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에 자유를 許하라?… 좌·우파는 지금 ‘역사교과서 用語’ 전쟁중
국민일보 | 입력 2011.08.25 18:33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칙의 바탕 위에 기업이 성장하고 이윤을 창출하는 그 원칙이 흔들리는 게 아니다."(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이명박 대통령 발언)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고 현대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적극 앞장설 것을 굳게 다짐한다."(KBS 광복절 기념 다큐멘터리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좌파단체의 압력으로 방영되지 못했다며 한국자유총연맹이 낸 성명서)
#"우리 사회의 중심가치인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나갈 안정성과, 사법부를 발전적으로 바꿔나갈 개혁성을 함께 보유했다."(양승태 대법원장 내정자 인선에 대한 김두우 청와대 홍보수석의 배경 설명)
모두 8월 19일자 언론 보도에서 인용한 발언이다.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키워드는 '자유민주주의'다. 우리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이렇게 흔히 쓰인다. 특히 보수우파 쪽에서 자주 입에 올리는 용어임을 위 용례에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반면 진보좌파 쪽 사람들은 잘 쓰지 않는다. 과거 독재정권을 합리화한 냉전 이데올로기가 숨겨져 있다는 이유다. 그래서 '자유'는 빼고 그냥 '민주주의'라는 말을 애용한다. 특정 용어를 쓰든 안 쓰든 그건 각자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최근 '민주주의'에 '자유' 두 글자를 붙이느냐 마느냐를 놓고 보수우파와 진보좌파 진영이 세게 맞붙었다. 교육과학기술부와 실무 연구진의 다툼에 학계와 시민사회단체, 언론 등이 편을 갈라 뛰어들면서 논쟁의 불길이 계속 확산되는 중이다.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 대체 무슨 차이가 있길래?
교과부와 실무 연구진의 느닷없는 충돌
발단은 초·중·고 사회·역사교과서 개정안이다. 교과부는 지난 9일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사회과 교육과정(이하 교육과정)'을 확정해 고시했다. 교육과정은 교과서를 통해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겠다는 건지 교육 방향의 핵심 골격을 담은 것이다. 각 출판사가 검정교과서를 제작할 때 반드시 준수해야 할 지침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를 실무적으로 작성한 '교육과정 개발정책연구위원회'(이하 정책위)가 돌연 충격과 분노를 표시하고 나섰다. 지난달 15일 제출한 시안에는 분명히 '민주주의'로 표기했던 개념들이 9일 발표된 교과부 고시에는 모두 '자유민주주의'로 수정돼 있더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대목들이다. '주요 사건에 대한 시각 자료를 중심으로 국민들의 민주주의를 위한 노력을 이해한다.'(초등학교 사회) '4·19 혁명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개된 민주주의의 발전, 경제 성장, 대중문화의 발달과 국제 교류의 확대를 설명한다.'(중학교 역사) '1960년대 이후 민주주의 발전과 경제성장 과정을 이해하고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높아진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파악한다.'(고등학교 한국사)
이들 문장에서 민주주의 부분이 전부 자유민주주의로 고쳐졌다. 소단원 이름도 '민주주의의 발전' 대신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으로 바뀌었다. 이 같은 개정 취지에 따라 내년부터 나오는 교과서의 민주주의 표기 앞에는 '자유'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한다. 교과부는 구체적인 교과서 집필기준안을 연말까지 마련해 발표할 계획이다.
이에 정책위 위원 총 24명 중 21명이 지난 16일 '역사 교육과정의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제목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성명을 발표했다. 정책위 출범 이래 초유의 일이다. 위원장인 오수창 서울대 교수는 "교과부에서 별도로 구성한 '역사교육과정 개발추진위원회'로부터 사전에 여러 의견을 듣고 공청회도 열었지만 자유민주주의 개념은 한 번도 논의된 적이 없었다"며 "교과부가 설정한 겹겹의 검증 과정을 모두 통과한 끝에 교육과정안을 제출했는데, 고시 단계에서 일방적으로 변경돼 참담한 심경"이라고 말했다.
25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정책위 시안 제출에서 교과부의 고시 발표까지는 25일의 간격이 존재한다. 그 사이에 무슨 변수가 발생했을까. 교과부 교육과정기획과 담당자에게 물었다.
-절차상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데.
"우리가 마음대로 수정한 게 아니다. 정책위에서 시안을 제출하고 그 나흘 뒤에 최종 심의기구인 '사회과 교육과정심의회' 회의가 열렸다. 그 회의에서 자유민주주의로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한국현대사학회(안병직·박효종·이영훈 교수 등이 참여한 뉴라이트 계열) 쪽에서도 지속적인 요구가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국사편찬위원회에 의견을 물었더니 거기서도 자유민주주의로 바꾸는 게 좋겠다고 했다."
정책위는 사실 국사편찬위 산하의 임시기구다. 교과부가 국사편찬위에 교육과정 개발을 의뢰하고, 국사편찬위는 다시 정책위에 용역을 맡겼다. 국사편찬위원장이 현장 교사와 대학 교수들 중에서 정책위원을 선정해 위촉장을 준다. 국사편찬위 책임자와 통화했다.
-정책위원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정책위는 용역을 맡아 보고서를 낸 것으로 활동이 끝났다. 그 이후 교과부에서 국사편찬위의 공식 입장을 물어오길래 내부적으로 심도 있는 검토 끝에 자유민주주의로 고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교과부나 국사편찬위가 용역 보고서 내용을 100% 수용할 의무는 없지 않은가. 절차상 하자는 전혀 없다."
-자유민주주의가 더 바람직하다는 이유는?
"교과부에 보낸 공문에서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보다 더 심화된 높은 단계의 특성을 갖게 된 상태, 즉 권력에 대한 강한 통제와 강력한 법치주의, 개인 권리의 폭 넓고 두터운 보호 등을 내용으로 한다'고 근거를 제시했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인식 차이
절차를 둘러싼 시비보다 더 본질적인 부분은 따로 있다. 과연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점이다. 서양사의 보편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자유민주주의는 17∼19세기 서구에서 탄생한 자유주의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더한 합작품이다. 초기 자유주의는 봉건적 신분 질서를 타파하고 억눌려 있던 개인의 자유를 구원했다는 점에서 위대한 사상이었지만 치명적 결점도 안고 있었다. 소수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을 제외하고 다수의 노동자·농민 계급, 여성들에게 선거권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울러 빈곤과 실업의 원인을 모두 개인의 태만, 무절제 등에서 찾으며 사회 구조와 제도가 빚어내는 부분은 무시했다.
이런 결점을 개선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 요소가 결합됐다. 대표적인 것이 보통선거의 실현이다. 여기에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사회적 약자 보호를 위한 각종 사회보장법 등이 출현해 순수 자유방임주의 경제 원리를 밀어냈다. 이런 자유민주주주의 원리가 다수의 지지를 받으면서 세계의 많은 국가가 통치 이념으로 채택했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안정적이고 강력한 정치사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통용되는 자유민주주의의 성격은 서구의 보편적 개념과 좀 다르다. 북한 체제 또는 국내 좌파의 존재와 연결시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주로 보수우파 진영이 일종의 반공 이데올로기로서 그런 시각을 줄곧 견지해 왔다.
일례로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강경근 숭실대 교수 등 대표적 우파 학자들이 한국 현대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겠다며 출간한 '대한민국 건국의 재인식'(기파랑)에 그런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제헌헌법은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했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의 정통성을 갖지 못한 공산정권 김일성 집단을 물리쳤다."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로 좌파 이데올로기라는 가파른 언덕을 헤쳐 천신만고 끝에 여기까지 올라오게 한 원동력이 제헌헌법이다."
한국 우익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조갑제 전 월간조선 사장은 '벼랑에 선 대한민국, 우파는 무엇을 할 것인가'(월간조선사)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역설한다.
"김정일의 호화 방탕과 민중의 집단 아사가 보여주는 독재 체제하의 불평등은 자유가 말살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최고 가치로서의 자유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고, 이 자유를 신념화한 우파가 역사의 주인이며 최종 승자라는 점에 안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에 진보좌파 쪽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쓰는 걸 꺼리거나 배척했다. 그렇긴 해도, 지금까지 이 문제를 놓고 양쪽이 정면충돌한 일은 없었다. 각자의 영역을 묵인하거나 무시해왔다. 그러나 이번 역사교과서 논란으로 분위기가 돌변했다. 종전까지 비교적 평화 공존하던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동거 관계가 양쪽의 본격적인 공방전으로 파탄 난 셈이다.
좌우 대립이 부른 '역사교과서 전쟁'
"아니, 저쪽 사람들은 반공주의를 마치 잘못된 것처럼 얘기하는데, 공산주의라는 건 파시즘과 마찬가지로 전체주의 아닌가요? 그럼 대한민국이 전체주의 체제로 가야 합니까?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기본이념이 뭔지를 생각하면 반드시 자유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써야 해요."
권희영 한국현대사학회 회장(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은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기자에게 반문했다. 그는 "(좌파 인사들이) 여태까지 민주주의라는 미명 하에 인민민주주의를 선전하는 도구로 활용한 측면이 있다"고도 했다. 수식어가 없는 민주주의는 사회민주주의, 민중민주주의, 급진민주주의 등 좌파적 개념도 모두 포괄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분명하게 자유민주주의로 못박아야 하며, 이에 반대하는 쪽은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게 보수 진영의 주된 정서다.
반면 진보 성향의 진영효 전국교과모임연합 의장은 "단순한 개념 논쟁이 아니라 교과서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장악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친북 좌파만 있는 게 아니라 반북 좌파도 있다. 자기들보다 왼쪽에 있다고 해서 무조건 친북 좌파로 모는 건 쓸데없는 국민 분열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자와 통화한 보수 및 진보 진영 관계자 10여명 가운데 누구 하나 이 문제를 놓고 양보 또는 타협의 가능성을 말한 경우는 없었다. 양측은 현재 대대적인 선전전을 준비 중이다. 이성호 전국역사교사모임 부회장에 따르면 진보 진영의 역사문제연구소, 한국역사교육학회,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사교과서집필자협의회 등은 다음주 중 연대 성명을 내고 서명운동에도 착수할 계획이다. 한국현대사학회를 비롯한 보수 진영 역시 다음 주에 공격적인 성명 등을 발표할 예정이어서 양측의 '역사교과서 전쟁'은 갈수록 치열해질 전망이다.
이에 대해 중도 성향의 한 교수는 "현재의 용어 논란은 학술적인 의미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양쪽의 기싸움일 뿐"이라며 "좌 아니면 우로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게 문제"라고 개탄했다.
현행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6종을 모아놓고 '민주주의'가 어떤 대목에 들어있는지 찾아봤다. 이게 전부 자유민주주의로 바뀐다고 가정하면 사회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을까. 정작 학생들은 "무슨 차이가 있는 거지?"하고 어리둥절해할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학생과 시민들은 국민을 억압하던 이승만 정부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의 새 역사를 열었다.'(법문사)
'4·19 혁명은 독재 정권을 타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지학사)
'유신 체제는 박정희의 종신 집권을 실현시키고 대통령의 권한을 비정상적으로 강화하여 민주주의를 기만한 권위주의적 독재 체제였다.'(미래엔 컬처그룹)
'6월 민주 항쟁의 영향으로 민주주의는 점진적으로 진전되어 나갔다.'(천재교육)
'민주화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이 행동으로 옮겨지면서 정치적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평화적인 정권 교체의 전통을 이어 가고 있다.'(비상교육)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민주주의가 성장하면서 다양한 대중문화가 발달하였다.'(삼화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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