 순으로 옮겨가는 단선적인 연상 체계는 시상의 흐름을 간명하게 이해하게 돕는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시상의 출발점이 되는) '솔나무'의 경우와 달리 '미루나무'의 경우 전언자의 역할 외에 어떤 '의중'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이고, 연상의 흐름이 단선적이라고 인정하는 경우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설명하는 것도 어렵다 것이 문제이다.(이를테면 '자연에서 인간 세계로' 같은 흐름의 방향성을 설정할 개연성이 있느냐는 문제) 오히려 이보다 좀 더 큰 설명력을 갖는 것은 다음과 같은 분석이다. '바람'이 등장하는 위치는 작품 내 세 곳(1연 1행, 1연 7행, 2연 3행)이다. 세 곳에서 '바람'은 모두 같은 기능을 하는 것으로 진술되고 있다. 곧 '바람'은 누군가의 전언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있고 그 출발점은 '솔나무'이다. 다른 전언자들과 달리 '솔나무'는 상록수이고 '초록빛'을 본래부터 지닌 존재이다. (반면, 버드나무로도 알려진 미루나무와 정자나무로 주로 쓰이는 느티나무는 모두 낙엽활엽수이다.) 이런 점에서 바람이 첫 전언자로서 기능을 하게 될 출발점이 되기에 적합하다. '바람'이 알아챈 '의중'이 '솔나무'일 수도 있지만 '미루나무'일 수도 있으므로 후자의 경우 '바람'이 '미루나무'로부터 '여인'으로 전언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그 단서만큼 '이젠'의 의미도 고려해 볼 만하다. '이젠'은 '이번에는'으로 풀이되고, 그것이 가리키는 지점은 '솔나무'의 전언을 '미루나무'에게로 전하기로 한 부분이므로, '이젠'에 의해 '솔나무'의 전언을 '여인'에게 전하는 것이 맥락상 자연스럽다. 이때 '바람'이 알아챈 그 '의중'이 '미루나무'의 것이라고 해도 그 내용이 '전언자의 역할을 하겠다'는 뜻이라면 문제될 것은 없다.
2) 물론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이 작품의 전언과 소문은 구분된다. 이 작품의 전언과 다르게 소문은 우연적이며 동시에 필수적으로 발생하는 와전(訛傳)을 본질적인 요소로 갖는다. 또한 이 작품의 전언이 어느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전달되는 것과 달리 소문은 사방팔방 퍼지는 무지향적 방향성을 갖는다는 점도 구분되는 측면이라 하겠다. 해석적 맥락에서 보면, 솔나무의 속삭임은 봄 또는 생명의 기운이 움트는 시작점처럼 보이고 이것이 이내 세상에 퍼져 가는 것을 시상의 흐름 속에서 떠올리게 하는데, 봄의 확산이 겨울이 물러서는 방향을 제외하고 이루어질 것이므로 아마도 방사형으로 확산되는 심상을 갖는 것이 적절한 반응일 것으로 보인다.
3) 작품 밖에 이미 일어난 사태로서 청자가 묻거나 따지거나 의문을 표한 어떤 발화 내용에 대해 화자가 응답하는 방식. 마치 소설에서 후일담 구조를 취하는 것과 비슷한데, 사실은 누가 묻지 않았으면 말하지도 않았을 후일담이란 그에 앞서 일어난 일을 꺼내들면서 은근슬쩍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액자 형식의 서사구조에서 독자로 하여금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가를 자연스럽게(?) 궁금해 하도록 남겨진 편지, 누군가의 증언, 우연히 발견한 단서 등을 배치하여 핍진성을 만들어 놓고 정작 중요한 지금의 이야기, 곧 후일담은 그것에 기대어 옆자리에 슬쩍 가져다 놓는 방식은 전형적인 야바위...... (하지만 서사적 핍진성이라는 것이 논리적인 것은 아니지 않는가. 결국 우리 앞에는 우연한 사태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며 우리는 그것들을 의미 있게 붙잡아 두기 위해 기꺼이 서사를 만드는 데 조력한다. 말하자면 후일담 구조는 독자가 공모한 서사의 논리이다.)
4) 이 대화에서 던져진 질문의 첫 번째 자리는 아마도 '솔나무가 뭐라고 했니?'라는 물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봄'에 관한 것일 수 있다. '봄이 왔다고 전해 줘.', '이제 봄이야.' 혹은 '네가 봄의 전령이 되어 줄래?' 같은 말들이 '솔나무'로부터 듣게 된 말이었을 수 있다. 아마도 이런 말들은 화자 X도 들었을 것인데, 이는 그의 청자이면서 이 전체 시적 발화의 주도적 화자인 화자 B가 '그렇게 했다고 하자'며 일단 동조하는 태도에서 화자 X가 말했을 내용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제 화자 X가 그렇게 말했다면 화자 B의 반응을 이끌어낸 물음, 또는 의견은 '그건(화자 A-n이 말한 내용은) 화자 A-n-1이 그렇게 전하라 했기 때문이겠지?(또는 때문이야)' 같은 것일 터이고, 그 내용은 '봄'일 수도, 혹은 '봄' 대신 '희망'이든, '생명'이든, 무엇인가 긍정적 메시지가 되는 그 무엇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5) 사물들은 연상을 통해 환유적으로 연결되는데, 말하기 양상은 은유적으로 반복된다.
6)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우리가 들은 목격담을 다시 전파하는 화자로서 역할하게 될 것이며 이 또한 천지간을 가득 채울 때까지 반복될 것이다. 세상은 초록빛으로 가득 찬 봄과 그 봄을 목격한 증인들로 가득 차게 된다.
7) 두 개의 연이 비슷한 형태의 비슷한 분량을 취하여 시를 이루는 경우도 있다. 대비되는 두 사물들로부터 오는 대비적 효과, 혹은 적층 효과를 얻고자 하는 목적을 지닌 경우다. 대비적 효과는 전후 연이 전경과 후경(혹은 후경과 전경)으로 대응하기 때문에 초점이 되는 연의 심상을 부각하려는 목적에서 형태적 동등성을 의도적으로 취하기도 한다. 적층 효과는 사실 반드시 두 연의 형태나 분량이 비슷해야 할 이유를 갖지는 않지만 그렇더라도 언급 안 된 세 번째 연(이는 독자에 의해 상상적으로 구현되길 기다린다.)에 총화되는 주제를 위해 각 연의 독자성은 상대적으로 약화된다.
8) 이렇게 화자가 의도하지 않은 또 다른 청자를 가리켜 '제2의 청자'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제2의 청자'가 '의도된 청자'와 공존하는 상태를 '이중 청자'라고 한다. 서정 양식으로서 시는 그것의 유일한 실체로서 목소리를 갖는데, 이 목소리로서 존재하는 서정적 주체가 하고자 하는 말을 듣기를 원하는 청자를 대상으로 하려고 할 때 의도치 않은 또 다른 청자, 곧 '제2의 청자'의 개입을 직감하게 될 수 있다. 이 청자는 말하자면 서정적 주체와 그의 청자 사이의 대화를 엿듣는 존재가 된다. 만약 '제2의 청자'가 자신의 의도나 태도에 공감하거나 적어도 중립적으로 지켜볼 것이라고 여긴다면 서정적 주체는 그를 자신의 청자로 초대하거나 포괄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와는 달리 '제2의 청자'가 자신의 진의를 뜻대로 수용하지 않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의도한 청자를 대상으로 진행하던 대화를 중단하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잡음을 넣어 혼선을 일으키려 할 것이다. 이 모든 경우에 화자가 기능으로서 사용된다. 서정적 주체는 시적 담화 내에서 형상을 갖지 못하고 오직 목소리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목소리로만 실현되는 시적 담화가 아닌 경우(즉, 순수한 서정시로서 실현되는 경우 외에는) 그 목소리를 들리게 만들 인물이 필요하며 그것이 시 속에서 인격화된 존재로서의 화자이다. 화자는 서정적 주체의 의도나 태도를 드러내는 다중적인 방식으로서, 발화 방식과 양상을 통해, 행동을 통해, 청자와 대상을 향한 몸짓(gesture)을 통해, 발화의 의미를 조정한다. '이중 청자'의 간극이 커지면 그만큼 발화는 모호성을 키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작중의 목소리가 따로 있고 그 목소리의 담지체인 화자가 또한 따로 있는 특이한 양상을 보인다. (아마도 목소리의 주체는 '자연', 혹은 '봄'이라 할 만하겠으나) 화자는 '솔나무'이다('솔나무'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전언의 방식으로 퍼져 가는 목소리는 곧 천지에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이 작품의 목소리는 화자의 말을 엿듣는 존재인데 그러면서 독자에게도 그 들은 말을 전해 주고 있으므로 또한 화자가 된다. (이를 화자A와 화자B로 구분했다.) 이 두 화자는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목소리는 서로 공명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근거가 '아무려면 어떤가'에 담긴 태도에 잘 드러난다.(본문 참조) 그래서 비록 '엿듣는 청자'이지만 화자A(와 화자A-1, 화자A-2 ……)와 화자B의 청자로서의 기능은 동일하고, 또한 화자로서의 기능도 동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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