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이 작품은 비유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느닷없는 '이성의 차가운 / 눈을 뜨게 한다'는 주제적 진술이 붙어 버림으로써 힘이 빠져 버렸지만, 전체적으로는 비유적 진술임에도 불구하고 시적 구성을 취하는 데 긴장감이 유지된다는 점에서는 시적 성취가 성공적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니까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가 작품에는 아쉬운 지점이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에서 그릇은 절제와 균형의 중심으로 존재하며, 확장되면 세상의 모든 것이 된다. (‘무엇’은 시적 발견의 일반화를 위해 사용한 단어라고 볼 수 있다.) 이 원형적 이미지에 기초해서, 깨진 그릇은 그 질서와 완전성의 균열을 뜻하게 되는데, 이 부분이 이 시에서 발견해 낸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불완전성을 긍정적 의미로 해석해 낸 것이 이 시의 주제의식이고 동시에 이 불완전성을 불완전하기에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낸 것에서 새로움이 생겼기 때문이다.)
사금파리로 불리는 깨진 그릇은 시에서는 '빗나간 힘', '부서진 원'과 같은 계열체를 이루는데, 이것은 그릇이 깨지는 사건으로 인해 칼날, 세워진 모의 기능을 하는 존재가 된다. (아마도 내가 자의적이면서도 대범하게 이 부분을 아담과 하와가 눈을 뜰 때와 연결한다면, 윗 단락의 평가가 왜 그러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서정적 주체와의 관계가 설정될 차례인데, 시에서 '나'는 '맨발', 혹은 '살'과 같은 계열인데, 이것은 그릇이 깨지고 그래서 깨진 그릇이 칼날로 기능하게 되면서, 베어지고 상처 입는 존재로서 시에 등장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신발과 같은 수단에 의해 보호되지 않는 본래적 존재로서의 취약성, 그것이 '맨발'이고 '살'인 것이기 때문에, 이 관계는 굳이 맨발이든 살이든 깨진 그릇에 의해 찢겨졌기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고 보기보다는 원래 '맨발'이든 '살'이든 베어지고 상처 입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존재론적 지위가 생기는 것이다.
아래 도해에서 첫 번째 박스와 두 번째 박스, 그리고 세 번째 박스 간에는 연속적인 인과 관계가 있다. 그래서 첫 번째 박스의 사건은 두 번째 박스의 사건을 야기한다. 그런데 이것은 뭔가 사건의 시발점인 행위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첫 번째 박스의 '그릇'이 '깨진 그릇'이 되는 것은 어떤 다른 원인이 작동한 까닭이 아니라, 그냥 그런 것이다. 시가 '깨진 그릇은 / 칼날이 된다' 하고 처음부터 정색을 하고 시작하는 것은, '그릇'이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완벽성이라는 존재 조건은 선험적인 것일 뿐, 실제 세계는 처음부터 '깨진 그릇'이라는 선언인 것이다. 따라서 첫 번째 박스와 두 번째 박스 간의 인과 관계는 사건으로 연결된 관계가 아니라 두 번째 박스의 사건이 일어나기 위해 존재 조건이 첫 번째 박스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었다는 전제가 된다. 다시 대범한(과잉 해석을 동반한) 풀이에 따라, '아담과 하와는 왜 사과를 먹었는가?'라는 질문은 '원래 그러한 존재이다'라는 답변을 요구할 뿐이라는 것이다. (신은 완전한 존재인데, 어떻게 불완전한 존재를 만들 수 있는가? 이렇게 질문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는 문제 설정 방식인 셈이다. 나는 시에서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첫 번째 박스와 두 번째 박스 사이의 간극 없는 인과성으로 인해 두 번째 박스와 세 번째 박스는 운명적인 관계로 엮기게 된다. 우주의 질서를 앤트로피의 증가로 설명하는 것은 설명하기 쉽다. 하지만 완전성의 세계가 불완전성의 세계로 전화되는 논리는 최초의 사건에서만 가능하기에 위 도해의 구도는 한 차례만 성립된다. 나와 당신의 아버지에게 이 일이 일어났다면, 나와 당신에게는 첫 번째 박스 같은 존재론적 사건은 일어날 수 없다. 당연히 나와 당신의 아버지에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계속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면 결국 태초의 첫 번째 사건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이 왜 불완전성의 조건을 만들었는지는 답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방식의 설명을 시작하게 되는데, 앤트로피가 아니라 상처와 회복의 순환론을 그 자리에 두는 것이다. 완전성의 세계는 불완전성의 세계로 현상하고 이 불완전성으로 인해 완전성의 회복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그것이 상처가 '성숙하는 혼'을 이끌어내고, 불완전한 존재의 '이성'은 그 불완전함으로 인해 완성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릇이 깨지는 사건(이 시의 세계관에서는 이미 그릇은 깨져 있는 존재이지만)은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가 된다고 할 수 없다. '깨진'은 양면적인 의미를 갖고 그 결과 '상처'도 양면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공부를 위한 준비 > 작품 더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품읽기] 고재종, 초록 바람의 전언 (0) | 2023.04.29 |
---|---|
[작품 읽기] 이수익, 회전문 (1) | 2023.04.22 |
[작품읽기] 광야, 이육사 (0) | 2021.04.09 |
[시집 읽기]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읽기 (0) | 2021.04.02 |
[작품읽기]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김영랑 (원고) (0) | 2021.03.10 |
[작품읽기] 이런 시(詩), 박목월 (0) | 2017.03.29 |
[작품 읽기] 섬세한 읽기(cloze reading)로 '상행'(김광규) 읽기 (2) | 2016.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