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시 쓰고 웃었다

[쓰다] 주머니 속에

주머니 속에 종이 몇 장 잡힌다 카드 쓰고 받은 영수증영수증 같은 반으로 접힌 삼천 원톨게이트 영수증 영수증 같은 순번표 한 장하루가 몇 장의 종이로 손바닥에 앉아 있다 일부는 돈의 흔적으로 남고일부는 돈의 흔적의 흔적으로 남았다모든 게 돈으로 환산되고 나니다른 편 주머니 속은 충만한 허무 하루는 쏜 살의 촉 끝에서 바쁘게 앞서 가고종이들은 손바닥에서 날린다쫓아갈 수 없는 하루는 보내고대신 종이 몇 장 뒤잡는다바쁘게 쫓아가는 척(2012.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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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익숙하지 않은 밤

8시 반쯤 집을 나와 언주로를 타고 북으로 달리다가 두 번 방향을 꺾어 동호대교를 건넜다 이렇게 몇 차례 길을 타고 방향을 꺾어가며 병원 장례식장에 이르렀을 때 삼일 낮밤이 꿈결 같이 지나갔던 지난 해 끝자락 아버지의 마지막 거소의 그 익숙한 분향소 안으로 걸어들어가는 내 검은 구두가 형광등에 연신 빛나고 검은옷의 얼굴들과 초췌한 유족 무심히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는 근조화환들이 분별되지 않은 채 늘어서 있었다 몇 번쯤 손을 탔을까, 지쳐 있는 국화 다발 속에서 그나마 앳된 놈 하나 뽑아 제단 위에 올려두고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고인 앞에 예를 올렸다 그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느 문상객이 엎드려 절하는 도중 되내이고 또 되내이면서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하지 않을 이 일에서 얼마나 도망치고 싶어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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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흔적

하룻밤이 지났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밤을 새워 고심하던 문서 연애에 관한 문서 아직 이름도 갖지 못한 문서 하나 사라졌을 뿐이다. 새기지 않은 서판에 남겨져 있지 않은 흔적에 미련이 머문다 만들다 만 요리에는 남겨져 있지 않은 흔적 존재하지 않는 조리에만 남은 차가운 흔적 연애에는 남아 있지 않고 좌절된 생각들에 상처로 남은 흔적 (2012.03.21) * 어떤 문서일지 고심하면서 백만 개의 단어를 소환하였다 모든 가능한 의미들에 '연애'가 가장 부합하였다 놓아 두었던 단어가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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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슬픔 없는 나라 ㅡ 60년전

상상력 없는 정치인들이 기초하고 상상력이 두려운 교육자들이 정당화하고상상력이 과한 시인들이 뒷받침했다 슬픔 없는 나라를 만들려면 정치인들은불행한 일을 없애야 한다는 것을이미 알고 있었다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일은슬픔을 연상시키는 단어들을 금지하는 법을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너무 일찍 알고 있었고그 단어들 없이는 정치를 할 수 없다는 것을알고 있었고그것도 당장 그만 두어야 한다는 것을알고 있었으나다행히 60년쯤 유예할 수 있는 인류 중대사,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일을 한 것이라는 것을자부심을 갖는 것도 괜찮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슬픔 없는 나라를 만들려면 교육자들은아이들이 삶을 긍정하도록 배워야 한다는 것을이미 알고 있었다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일은좋은 것만 배우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이미 알고 있었고슬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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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이삭줍기

이삭줍기는 탈곡이 끝난 뒤에야 시작된다 털어내고 줍는 것은 모두지 못해서 그리되었다만 한편에선 모두 모두지 못하기를 바라고 한편에선 모두 모두지 못하고 줍지도 못하기를 바라서 잔인한 필연, 잔인한 선택이 되고 만다 이삭줍기는 (2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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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하얀꽃

아버지의 머리 위에 하얀꽃 핀 뒤로 산꽃들은 죽고 죽은꽃들이 살았다 아버지 머리 위에 죽은꽃들이 산꽃들 대신 어리광을 부렸다 아버지 머리 위에 죽은꽃들이 시들시들 검은꽃이 피어났다 아버지 머리 위에 검은꽃 핀 뒤로 죽은꽃들은 죽고 대신 산꽃들이 꽃단장했다 나는 아버지 머리 위에 하얀꽃 뿌리며 죽은꽃 피기 전의 옛일들을 생각하였다 산꽃들이 지천에 있었다 (2011.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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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관계

(1) 시작이 그랬다는 것이다 만나기 전부터 오래 우리의 관계는 태어나기 전부터 미리 장만해 두셨다는 소년소녀 세계명작전집 그 속에 굳어져 있었던 당신의 거울 이미지 어린 시절은 서로에게 장남이라는 족쇄를 채우고 커 가면서 종교라는 믿음의 회의라는 형식과 회의의 믿음이라는 형식으로 서로 충돌하면서도 다 커서 서로의 삶에 대한 간섭으로 부딪----히----는 고통을 겹겹이 껴 안으면서도 커 가면서 집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길어지고 다 커서는 만나지 않는 시간의 간격이 길어지면서도 미워하고 미워하고 미워하고 미워하면서도 그렇게 벗어나지 못했던 우리의 관계는 (2)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당신을 병원에 모시고 난 뒤 드문드문 얼굴을 보이면서 죽음이 저만치서 자기의 시간을 노래하고 특별히 집착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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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하지 말았어야 했던

하고 싶은 일들은 저만치 있는데, 거기 누가 있어 가로막고 서서 먼저 이것도 부리고 저것도 앞장서다가 이 일도 돕고 저 일에도 간섭하다가 내쳐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찬찬히 발을 내딛으라고 말한다면, 나는 어쩔 것인가, 그렇게 살아오며 어느덧 천리길만 꿈꾸다가 그 길에 나설 길 없고 어리숙한 수고가 켜켜이 쌓여 새로 천 리 길을 이루고 그 길 어귀에 나의 어리석은 고뇌가 낡은 편자처럼 뒹구는데, 나는 한 걸음, 호사가의 말 다음엔, 천리길, 이런 몽상가의 꿈이 닿지도 못하는, 저만치, 가기만 했어도 되었는데, 나는 (2011.06.29) (그림 자료 출처 : ....는 오래 되어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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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었었-

문제란 세상으로의 투신도 아니고 졸업을 할까 말까 하는 것도 아니고 연애의 끝도 아니고 -었었-이었었다, 이렇게 지금은 쓸 수 있게 되었지만 쓸 수 없었다 -었었-은 80년대 초반까지는 완료로 배웠고 80년대 중반 이후론 낭비였으니까 완료는 과거를 중첩시키고 중첩되는 것은 축적되는 게 아니라 그저 불필요하다고 떠밀려 사라지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면서도 -었었- 하며 혀를 잇몸에 부딪힐 때마다 잘리고 떨어져 나가 없어지는 기억들이 안타까웠던 것이었으니까 나도 동조를 했던 거다 -었었-을 쓰지 않고 아니 -었었-을 쓰지 못하고 알고 보면 완성된 기억들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렇게도 이룬 것 없이 방황하면서도 간직하고 싶은 것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괴로웠었었던 것이니까 (2011.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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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책 읽는 사람은

책 읽는 사람은 위험하다 그-녀는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가능성에 금 그어 놓지 못한다 그-녀의 마음을 붙잡아 놓지 못한다 그-녀를 감시할 수 없다 책은 그-녀의 행동을 막을 수 있다 책이 그-녀의 마음을 붙잡아둘 수 있다 책만이 그-녀를 감시할 수 있다 그-녀를 묶어놓을 책을 가져다 주어라 그-녀를 오랜 생각에 빠지게 하여라 그-녀를 스스로 감시하게 하여라 그-녀는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른다 위험하다 책은 알고 있다 (2011.01.10) Woman Reading in an Interior, by Carl Holsoe 사이트 여행 중에 우연히 아래와 같은 블로그 게시물을 보았다. 책 읽는 여자들이다...라.... http://blog.naver.com/gisant/10030006124

misterious J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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