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캐나다 방문 교수 시절인 2004년 5월 22일 리테두넷(litedu.net)에 올린 글입니다. 플랫폼 변경으로 인해 옮겨 놓았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영어를 쓰는 외국에 나왔는데, 영어 능력은 좀 늘어야 쓰지 않겠나 싶었어요. 해서 커뮤니티 센터에서 하는 수업에 나가고 있는데, 오랜만에 해 보는 '학생노릇'이라서 그런지 예습하기는 싫고 창피해지는 것도 싫은 묘한 감정을 다시 느끼고 있답니다.
등급 올라가는 재미는.... 미처 제대로 느껴 보지도 못하고 귀국하게 생겼어요. 좀 일찍 시작했더라면 하는 후회도 되지만, 뭐 어쩌겠어요. 처음 여섯 달 동안은 정말 귀국해 버릴까 할 정도로 바빴으니...
하여튼, 여하튼.
이번 주에는 분위기도 바꿀 겸 해서 인스트럭터랑, 서브인스트럭터(요즘 실습 나와 있거든요.)랑, 동무들이랑 Alma St와 4th Ave에 있는 Cuppa Joe Coffee에 들렀어요. 내가 저녁반이니까 저녁 시간에 간 거지요. 왜 여길 갔냐. 여기가 conversation cafe라는 곳이라나.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어 된다는 대답을 들었으니, 이곳 사진은 내일쯤 올리고...(사진 올렸음 ^^)
이 커피숍 정말 운치 있지 않습니까? 꼭 80년대 인사동 찻집 같은 분위기예요. 지나치게 무겁지도 않고 지나치게 가볍지도 않고 지나치게 유행을 따르는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완고한 것도 아니고, 약간은 허술하고 약간은 히피문화적인 곳입니다. 술병이 있을 만한 대부분의 공간을 각종 찻병과 상자들이 채우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대충 여덟 명 정도의 사람이 만들어지면, 한 테이블에 모여 앉습니다. 물론 아는 사람도 개중에 있겠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모이는 게 원래의 취지라나.... 대화는 60분에서 90분 정도 진행되는데, 그날은 두 시간 넘게 진행되었지요.(집에까지 모셔드리는 보스니아 출신 할아버지가 피로하신지 먼저 일어나시기에 나는 그쯤으로 자리를 정리했습니다.) 대화 주제는 자유롭습니다.
대화를 시작하고 매듭짓기 위한 세 번의 라운드가 있는데, 각 라운드(돌아가며 말하기)는 이렇습니다.
첫 번째 라운드 : 이야깃거리에 관해 각자 간단히 자기 생각을 밝히는데, 여기에 다른 사람이 토를 달거나 그에 대해 답변하지는 않습니다.
두 번째 라운드 : 대화 순서에 따라 일순을 했으면 다시 한 번 그 주제로 각자 순서에 따라 이야기를 합니다. 이때에도 역시 토 달면 안 되요.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심화시키거나 혹은 자신의 이야기에서 의미 있는 부분을 좀더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밝히는 말하기를 하지요.
세 번째 라운드 : 대화가 끝나면, 각 사람은 간단히 대화에서 어떤 내용이 의미 있었는지 밝히는 시간을 갖지요.
그리고 대화가 핵심이 되겠네요. 열린 마음으로 진지하고 신실하게 말해야 하겠지요. 그리고 그걸 지켜주기 위해 'talking object'를 사용합니다. 내가 있던 테이블에서는 지구본 모양의 작은 고무공이 사용되었어요. 그걸 가진 사람만이 말할 수 있으니까, 적어도 한 번에 한 사람이 말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뭔가를 강제하려는 분위기가 있거나 논란이 벌어지거나 초점에서 벗어난 대화가 이루어질 때에는 이놈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여기 그 자리에서 가져온 조그만 양면 카드가 있어요. 위에서 한 말들이 그대로 들어 있지요?
Conversation Cafe 카드의 앞면
이 날 자리에는 내 동무이기도 한 Elina와 처음 보는 Kaisa, Malgo, Rob, Susan, Mark, 그리고 'J'ay라고 잘 생긴 한국인(그는 여러 번 가르쳐 줘도 캐나디언들이 잘 발음 못하는 걸 깨달은 탓인지, 웬만하면 You may call me 'J'라고 지레 자기 소개를 해 버리지요.), 이렇게 앉아 있었습니다. 화제는 '정치'였습니다. 이런! 정치라면, 한국인들이 특히 말할거리가 많은 소재이지요. 헌데, 주된 얘기가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의회와 연방 의회에 관한 것이라서 모르는 사람 얘기들을 하고 있으니, 갑갑하데요. 두 번째 라운드까지는 어찌해서 가고, '대화'의 시간이 되니 말할 기회가 좀처럼 생기지 않더군요. 그래도 메모로 적어둔 건 많았...
이 경험에서 배운 것 여러 가지.
1. 나는 카페의 세 가지 용법에 대해 알고 있었지요. 첫째는 근대 초기 퇴락한 귀족들과 성장한 시민 계급 사이에서 '인텔리겐차'를 보육하고 그들의 횡적 연대를 만드는 데 주요하게 기여한 커뮤니케이션 공간이지요. 둘째는 400원짜리 커피 팔던 다방을 몰아내고, 대학생들을 계급적으로 분화시키며 등장한 500원짜리 고급 커피점의 일반 명사이지요.(1984년) 셋쨰는 중년, 혹은 노년 초입새의 남성들을 후려 그들이 왜곡된 남성성을 소비하게 만들던 찻집의 별칭이지요. 이제 한 가지 용법을 더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전히 나는 어휘 학습 중.
2. 담소 카페라... 이건 한 세기 동안 끊어졌던 전통 아니겠습니까? 전통을 잇는다는 것의 의미. 이것은 어찌 보면 의도적인 의고적 행위일 수도 있고, 따라서 근세 초기에 카페 문화가 가졌던 것 같은 무슨 담소의 힘을 발휘하기는 어려운, 말 그대로 담소를 나누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달리 보면, 이것은 매스미디어에 의해 극도로 위축되어 버린 사적 영역의 대화 문화를 회복시키는 시도로 읽힐 수도 있겠습니다.
3. 누군가가 호스트가 되기는 하지만, 카페 주인이나 주인 친구가 그걸 관장하는 건 아닙니다. 자발적인 호스트가 담소 모임을 주관했습니다. 아마도 Conversation Cafe의 회원인가 봅니다.
Conversation Cafe의 홈페이지
아래 사진의 여점원에게 물어 봤더니, 이 conversation cafe는 Cuppa Joe Coffee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Cuppa Joe에서 열리는 정기적 행사이군요. 위의 카드도 자체적으로 비치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4. 배제하기... 사람마다 말하는 포즈와 포스가 다르지요. 그건 어느 언어로 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런데 막상 대화에서 자발적 관전 상태가 되어 가니까, 왜 이런 일이 생기나 분석하게 되더라구요. 왜냐하면 나도 대화에 끼려고 정리하고 메모도 하고 했으니까, 이게 무슨 수줍음이나 언어 능력 때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우선 대화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국지적인 화제였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화제의 이방인이라고 생각했나 보지요. 대화를 주도한 Rob과 Mark에 눈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 증거 1. Elina는 Canadian Studies를 전공한 일본인 유학생인데요. 그걸 밝혔더니, Rob은 유난히 그녀와 눈을 마추며 이야기를 하더군요. 당연히 '이게 네 공부에 도움이 될 거다' 이런 말도 포함시키고 말입니다. 이게 증거 2. 아... 으....
그럼 두 번째 라운드까지는 어떻게 갔느냐구요?
모임에 나가기 직전에 CNN에서 비극적인, 그리고 마땅히 분노해야 할 참사에 관해 보도하는 걸 보았더랬습니다. 이라크의 한 결혼식장에서 벌어진 일인데, 중동에서는 곧잘 경사날 허공을 향해 총을 쏘잖아요. 그걸 미군 핼기가 자기들 공격한다고 생각하고는 폭탄을 투하했다는군요. 신랑, 신부 모두 죽고 하객들도 많이들 죽었으니, 최대의 경사날 최악의 참사가 벌어진 것이지요. 어째 미국은 하는 짓이 맨날 이런지 모르겠네. ... 생각의 차이, 관습과 문화를 다르게 만들어내는 생각의 차이가 정치적 문제를 야기하지요. 뭐, 이런 얘기를 했지요.
두 번째 라운드에서는 캐나다가 복합문화주의사회로 알려져 있고, 그걸로 자부심을 느끼고 있지만, 내가 보기엔 아직 아니다. 소수민족의 정체성을 존중하고 다원성과 조화를 중시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분명히 드러나고 있지만, 속내를 보면 미국과 닮아가고 있는 경향이 보인다.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예가 있는데 초중등학교에서 학생들은 필수적으로(5~8학년), 그리고 선택적으로(9~12학년) 영어 외의 다른 언어를 택하게 되어 있고 이 제이언어에는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푼자비어(인도어), 중국어, 일본어 등이 있는데, 대부분의 학부모가 프랑스어를 선호하기 때문에, 그리고 대부분의 학교가 자동적으로 프랑스어를 선택하게 하므로, 실제로는 제이언어의 다양한 선택이 극히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런 경우, 획일성은 누군가 관리나 지배의 차원에서 강제한다기보다 이익을 추구하는 자발성에 기초하여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이것도 정치적 획일주의의 문제다...라고 말했지요.
아... 배제될 만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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