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먼지 앉은 석경 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새벽에 준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젖어 있듯이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 있을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 김수영, <파밭 가에서> 1연
또 역설에 대해 글을 쓰게 되었다.
쉽지 않은 주제이다. 하지만 오늘 쓰는 글은 어려운 주제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지극히 단순한 혼동에 관한 것이다.
역설에 대한 지식이 잘못 투입되는 예를 확인하는 것이다.
김수영의 <파밭 가에서>는 밭에 심은, 어느 덧 말라 죽은 것 같은 마른 파 껍질 틈새로 파랗게 올라오는 새싹을 보며 시인이 성찰한 내용을 담고 있다. 말라 붉게 시든 파 껍질에서 새싹이 그냥 올라올 리는 없으니, 조로를 이리저리 휘둘러 가며 물을 줄 필요가 있겠다. 그 물이 마른 파 껍질을 뚫고 들어가 살아 있는 속살에 새 움을 띄울 때, 젖은 붉은 파 껍질이 물에 불려 벗겨지며 새싹(?)이 자라기 사작하는 것이다.*
그러니 붉은 파밭의 마른 파 껍질은 생명이 쇠한 부분이며 푸른 새싹은 생명력을 갖게 되는 부분이다. 새 생명은 알(껍질)을 깨고 나오듯 븕은 파 껍질의 틈새로 새삭을 띄워 자라야 하겠지만, '묵은 사랑'을 '껍질'에 비유한 것은 오해하기 딱 좋게끔 안이한 선택을 한 결과로 보인다. 알을 깨고 나오는 비유를 의도한 것이라면, '묵은 사랑'은 옛것에 대한 집착,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자기애 같은 것을 나타내는 반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곧이어 그 사랑이 새싹에 이를 때, 새싹이 움트는 것을 결단코 반길 리 없는 반동적 존재로서 모습이 완성될 것인데, 여기에까지 이르면 위선적인 '묵은 사랑'은 '새싹'을 위해 벗겨내고 파괴해야 하리라. 새로운 내가 되기 위해 낡은 나를 파괴하는 이 행위는 역설적인 것이 맞다.
그런데 비록 쇠하여 시든 파와 새로 움틀 (가능성을 지닌,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그 시든 파 내부에서 생명력을 회복할) 새싹이 같은 존재가 시간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변이형들이라면*, 묵은 사랑은 새싹을 위해 자리를 비켜 주어야 할지언정 새싹이 묵은 사랑을 물리치고 자리를 차지하는 그런 관계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이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물러서야 할 옛것, 그 묵은 사랑은 시간의 질서를 거스르며 그대로 있으려 할 때에는 새싹을 위협하며 결국 죽음을 자초하게 되겠지만, 그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움직일 때', 그리고 '젖어 있을 때'** 새싹은 생명을 얻게 된다. 그 관계는 죽어야 살 수 있다는 역설의 경험이라기보다는 비워야 비로소 채울 공간이 생긴다는 발견의 경험이다.***
따라서 여기서 역설이 되지 않는 이유를 말하자면, 버리거나 죽거나 비워야 할 대상이 얻거나 살거나 채우게 될 대상과 같지 않다는 점을 우선해야 하겠다. 모순의 동시 공존의 조건을 충족하지 않는 한 역설의 생성 환경도 조성되지 않는다. "나는 이기고 너는 질 것이다." 아무도 이 말을 역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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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의 시상 형성의 배경이나 혹은 이해의 바탕에는 파의 생태적 특성이 자리잡고 있다. 파는 다년생 식물이라는 사실.
** 이 부분은 마치 <Foundation>(Isaac Asimov)에서 은하제국을 이끄는 삼두정(三頭政)의 세 복제 인간(초대 황제인 클레온 1세의 복제로서 Dawn, Day, Dusk)이 아이와 청년과 노인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영속된 생명을 위한 서로의 계기로서 필요한 존재들처럼 그려지고 있다.
** 이 반복된 표현이 만들어내는 계열체의 통합적인 의미는 시든 파의 껍질들이 단단히 마른 채로 새로운 생명에 저항하며 남아 있으려 애를 쓰지 않고 새싹이 움트며 자랄 수 있도록 벗겨지고 떨어지고 젖어 틈을 보이는 것을 말한다.
*** '묵은 사랑'이 '새싹'과 대립적 의미 자질을 가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 둘을 서로 타자화한다거나 아니면 오히려 '나'의 내면에서 서로 충돌하는 양가적 가치 같은 것으로 일체화하는 해석들이 많이 보인다. 이렇게 읽어서는 묵은 사랑이 벗겨진다거나 움직인다거나 젖어 있다는 등의 진술과 같은 의미 맥락에 있는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는 것이라거나 먼지 앉은 석경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거나 뉘우치는 마음 한복판에 있다거나 하는 진술의 의미를 제대로 읽지 못하게 되는데, 세 번을 반복해 뒤를 잇는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의 진술을 역설로 읽게 되는 오독이 뒤따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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