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이해는 언제나 해석학적 접근의 문제의식과 만난다. 이와 관련하여 나의 관점은 ‘문학적 이해’(혹은 ‘예술적 이해’)가 작품에 의미의 객관적 기반을 둔다고 보는 허쉬(Hirsch, E.D. 1988)의 관점과는 거리를 둔다. 해석의 타당한 근거를 마련해 두고자 했던 허쉬는 ‘의도의 오류’를 지적한 윔셋과 비어즐리(Wimsatt, W. K & Beardsley, C., 1972)와는 달리 역사적 변화에 영향 받지 않는 일종의 이상적 대상(eidos)으로서 의도를 설정하고, 이러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유일하게 바른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는 독자들이 서로 다른 조망에서 다른 이해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작품의 ‘의의(significance)’에 접근하는 것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내재된 ‘의미(meaning)’는 바뀌지 않는다고 본다. 이러한 개념 구분을 통해 그는 작품의 ‘이해’와 ‘해석’은 ‘의미’에 대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의미에 대한 설명인 해석이 독자에 따라 다른 경우라 하더라도 해석의 공통된 기반인 이해의 내용은 그대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처럼 이해에 대해 허쉬와 같은 접근을 취할 경우 해석의 타당성이 단일한 기원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 독자의 체험이 갖는 고유성이란 처음부터 제한되거나 부인될 수밖에 없게 된다.
또한 나의 관점은 시간성―자신의 맥락에서는 우연성(contingency)―의 토대 위에서 생기하는 이해에 주목한 가다머(Gadamer, Hans-Georg, 2000)의 해석학적 관점과도 거리를 둔다. 사변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객관주의에 반대했던 가다머는 이해를 텍스트의 의미를 파악해 가는 인식론적 과정으로 보는 대신 작가의 지평과 독자의 지평이 이른바 ‘지평 융합(fusion of horizons)’하는 존재론적 과정으로 본다. 이를 통해 이해란 객관적인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주관적인 것도 아닌 상호작용적인 것으로 평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의 보편성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은 독자의 지평이 일종의 선이해, 혹은 선입견으로부터 형성되며 이것이 ‘해석학적 순환’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가다머에게서는 이 순환이 방법적 가능성을 열어준다기보다는 존재론적 정당화를 이끌어간다. 말하자면 이해는 인식론적 주제로서보다는 존재론적 주제로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그는 언어 자체가 그러한 생기의 존재 방식이 된다고 한다.) 이 점에서 보자면, 독자의 지평을 형성하는 선이해는 독자를 대체한다.(이는 그가 선이해를 참된 권위와 전통에서 온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미 존재하는 세계와 이미 존재하는 선이해의 우연하고 역사적인 만남 속에서 이해는 스스로 현현하게 된다. 그렇다면 누가 이해의 주체란 말인가.
이해의 상호작용적 조건이나 선이해의 긍정 등에 대한 가다머의 견해는 문학적 이해에 대한 나의 관점과 상당 부분 상통한다. 하지만 나는 이해의 방법론에 근본적으로 무관심한 가다머와는 달리 문학적 이해에 대해 인식론적 접근을 취해야 할 위치에 있다. 이는 내가 문학교육연구에 종사하고 있는 한 내게 부여된 실천 과제이기도 하다.
(20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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