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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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作詩] 신분세탁자

주민센터에 들어서자 그 중 누군가의 눈빛이 빛난다 빛났을 거라 생각한다 그는 그의 빛나는 눈빛을 숨길 수 있었을 것이므로 그는 특별한 평범한 사람이다 9급 지방공무원으로 접수대 앞에 앉아 있지만 5급 국가공무원 급의 명예와 4급 국가공무원 급의 책임감으로 모 국가기관에 채용된 지 10년 차 비밀요원이다 일종의 파견으로 저 자리에 앉아 있는 그는 언제나 평범한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렇다는 거다 나는 그의 존재는 알지언정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므로 저 접수대 앞에 앉은 평범한 일곱 명의 한 사람으로 저렇게 앉아 있는 것이다 혹은 일곱 명 전부일는지도 모르지 그는 첨단 정보 기술을 훈련 받지 않았다 그랬더라면 7년 묵은 컴퓨터로 AR VR에 못 뽑아내는 정보가 없는 그의 신통한 능력이 들통나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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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作詩] 그리워하지 않는 기다림

기다림이 모두 숫자로 바뀐 정류장 오늘의 벤치 가만히 앉아도 그리움은 없다 고갤 돌려 목 긴 얼굴로 설레던 그대를 기다리던 이 자리 습관이 되어 기둥처럼 서 있고 버스를 떠나 보내고 다시 또 떠나 보내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운 그대를 대신하여 B612 같은 숫자들이 하나씩을 빠지면서도 그리운 그대가 오지 않아도 (2021.03.15.) * B612: 어린 왕자가 살던 소행성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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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作詩] 느리게 혹은 느릿느릿하게

몸은 느리게 반응하는데 마음은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다 느릿느릿하게 느림을 연기하면서 느린 반응을 핑계대지만 느리게 느릿느릿함을 연기하면서도 마음은 조바심에 쪼그라들고 있다 어찌해야 하나 그이의 말에 한마디 대답으로 온 세상이 달라질 것을 (2021.03) ※ 수시로 현실과 꿈(무의식) 사이를 넘나들며 인셉션 작업을 수행하던 주인고 코브는 아내 멜이 현실과 꿈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며 심한 우울증에 빠지자 꿈 속에 그녀를 보호할 림보, 즉 무의식이 무한히 겹쳐진 공간을 구축한다. 이 세계 속에서 멜은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한다. 나아가 실제 현실을 무의식 속이라고 생각하면서 여기서 탈출하기 위해(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데 이로 인해 실제로 죽음을 맞게 된다. 아래의 해변 장면은 코브가 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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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作詩] 침묵

한 시간 전쯤 들어와 있던 환자는 연방 신음을 내고 있다 그 소리는 절반은 여왕의 목소리 절반은 이방인의 목소리를 닮았다 소리는 전언의 중계자를 찾고 있었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나 하나인 듯했다 나는 통역의 능력을 갖지 않았다 그는 곧 이곳의 여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성 안에는 나의 여왕이 있다 이 성에서 밤을 새 본 문지기는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밤중을 찾을 여왕 추대자들은 없으리라 그 대신 앞으로도 계속 들이닥칠 먼 나라의 사자들이 성 밖에 이미 도착해 준비하고 있다 소리는 점차 중계자 없이도 여왕의 권위를 닮고 있었다 나의 늙은 여왕은 그 사이에도 수많은 사자를 물렸고 그럴 때마다 칭병을 핑계로 삼았다 하지만 먼 나라에서 온 사자는 사랑도 없이 사랑의 징표를 잔뜩 준비했다 나는 늙은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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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作詩] 연기자 미스테리어스(Misterious Jay)

미스테리어스는 Jay의 두 번째 캐릭터 미스티블루가 꿈꾸던 은밀한 욕망 경이롭고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의 이름을 비틀어 세상에 없는 철자를 입고 자라난 뻔뻔하고 재기 넘치는 재연의 연기자 기술과 환영으로 영웅이 되었던 미스테리오와는 혼동하지 마세요 그는 이트륨을 가지고 있고 내게는 아이오딘이 있지요 미스테리오가 비열한 욕망으로 추락하기 전부터 루차도르, 루차도르! 레이 미스테리오에 영감을 받았던 캐릭터 선과 악이 혼란스러운 세계에선 가끔 빌런도 흉내 내 보고 본체가 하고 싶은 일을 멋대로 대신 해 보는 미스테리어스 미스티블루가 있기 전 깊고 푸른 밤이 있기 전부터 우울한 회의주의자에게 남아 있던 희망의 내면 풍경 (20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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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作詩] 2021 청취자 여러분

사랑하는 청취자 여러분오늘도 여러분과 한 시간좋은 노래와 사연으로행복하게 보냈네요아, 그리고 인터넷으로 실시간 참여하시는 시청자 여러분도 계신데요오늘도 많은 분이 사연을 남겨 주셨어요동접 삼천 분, 좀 아쉽지요. 우리 동접자 만 명 목표 채워 봐요그 중에 몇 분의 사연만 읽어드리게 된 것도 아쉬운데요특이하게도 오늘은 그림 엽서 한 통이 스튜디오에 도착했네요요즘 엽서로 사연 신청하는 거 여러분도 낯설 거예요여행 중에 일부러 보내신 듯한데, 와 ㅡ 보내신 지 사 개월만에 도착했어요유튜브로 보시는 시청자 분들께서는 이거 보이시죠앞, 뒤, 이렇게신청곡이 그때는 인기절정의 곡이었는데 죄송해요, 오늘은 곡들이 꽉 차서다음에 기회되면 꼭 보내드릴게요아, 그리고 채팅창으로 계속 비티에스 신곡 틀어달라고 하신사막여시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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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作詩] 어느 오후의 분위기

바람은 시시각각 방향을 바꾼다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같은 방향이다 바람을 마주대하기로 했을 때에는 가야 할 방향을 정해둘 까닭이 없다 다르게 부는 게 바람의 생리인 듯해도 바람은 항상 같은 방향으로 분다 바람에 묻어 있는 냄새는 산에서 내려오는 것과 골목을 훑고 나오는 것이 다르다, 길 건너는 횡단보도의 노란 페인트 줄무늬 위에서 다르고 첫 번째 골목인가 힐끗거리다가 갑자기 방향이 바뀌어 두 번째 골목으로 들어설 때도 다르다 바람이 기억에조차 없는 옛동네로 나를 인도할 때 알 수 없는 방향에서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는 다만 나는 바람에 묻은 무수한 냄새들을 따라 바람의 길을 찾는다 항상 거기 있을 것만 같은 동네로 바람이 나를 이끌리라 하지만 바람은 수시로 방향을 바꾸고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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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作詩] 고장난다

서울 밝은 달 지는 새벽 못 마친 일을 남기고 자리에 들었을 때 딱 걸렸다 너는 ㅡ 헐고 약해진 몸이란 어찌할 도리 없는, 이미 벌어진 순리 ㅡ 다들 그렇게 나이가 들어가는 ㅡ 잠도 안 오는데 깨어 있는 ㅡ 책상 위에 아직 끝내지 못한 일들이 남아 있는 은밀한 손길로 다시 안경을 찾아와 건네줄 때 너는 나를 고장내고 있었던 게다 그리하여 방금 나는 고장나고 있는 몸의 경과를 목격하게 된 것이다 내 것 아닌 양 빼앗고 은밀히 언젠간 버릴 요량이었다가 들켜버린 채 멀쑥한 표정으로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며 나와 같은 곳을 보고 있는 너는 (202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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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作] 사랑의 블랙홀 ㅡ 시 쓰기에 대하여

시라고 쓰는 데 이어쓰다가 다시 행을 내려쓰면 같은 뜻인가 다른 뜻인가 이어쓰고 내려쓰는데 뜻이 달라지면 뜻이 달라서 내려쓴 것일까 내려쓰고 보니 뜻이 달라진 것인가 사랑의 블랙홀 여섯 시면 다시 시작되는 반복의 세상 매번 다른 선택이 처음으로 되돌리려는 시도 고쳐 쓰기를 하면 새로 쓰기가 따라와서 고쳐 쓰기를 실패하게 되는 시 쓰기의 딜레마 시라고 쓰는 데 이어쓰다가 다시 행을 내려쓰면 같은 뜻인가 다른 뜻인가 이어쓰고 내려쓰는데 뜻이 달라지면 뜻이 달라서 내려쓴 것일까 내려쓰고 보니 뜻이 달라진 것인가 (20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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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作] 비가 와도 젖는 자는 ㅡ 오규원의 시가 어려워서

전운이 깔린 저녁이다 전황이 질척일 낌새다 흉흉한 소식을 전하는 전령 같이 밤 바람이 지나자 배수진마냥 도로를 뒤로 하고 희고 검은 참호들이 진지전을 펼친다 ㅡ 하지만 그들은 이동한다 ㅡ 참호마다 눈을 밝히고 짧은 사이렌을 수시로 울려 공습에 대비하는, 준비된 자들이 그 참호 속에 있다 ㅡ 그들은 이동한다 ㅡ 이내 대규모 공세가 시끄럽게 방어진을 흔들겠거니 하던 예상과 달리 하늘은 조용히, 거스를 것 없이 지상에 강림한다 ㅡ 그들은 어디론가 이동한다 ㅡ 그들은 떠나고 벽과 담들은 무너져 버린 전세를 보도한다 하늘은 지상을 거의 점령했고 간신히 남은 전선의 중간지대에서 담배 한 대 피울 동안의 낭만스런 능청을 연기할 여유도 빼앗기고 참호에서 내쫓겨 잠시 담벽으로 피해 서 있던 오후마저 피로했던 외로운 병사..

misterious J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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