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날 시 쓰는 녀석들도 아니고,
일년에 이렇게 한 번씩 써 보는 걸까?
아니면 혼자서 쓰는 연습이라도 하는 걸까?
백일장 심사를 하느라
학생들이 낸 작품들을 읽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배운 것은 스타일로 가고
배우지 않은 것은
안개 속에 있구나
그래도 재미있는 작품이 있어서 올려 놓고
평을 붙여 둔다.
혹시 다른 의견이 있으면 댓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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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빈 맥주캔을 쓰레기통에 던져넣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
문득 눈에 먼지가 들어가
눈을 감고 양을 센다
- 송인혁, 성탄전야
송인혁의 ‘성탄전야’는, 내가 잘못 읽은 게 아니라면, 생각도 많이 했고 시적 표현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있다. 하지만 주제를 잘 드러내지 못해서 아쉽다. '먼지가 들어가'에 담으려고 했던 돌려말하기의 능청스러움은 '빈 맥주캔'이니 '천장을 바라보다' 같은 맥락 단서로도 잘 어울리지는 않는다. 보고 들은 게 있어서 들어온 거지, 발견은 아닌 셈이다. 하지만 '성탄전야'로부터 얻는 두 가지 주된 연상(예전 같았으면 하나겠지만, 문화가 되어 버리고 난 이 시대에는 명백히 둘이다.) 중 하나를 택하고 들어가서부터 '양을 센다'에 이르는 길은 가능성의 길이다. 말 아낄 줄 알고 저 알아듣겠지 하는 자신감도 있다. 앞서의 저 클리쉐를 어떻게 처리할꼬....
자신에 대한 배려, 시에 대한 배려, 독자에 대한 배려를 배우게 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둘.
너와 내가 처음 만난 그 날을 기억한다
내 몸 하나 상할까 네 품에서 날 떼어놓지 않았었다
나는 네게 엘리자베스
그래 나는 고귀한 엘리자베스
그렇게 나는 네게 길들여졌구나
그리고 지금 나는 네게 그저 화분처럼
그래서 너도 내게 화분처럼
너란 화분에 갇혀 나는 뿌리부터 시들어가누나
하지만 너는 날 잊지 않고
황혼의 바닷물을 나에게
그래 나도 널 잊지 않고
나는 엘리자베스 너의 고귀한 처녀 왕
그렇게 너의 손길을 기다리누나 그리고 난
- 이종삼, 화분
이종삼의 ‘화분’은 매우 익숙한 인식 프레임을 가지고 시를 쓴, 어떻게 보면 게으른 시다. 화분이라니, 그런데 '너'라니, 그런데 너에 대한 나의 관계라니!!!
그런데 착상이 재미있다. 엘리자베스가 우리의 관습적 인식에 따라 심상 속에 존재하게 되는 1연을 3연이 유쾌하게 배반을 했다. ‘처녀왕’을 거기서 찾아내었구나!
그래서 궁금타. ‘엘리자베스’가 먼저 머릿속에 있었던 걸까, 아니면 ‘화분’이 먼저 머릿속에 있었던 걸까?
그리고 나도 궁금타. 인식의 틀은 고루한데, 착상은 참신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내가 과잉해서 읽었단 말인가?
이러면 안 되는데.... 사진 찍을 시간도 없고....
'애플트리'라고 하는 수제화분을 만드는 카페에서 가져온 사진이다.
(http://cafe.daum.net/sowseedseed)
내 나름에는 두 작품에 어울리는 그림을 한 방에 해결하려고
고르고 고른 것이다. 문양도왠지 어울릴 듯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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