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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원문은 '한국독서학회' 홈페이지(http://www.reading.re.kr)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는 토론문만 올립니다.
토론문
안용순 선생님의 ‘선택과목 교과용 도서의 수준과 적합성 검토-문학교과서를 중심으로’에 대해
최지현(서원대학교)
토론자는 학교 현장이 교육 실천에 개입하는 너무 많고 다층적인 영향 요인들이 상호작용하는 장(場)이며 그러한 까닭에 도대체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게 만드는 대단히 복잡한 문제 공간이라는 인식에 동의한다. 어느 하나를 바로잡는 것으로 우리가 수행하는 교육이 의도했던, 혹은 기대하는 바람직한 궤도에 들어설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한때 교육과정을 제대로 틀 잡으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교과서를 제대로 만들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 적도 있었지만, 이러저러하게 애쓰며 지내오다 보니 교사가 되기도 전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문제는 교과용 학습서이다>라며 일갈(一喝)했던 때보다 더 비관적이게 되었다. 이쯤이면 문학교육학도 무용이고 문학교육도 무력한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주의에 빠질 법도 하다. 토론자에게 주어진 역할이 따로 있고 주어진 시간이라는 것도 10분이 되지 않기에 그 일부라도 지면에 옮기기 어려운 게 차라리 다행일 정도이다.
토론자가 보기에 발표자의 인식도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다. 발표자가 목도하고 있는 문학교육의 현실은 토론자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이런저런 요인들과 별로 겹치지 않으면서도 문학교육학자나 문학교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이런저런 요인들을 그대로 노출시킨다. 문제 풀이에 치중하는 교실, 작품을 읽지 않는 학생들, 관성화된 사고의 틀 속에서 지식을 주입하는 문학 수업, 또한 이를 강제하는 시험 제도, 문학교육과 문학 연구를 혼동하는 교사들과 이들을 그렇게 만드는 재교육 프로그램들……. 세 쪽에 걸친 삽화를 둘러보다 보면, 문학교육은 한마디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고 만다.
그런데 (토론자가 발표자에 대해, 그리고 발표자가 현실에 대해) 이렇게 단정 짓고 나면, 할 만한 일이 없어지고 만다. 당위로 돌아가는 것이 무슨 위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 현실은 무력하다는 인식을 강제하는데. 그래서 이 지점에서 토론자는 연대의 마음으로 자기 자신에게 취하는 한 가지 위안의 처방을 발표자께도 권해 본다. 미시계로 눈을 돌리는 방안이다. 어떤 구조적 모순도 작은 틈새로부터 균열이 시작되고 손쓸 수 없는 치명상도 작은 종기나 상처에서 비롯되는 법임을 인정하고, 뒤집어 놓고 보면, 해결의 실마리도 작은 단서 하나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대충 끝도 가늠이 안 되는 장기 레이스의 초반을 달리는 마음처럼. 초점화된 작은 문제는 만만하기도 하고 다룰 만도 하여, 조금은 마음의 위안거리가 되지 않을까.
문학교육의 현상 진단에 대해서는 대체로 발표자의 생각에 동의하는 편이지만, 다음 두 가지 의견에 대해서는 질문 겸 이의를 달아둘 필요를 느낀다. 이에 대한 고견을 밝혀 주셨으면 한다.
첫째, 어쩌면 이 표현이 지나치게 단정적일 수는 있겠는데, 발표자에게는 문학 없는 문학 수업을 야기하는 원죄는 문학 지식에 내재된 것처럼 보인다. 문학교육은 감수성의 교육이 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오히려 감수성을 억누르는 방향으로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역할로 문학 지식이 지목되고 있으니, 감수성과 지식의 균형 있는 상태를 상상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발표자가 문제 삼는, 문학 수업과 문학 연구가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도 이러한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다. 토론자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은 비유로 풀어본다. ‘모처럼 갈비를 먹으러 갈 때, 먹고자 하는 것은 갈빗살이며 먹게 되는 것도 갈빗살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갈빗살이라 하지 않고 갈비라고 한다. 때로 등뼈로 이어진 부위의 뼈와 살을 통칭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갈비뼈를 줄여 쓴 것으로 이해되는 이 이름은 뼈야말로 갈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외적 표지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갈비에 비해 갈빗살이 반값도 안 되는 것은 뼈가 나머지 반값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뼈가 없고서는 갈빗살이 어디 부위에서 왔는지를 확인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뼈는 살을 위해 존재하는 ‘도넛의 빈 공간’ 같은 것이다. 토론자는 문학 지식도 이와 같다고 본다. 원하든 그렇지 않든, 인지하든 혹은 무의식적이든 간에 지식은 문학을 수용하는 틀이며 문학을 문학으로서 경험하게 하는 형식이다. 만약 지식을 정도의 문제로서 다룬다면, 얼마든지 동의할 수 있다. “자, 여기 갈비가 있다. 갈빗대가 보이지? 거기 붙은 살들을 맛나게 즐겨라.” 그런데 막상 뜯어먹을 갈빗살이 얼마 없다면, 잠시 실망을 하고서는 좀 더 실하게 살이 붙어 있는 갈빗대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편적인 지식’ 같은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 그 자체가 문제라고 여긴다면, 거기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이를테면 (발표자의 생각과는 달리) ‘전문적인 비평 용어’는 그것과 대응하는 용어, 예컨대 ‘상식화된 문학 용어’를 떠올려본다면 배제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적정 수준에서 정확하게 사용해야 할 대상으로서 명명된 것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삼각형’이 학문적 전문 용어로서 수학 교실에서 사용되듯이 ‘시점’, ‘초점화’, ‘내적 독백’이 그러해야 하는 것처럼. 그렇다면 혹시 교사들이 문학 연구하듯 문학을 다루어서 문학교육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문학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닐지 의심해 본 적은 없는가. 그러니까 갈빗살을 내어놓고 갈비라고 눙치거나 갈빗대만 가져다주고는 뜯어먹으라고 하는 일 같다면.
둘째, 발표문의 후반부에서 발표자는 문학 교과서가 갖추어야 할 요건에 대한 의견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 내용과 관련해서는 ‘학생들에게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 곧 학생들이 선호하는 문학 작품을 실어야 하며, 학생의 학습 주기에 맞게 가르쳐야 할 만한 작품을 담아야 하고, 내용 요소에서 꼭 가르쳐야 할 것들 담아야 한다고 밝혔다. 사실 발표자처럼 문학 교과서의 저자들도 좋은 교과서를 만들기 위해 고심하고 애를 썼을 것이다. 그 과정에는 제재 선택의 기준이나 내용 선정의 원칙 같은 것이 지침으로 설정되고 작용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내용’에 관해 고민했다면, 어떤 지침이 만들어졌을까? 내용 요소는 작품이 아닌, 교육과정에 기초해야 하며, 작품 선정은 재미에 앞서 교육적 필요에 근거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발표자가 주목하는 학습자의 요구와 교과서 저자들이 고민하는 학습자의 필요 사이에는 애당초 균형점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토론자는 발표자가 문학 교과서의 수준과 적합성을 검토하는 글에서 시종을 문학 수업으로 삼고 있는 까닭이 궁금하다. 혹시 그것은 문학 교과서는 본질적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문학 교과서가 문학교육의 성패를 결정할 본질적 문제이긴 하나,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와 버렸으니 차라리 뒷일을 도모하는 게 낫다고 보기 때문인가? 혹시 발표문의 문제의식을 어느 정도 수용하거나 해소할 문학교육 적합성의 질적 판별 준거점을 12종 문학 교과서에 대입시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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