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어찌한 일로 중학생 아이들이 보고 있던 <북두신권>이라는 만화책을 빼앗아 보았다. 돌려주든, 그렇지 않든, 애들이 보면 좋지 않을 폭력-그보다는 철저한 남성주의적 세계관 때문에 좋지 않다. 빼앗는 것은 명분이고, 애들 몰래 보는 것은 실리다.
이 만화에서 압권은 바로 이 대목이다. 켄시로의 대사..... "너는 이미 죽어 있다."
그렇다면 그 순간 청자는 이미 몸은 죽은 상태에서 자기의 존재에 대해 그의 존재 역사상 가장 치열한 성찰을 시작하게 된다. 성찰하는 존재는 '나'인가? 내가 죽었다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나'는 나에 대해 성찰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는 나였던 타자에 대해 성찰하는가? 혹은 이제는 나 아닌 타자가 되어 버린 육체에 아직 붙어 있으면서도 나도 타자도 되지 못하는 '나'에 대해 성찰하는가?
이건 하나의 질문일 뿐이다. "너는 죽어 간다."와는 달리 "너는 이미 죽어 있다."고 판정하고 있고, 그러므로 이 말이 소통 가능하다는 조건에서는 사고할 수 없는 죽은 존재 대신 사고할 수 있는 죽은 존재를 청자로 삼고 있는 판정이다. 동시에 유체 이탈이 발생한 이후의 상황이 아닌 까닭에 영혼을 청자로 삼고 있지는 않은 판정이다. 논리적인 귀결은 청자가 이미 죽어 있는 나를 대신해서 성찰하고 있는 '나'는 이미 죽어 있으면서도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흔적이라는 것.
대개 육체와 정신 사이의 지연을 문제 삼는다면, 정신은 나아가고 육체가 그에 미치지 못하는 사태와 관련되는 법이다.
'넌 아직 애송이야' 이런 얘길 들을 때 괴로운 건 애송이 정신을 둔 몸이 아니라 몸 때문에 부당하게도 애송이 취급 당하고 있다고 여기는 정신이다. 심지어는 애송이인 까닭이 판단 능력 부족 때문일 때조차 정신은 그게 다 몸이 뒷받침해 주지 못한 까닭이라고 여긴다.
그러니 "너는 이미 죽어 있다."는 회복 불능의 판정은 정신의 흔적에다 대고 하는 말이다. 인간의 제3지대. 이를테면, 죽음의 구렁텅이로 숙명적으로 이끌려가며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확인하고'만' 있는 존재의 상태.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보담 백 배 낫다.
(2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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