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 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속에 빛을 우겨넣고
버팅겨 허리를 펴는 틈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 년의 시간, 분, 초로 나누어 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서울, 거대한 빌딩의 정글 속에서
다리 없이 벽과 벽을 타고 다니며 우글거리고 있다
지금은 화려한 타일과 벽지로 덮여 있지만
새 타일과 벽지가 필요하거든
뜯어보라 두 눈으로 확인해보라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든 천연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틈! 틈, 틈, 틈, 틈틈틈틈틈.......
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 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나 풀잎의 등을 밀어주던
나약한 힘이다
이 힘이 어디에든 스미듯 들어가면
튼튼한 것들은 모두 금이 간다 갈라진다 무너진다
튼튼한 거들은 결국 없어지고
가냘프고 나약한 허공만 끝끝내 남는다
- 바늘구멍 속의 폭풍, 문학과지성사, 1994
1.
끊임없는 생산의 혁명적 발전, 모든 사회적 조건들의 부단한 교란, 항구적인 불안과 동요는 부르조아 시대와 이전의 모든 시대를 구분짓는 특징이다. 모든 고정되고 꽁꽁 얼어붙은 관계들, 이와 더불어 고색창연한 편견과 견해들은 사라지고, 새로이 형성된 모든 것들은 골격을 갖추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 단단한 것은 모두 녹아 날아가고, 거룩한 것은 모두 더럽혀지며, 마침내 인간은 냉정을 되찾고 자신의 실제 생활조건, 자신과 인류의 관계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맑스/엥겔스, <공산당 선언>, 1848)
굵은 글씨 부분의 영문본은 아래와 같다.
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all that is holy is profaned, and man is at last compelled to face with sober senses his real conditions of life, and his relations with his kind.
김기택, 그는 공산당 선언을 공유하고 있는 것인가? 천만에.
단지 그는 모든 것이 바뀌어갈 미래의 과거를 알고 있었을 뿐이다.
모든 미래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안다, 어떤 것도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며 어떤 단단하고 거룩한 체제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을 것임을. 그는 다만 이러한 이치를 아는 사람들과 비전을 공유했을 뿐.
2.
부재의 존재 증명, 존재하지 않는 것이존재하는 것들을 규정한다.
(집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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