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아이러니
이상, <오감도-시제십이호>, 박세영, <시대병 환자>, 이성복, <그 날>, 기형도, <대학시절>
1
‘일상(日常)’은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 혹은 항상 그러함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 딱히 주목할 만한 대상도 없고 그렇게 만드는 눈에 띄는 어떤 것도 없다. 어떤 일도 일어나고 있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그래서 오히려 무상(無常)할 뿐이다. 그런데 문득 빈틈이 하나 보인다. 일상의 빈틈 사이로 일상의 질서를 뒤흔드는 낯선 무엇인가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보았다고 확신하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더 이상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다음 두 가지 반응 중 어느 하나를 택하게 된다.
“모든 것이 가짜야, 트루먼. 모든 사람이 너를 알고 있고, 이 모든 게 널 위해 만들어졌지.”
- <트루먼쇼>
“의사 체험도 꿈도 존재하는 정보는 전부 현실이고 그리고 환상인 거야. 어느 쪽이 됐든 한 인간이 일생 동안 손대는 정보 따윈 사소한 거야.”
- <공각기동대>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이 가짜라면, 그 가짜 뒤에 숨겨진 진짜의 현실을, 쉽지는 않겠지만, 찾아나섬으로써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일상이 환상이면서 또한 현실이라면? 그 일상이 환상이어서 그 이면의 진짜 현실을 찾아 나섰고 결국 성공하여 도달했는데 그렇게 되찾았다고 생각한 현실이 여전히 환상이기도 하다면? 그럴 때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우리가 생각해 보려는 ‘일상의 아이러니’는 특히 후자와 관련된 양가적 현실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확실하게 믿었던 현실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는 일상의 아이러니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 <매트릭스>에서 앤더슨/네오는 파란 알약과 빨간 알약을 선택해야 하는 시점에서, 또 눈 떠 보니 매트릭스 장치 속이었음을 알게 된 시점에서 아이러니를 경험하지는 않는다. 이 영화에서 아이러니를 경험하는 존재는 동료들을 매트릭스 속의 요원들에게 넘기고 네오를 죽이려 했던 사이퍼였다. 그는 현실과 매트릭스의 실체를 알고 있으면서도 위험하고 고달픈 현실 대신 ‘환각’일 뿐인 매트릭스를 선택하려 했다. 만약 이 영화의 서사를 이미 알고 있는 우리 앞에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이 놓인다면, 그때는 우리가 이 일상의 아이러니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2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오감도-시제십이호>를 읽어볼 차례이다. 앞서 ‘일상의 아이러니’에 대해 언급했던 것은 이 작품이 주제의식 속에 이에 대한 의식을 담아낸 적절한 예로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묻은빨래조각이한뭉텅이공중(空中)으로날라떨어진다. 그것은흰비둘기의떼다. 이손바닥만한한조각하늘저편에전쟁(戰爭)이끝나고평화(平和)가왔다는선전(宣傳)이다. 한무더기비둘기의떼가깃에묻은때를씻는다. 이손바닥만한하늘이편에방망이로흰비둘기의떼를때려죽이는불결(不潔)한전쟁(戰爭)이시작(始作)된다. 공기(空氣)에숯검정이가지저분하게묻으면흰비둘기의떼는또한번이손바닥만한하늘저편으로날아간다.
(이상, ‘오감도 시제십이호’)
이 작품은 ‘빨래조각’, ‘공중’, ‘비둘기’, ‘숯검정이’를 시어로 삼아 중의적 구조의 의미망을 만들고 있는, 이상의 연작시 <오감도> 중에는 비교적 해석하기가 용이한 작품이다. 의미망을 분석하기 위해 심상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먼저 도해로 나타내 본다.
화자를 기준으로 할 때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공간은 음영 표시한 박스 안으로서, 심상들이 조직되고 시상이 전개되는 시작점이 된다. 아마도 화자는 (냇가이든, 밖에서 들여다보이는 여느 집의 우물가이든 간에) 어느 빨래터에서 빨래 중에 일어난 일을 보고 이 시적 장면을 상상했을 것이다. 이로부터 빨래를 다시 빨아 빨랫줄에 걸어 놓는 일련의 과정에서 빨래조각과 비둘기의 은유적 관계를 떠올리고 빨래를 하는 행위와의 환유적 관계에서 비둘기를 때려죽이는 것을 연상한 후, 때를 씻는/때려죽이는 행위와 평화/전쟁의 양가적 은유 관계를 떠올려서 전체의 의미 구조를 완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평화와 비둘기의 은유 관계는 익숙한 것이지만, 때묻은 흰비둘기 떼의 이미지는 이 시의 독특한 상상 구조를 뒷받침하는 창의적인 발상의 소산이다. 흰비둘기 떼가 어딘가로부터 날아와서 내려앉았는데 그것들은 때가 묻어 있다. 이 ‘때’는 이미 공중을 나는 동안 묻게 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물론 작품 외적 맥락으로 보면, 그것이 만주 침공 이후 아시아의 패권을 노리는 일본이 군사적 확장을 꾀하던 중일 전쟁(1937년) 직전의 중국 대륙이나, 아니면 좀 더 앞선 시기인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불안정한 유럽 대륙을 ‘손바닥만한한조각하늘저편’으로 볼 수 있으므로 그것이 저편 어느 땅에서 묻은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적 장면 내에서 이 비둘기떼는 빨랫줄에 매달려 있었던 빨래조각이었으므로 이미 널린 상태에서 때가 묻어 있었던 것으로 상황이 설정되어 있다고 보는 것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렇게 읽었을 때 다음의 분석 과정이 이해가 된다. 이 이상해 보이는 상황 설정은 환유적으로는 빨래(하기)가 이어질 것을 연상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그 의미를 전도시키기도 하는 조건이 되는데, 빨래(하기)라는 행위는 비둘기떼가 때를 씻는 것의 은유이지만 동시에 비둘기떼를 때려죽이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양가적이며 중의적인 성격의 ‘빨래(하기)’에 대해 작품은 ‘불결한 전쟁’이라고 표현한다. 비둘기떼의 때는 빨래로 인해 생겼다는 뜻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해석적 맥락을 만든다. 바람이 불어와 빨래가 땅에 떨어진 것은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떼가 날아온 것과 같으므로) 평화가 왔다는 메시지가 되지만, 빨래를 하는 것은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떼를 때려잡는 것과 같으므로) 평화를 위협하는 일이 될 뿐 아니라, 평화를 보호한다는 것이 (때를 없앤다고 하면서 오히려 공기 중에 숯검정이를 만들어내는) 실상 ‘불결한 전쟁’을 시작하는 일이 된다.**
여기서 퍼즐의 조각들이 맞춰진다. 어째서 공중에 달려 있던 빨래조각에 때가 묻어 있던 것일까? 이것은 빨래(하기)를 통해 빨래에 때가 빠졌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숯검정이가 묻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비둘기 떼가 때를 씻는 것이 불결한 전쟁이 되는 것일까? 이것은 평화의 메시지가 위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났다는 것은 전쟁이 멈춰 있다는 것일 뿐, 실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쪽 ‘손바닥만한한조각하늘’과 다를 바 없는 이쪽 ‘손바닥만한한조각하늘’이 있는 있는 것이고, 이쪽은 저쪽에 평화가 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지만 정작 이쪽은 전쟁의 불온함에 평화가 쫒겨나는 상황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작품이 보여주는 세계란, 저쪽의 ‘평화’가 이쪽에는 ‘선전’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고 또한 이쪽의 ‘전쟁’은 저쪽(또는 어떤 쪽)에는 평화로 치장되어 전파되는 세계, 곧 ‘전쟁’이라는 비일상적인 폭력이 평화로워 보이는 일상에 내재해 있다는 ‘일상의 아이러니’를 지닌 세계라 하겠다.
이 해석의 경로가 얼마나 시인의 의도와 일치하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시인이 일상의 모습을 부각하기 위해 ‘빨래’를 소재로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작품처럼 양가적 의미가 있거나 중의적 의미 구조가 비교적 선명히 보이는 경우에는 사고의 도식화 과정이 시인의 심상 구조나 시상 전개에 기여했을 것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고, 이런 경우에는 대개 잘 도식화된 도해를 통해 (시인의) 사고가 어떻게 안정화되었을지를 추정할 수 있게 된다.
* 때가 있어서 빨래가 필요했는데 빨래는 때를 만들었다.
** 여기서 ‘숯검정이’는 은유적으로는 ‘때’와 같은 계열체에 있고, 환유적으로는 매연을 내뿜는 전쟁 병기들과 그것들이 야기하는 전쟁으로 이어진다. 또한 ‘공기’는 ‘공중’과 ‘하늘저편’의 계열체로서 공통적으로 전쟁의 상황, 전쟁 직전, 혹은 직후의 불온한 분위기 등과 연결된다.
3
<오감도-시제십이호>에서 읽을 수 있는 ‘일상의 아이러니’는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박세영의 <시대병 환자>에서는 한층 더 명징하게 나타난다.
솔개미가 빙빙 단엽기(單葉機)같이 날은다.
소란한 도시는 떠는 듯 무장을 하였다.
청년단원이 나팔을 불고 지나가고,
트럭이 쉴 새 없이 도심지대를 향하여 달리고 있다.
납작한 보루같이 그 병원의 집 우론 고사포 둘이 솟았다
금방에 날으던 솔개미가 사라지니
연기가 무럭무럭 콩크리트의 굴뚝은 길기도 하다.
내 눈이 미쳤나, 보면 볼수록 늘어가는 고사포,
공장마다 솟는 굴뚝,
이리하여 도시는 완연(完然)히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독가스를 마신 질식한 사나이,
시대병(時代病) 환자다,
그러나 나를 환자라고 보는 이가 없다,
보아 주는 이조차 없다.
(박세영, ‘시대병 환자’)
여기 등장하는 화자가 ‘환자’라고 전제한다면, 이 환자는 근대 사회로의 속도감 있는 변화 과정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의식 속에 솔개/단엽기, 트럭, 굴뚝/고사포 같은 것은 중첩되기도 하고 교차하기도 하며 대치되기도 하는 등 혼란스럽게 현실을 구성한다. 병리학적으로 이런 증상에 대해 망상과 우울증이 동반하는 조현형 성격 장애라고 규정한다. 다만 자신이 스스로를 환자로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신분열에 이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화자가 보는 현실은 전투 준비에 한창인 ‘대포 도시’*와 흡사하지만 또한 빠르게 도회화하고 있는 근대적 도시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독가스를 마신 질식한’ 이 사내의 반응을 다른 사람들이 몰라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 환자의 부적응 반응은 마땅히 눈에 띌 행동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화자를 환자라고 보지 않을 뿐 아니라 화자의 행동에 주목하지도 않는다. 환자는 자신이 환자임을 알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환자라고 보지 않는 이 모순성은 이 환자가 겪고 있는 병증의 본질이다. 우리는 이 모순성이 화자의 발화 전략에 의해 비롯되었음을 본다. 화자는 자신의 병증을 ‘시대병(時代病)’이라 지칭하였는데, 아마도 ‘시대를 앓고 있는 병’이라는 의미로서 사용되었던 이러한 병의 명명이 화자의 발화에 앞서 있었을 리 없으니 이 지칭은 화자가 시도한 명명(命名)으로 봐야 한다. 이러한 판단이 맞다면, 다시 말해 화자가 자신의 병증을 진단하여 병명을 정한 것을 참된 진술이라고 보고 화자가 실제로 시대병을 앓고 있다고 전제한다면, 이 시대병은 화자와 같은 병증의 측면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가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의 무자각의 측면에서도 존재한다고 판단하는 것도 참된 진술이 된다.
다만 이 진술을 노출시키지 않음으로써 화자의 시적 진술은 발화 층위에서는 모호성을 남기는 한편****, 의미 층위에서는 ‘일상의 아이러니’를 통해 주제를 좀 더 극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 오토모 카츠히로<Cannon Fodder(大砲の街)>, episode 3 in <Memories>, 1995
** 작품에서 그려지고 있는 30년대 식민지 경성(서울)의 도회 풍경은 실제보다 더 근대화되어 있고 더 급격히 근대 사회적 면모를 갖추고 있다. 아마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화자와의 심리적 격차를 두드러지게 표현하기 위한 표현 전략이었을 것이다.
*** 텍스트에서는 밝혀져 있지 않았지만, 깜짝 놀라고 웅크리고 멈칫거리고 방황하는 화자의 행동이 앞서 언급한 착종된 현실에 대한 의식의 반응으로 동반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이는 이 작품이 군국주의적 동원 체제로 치달아가는 당시의 시대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정치사회적 악조건과 상관성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4
1970년대 후반의 몇 년 간과 1980년대 초반의 몇 년 간을 비교하면, 전자는 후자의 시기에 비해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뭔지 알 수 없는 불온한 기운이 가득 차 있던 때라고 할 수 있다. 소설적 구성으로 보면, 갈등이 심화되어 폭발하기 전의 위기 국면과 갈등이 폭발함으로써 그 첨예가 어떤 방향이든 파국을 향해 치닫는 것 사이의 차이는 일상과 비일상의 그것과 대응한다. 이성복의 <그 날>은 70년대 말, 그리고 기형도의 <대학시절>은 80년대 초에 각기 시인이 겪었던 일상을 시적 소재로 다루었고, 두 작품에서 화자들은 반복되는 일상의 단면을 그린다. 하지만 앞서 본 <오감도-시제십이호>와 <시대병 환자>에서와 같은 일상의 아이러니는 <그 날>에서 두드러지는데 그 까닭은 이 글 처음에 인용한 <공각기동대>와 <트루먼 쇼>에서 현실을 대하는 자세의 차이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종일
노닥거렸다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占 치는 노인과 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 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그 날’)
이 시의 모든 진술은 ‘모두 병들었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그리고 시는 그것이 ‘일상’이라는 더 큰 사실로 독자를 이끈다. 뭔가 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징후들로 가득 차 있는 이 일상은 여전히 일상인 채로 남아 있는데, 이것이 ‘일상의 아이러니’인 것이다.*
이 아이러니한 일상은 곧 사라질 일상과 곧 일상이 아니게 될 일상의 인과적 귀결이 현재의 일상과 현재적으로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야기된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인 우리는 알고 있는데, 이 일상은 불안정한 것이다. 시행들은 임의의 자리에서 끊어지고 시어들은 선택과 결합의 임의적 자리 배치들에 의해 낯설어진다. 일상의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 이 작품이 실린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는 시인의 첫 시집으로 1980년에 출간되었다. 하지만 시인은 ‘자서(自序)’에서 시집에 실린 작품들이 대개 78, 79년에 쓴 것들이라고 밝힌 바 있다.
5
<그 날>의 ‘거꾸로쓰기’ 격에 해당하는 작품이 기형도의 <대학시절>이다.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왔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 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토리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기형도, ‘대학시절’)
물론 두 작품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을 둘 만한 근거는 없다. 다만 진술 방식의 차이를 통해 두 작품의 상호텍스트성을 읽어낼 수는 있다. <대학시절>을 <그 날>처럼 바꾸어 쓴다면 다음과 같은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전략)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던 은백양의 숲은
여전히 깊고 아름다웠다
(중략)
총성이 울렸고 그때마다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감옥과 군대로 친구들이 흩어졌을 때에도 어김없이
목련은 피었고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 놓은 후배는
여전히 시를 쓰고 있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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