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에서 시에 관한 정의를 찾아 읽다 보면 종종 시의 정의가 서구의 것에 의존하고 있다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 논의에서는 詩의 어원을 살펴 시경이나 그밖의 고문의 풀이를 인용하는 장면도 함께 보여 준다. 이식되거나 임차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려는 의도야 좋고 나쁘고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것도 죽어 이미 완료된 상태로 있지 않는 한 변해야 하고 변할 수밖에 없는 게 이치인데, 시라고 옛것이 그대로 남아 있을 리 만무하다. Poetica(아리스토텔레스)의 Poesis가 지금의 시와 같지가 않고 詩經(공자)의 詩가 또한 그 모습으로 지금 남아 있지 않다. 그러니 남의 정의를 가져다 쓰는 것에 부동의하여 옛것을 들추는 것이나 결국 남의 것으로 남의 것을 빌어온 것이라 책하는 것도 그다지 좋은 비판 전략은 아닌 듯하다. 시론들이 시의 정의에 이렇게 대처하는 것은 시에 대해 좀 더 근본적인 성찰을 하겠다는 뜻이 있을 터인데, 그렇다면 오히려 접근은 '시가 무엇인가' 하고 물으며 시작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왜 이것에 '시(詩)'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는가' 하고 묻고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내가 왕년에 말이야' 하는 제스추어가 필요한 게 아니라 '내 아버지는 누구인가' 하는 포즈가 필요한 것 말이다.
(2021.03.12)
굵은 표시의 질문은 시의 정의에 필요한 것은 본질론이 아니라 계보학이라는, 그것도 계보의 추적이라기보다는 계보의 창조에 초점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시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 하는 것은 시를 공부하거나 시를 업으로 삼거나 간에 각자의 관심에 따를 것이다. 적어도 시의 정의와 자신의 관심은 일치시켜야 하겠지만.... 참고로 내 경우는 '시는 상상적 체험을 어느 한 시점의 특정한 공간 속으로 응축시켜 표현해 낸 율동적 문학 양식이다.' 정도의 정의를 취하고 있다. 오늘이고 내일이고 이 정의는 바뀔 수 있다. 때때로 새로운 시들을 대하고 있고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정의에는 작자와 독자가 상상적 체험으로 교감할 수 있게 하는 언어 형식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형식의 형상적 특성은 한 시점의 특정한 상상적 공간의 구도 속에 응축되는 이른바 주제적 심상, 혹은 시상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대표된다는 관점도 함께 있는 셈이다.
시에 대한 이러한 규정이 모든 시를 포괄할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이다. 선험적 관념들을 요소로 하는 집합 관념이 정의되는 경우에도 논리적으로 그 둘의 관계가 남김없이 대응된다고 보기 어려울 것인데*, 시의 정의에 완전한 포괄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당장 나의 정의에서 '율동적 형식'을 '시상의 응축'으로 풀었을 때 산문시나 근대 서사시는 설명할 수 있겠지만 구체시에 대해서는 난감함이 있다. 정의를 축자적으로 이해하는 편이 오히려 구체시를 더 잘 설명할 수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 축자적 이해에서는 산문시나 더 나아가 근대 서사시를 설명하는 게 불편하다. 산문시의 율동성을 시어들의 배열을 근거로 설명하는 게 얼마나 옹색한지는 여러분의 패션 감각을 분자 단위로 쪼개어 변명하는 것으로는 '척 보니 패션 테러다'라는 총평을 극복해 내지 못한다는 지극한 상식에 비추어 보더라도 분명하다.
(2021.03.13)
* 예컨대 '숭고미', '우아미', '고상미', '매력미', '장식미' 같은 선험적 미 관념들을 요소로 하는 '미'라는 집합 관념을 생각해 보자.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 지향적이고 선망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안에 포함되는 모든 미의 요소들이 포괄될 수 있을 것이다. 선험적으로 그렇게 규정해 두었으니까. 그런데 뜬금없이 '풍자미'니, '골계미'니, 심지어 '기괴미'니 하는 것들이 '미'의 숨겨진 식구들이라며 인정 투쟁을 벌인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경험 세계뿐 아니라 우리의 관념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고 따라서 미 의식도 변하기 때문이다. 관념도 고정되어 있지 않으니 어떤 정의가 완전한 안정성을 구가하면서 대상을 규정할 수 있겠는가. 시의 정의가, 나아가 문학에 관한 모든 정의가, 나아가 우리가 시도하는 모든 대상에 대한 정의가 결정되어 있을 수는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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