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독서 교육이란 무엇인가?
최지현(서원대학교)
1. 최초의 문학 독서 교육, 거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아마도 우리가 경험했거나 목격했던 최초의 독서교육은 문학 독서 교육일 것이다. 철자 읽기를 독서라는 범주에서 빼고 나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그림책 읽기를 문학 독서라고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문학 독서 교육의 첫 양상이라 할 만한 것은 대개의 가정에서 엄마의 목소리에 얹혀 시작되는 그림책 읽기이며, 생애 첫 문학 독서 교사―우리는 이를 달리 ‘문학 교사’라고 부른다.―는 짐작한 대로 엄마인 셈이다.
독서 교육에 대해서는 제대로 배운 적도 없었을 텐데, 엄마는 과감무쌍하게 아이에게 문학 독서 교육을 시도한다. 그리고 아이는 신통방통하게도 그 교육을 잘 따라가며 독서에 입문한다. 조기 교육으로 이루어지는 문학 독서 교육의 중요한 기능은 우리가 보통 초기 독서 교육에서 강조하는 것과 같은 문자 해독 같은 기초 문식성 습득은 아니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독서 교육이라고는 하지만, 아이는 아직도 글을 모르고 엄마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며 그냥 그림책을 읽는다. 아니 ‘말한다’라고 해야 더 적당할 것이다. 글도 모르고 듣고 가르치는 법도 모르며 읽거나 혹은 말하는 이 과정은, 그런데 초기 독서 교육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그것은 인간이 어린 나이에 습득해야 할 몇 가지 기초적인 능력들 중 하나인 공감과 상상 능력을 형성하게 하는 것이다.
공감 및 상상이 인간의 사회적 삶에서, 그리고 넓게 보자면,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새삼 강조하지 않아도 족할 것이다. 어릴 적의 그림책, 동화책 들은 물활적인 세계, 다시 말해 모든 것이 생명을 가진 채 교감하고 있다는, 그것도 ‘나’와 똑같은 기능과 특성과 가치를 지닌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 세계를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초기 문학 독서는 아이로 하여금 그 세계를 접하면서 자신과 다른 존재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느끼고 생각하고 반응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존재들이 모두가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고 반응하는 것들에 대해 말을 해 준다는 것이다. 아이는 경이에 가득 차 엄마의 입을 통해 들려지는 이 세계를 수용하면서 상상과 공감에 대해 배우게 된다.
어린 아기의 경험 세계는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경계 내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대문 밖으로 나서는 중대한 계기까지의 꽤 오랜 시간을 그는 그에게 무한 애정을 제공하는 가족 범위 내에서 언어의 전부를 습득한다. 물론 그 언어는 감정이라는 옷을 입고 구체성을 갖게 되며 경험 대상에 부합함으로써 실제성을 갖는다. 그런데 대문 밖으로 나설 수 있게 되면서 세상은 근본적으로 달라져 버린다. 새로 접하게 되는 언어는 기호로서만 공중을 떠돈다. 어떤 말의 주인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그 말을 쓰는지, 어떤 대상에 의탁하여 의미를 형성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아이는 언어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때 아이를 구원해 주는 것이 상상적으로 접하게 되는 또 다른 세계, 곧 그림책이나 동화책의 세계이다. 그 무렵 그 세계에는 마찬가지로 경험하지 못하던 새로운 언어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인물들이 아이 앞으로 쏟아져 나온다. 이들은 아이를 만나자마자 친숙한 존재들이 된다. 무엇에 의해? 엄마의 입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지는 문학 독서를 통해.
2. 문학 독서 교육은 선행하는 경험과 지식이 요구되는 교육이다
문학 독서는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를 통해 대리되기도 한다. 하지만 만져지고 조절되고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아이에게 문학 독서는 대체될 대상은 아니다. 우리가 온전히 문학 독서에만 집중하여 이 시기의 독서가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문학 독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장차 성인으로서 사회 속에서 살아갈 때 결여되어서는 안 되는 공감 및 상상력을 갖게 해 주는 매우 소중한 학습의 경험이 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최초의 독서교육으로서 문학 독서 교육이 갖는 의미를 정리해 보자. 최초의 문학 독서 교육은 철자를 익히게 해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보면, 최초의 문학 독서 교육은 그림과 더 어울리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독서의 내적 과정으로 보면, 문학 독서 교육은 ‘이해’에 이르게 하는 매우 정직하고 정확한 길을 가지고 있다. 이해라는 과정이 크게 의도의 파악이라는 측면과 상황의 파악이라는 두 측면을 가지고 있음에 주목하라.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대신 읽어 주는 엄마의 말은 어조나 논평적 개입 등을 통해 분위기나 정서, 의도 등을 짐작하게 해 주는데, 이는 아이에게 어떤 장면에서 자동적으로 활성화되는 이해의 맥락을 형성해 준다.
예컨대, 아기 돼지 삼 형제가 자기 집을 짓겠다고 엄마 곁을 떠나 집을 나서는 장면을 대하면, 그 장면에 등장하는 자기 집이니 초가집, 나무집, 벽돌집 등이 어떤 재질이나 어떤 형태로 되어 있는지는 (이제 우리에게는 중요하지만) 오히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아기 돼지 삼 형제가 집을 나설 때, 엄마는 걱정이 가득한 어조로 집 나서는 장면을 이야기해 주며, 호기심과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을 것만 같은 표정과 태도로 아기 돼지들의 행동을 설명한다. 그때 아이는 (이제 우리들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개별 단어들의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말 속에 담긴 상황에 대한 이해를 받아들임으로써 단어들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그러니까 아이는 이때의 독서 교육을 통해 문자를 해독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범주적 사고를 익히게 되는 것이다.
이 시기의 문학 독서 교육은, 말하자면, 새로운 언어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언어를 현실화하는 과정이다. 아는 게 없다면 문학 독서 교육은 학생을 도울 방법이 없다. 사실 나중에 우리가 경험하고 목격하게 될 일반적인 독서 교육에서도 문자 해독이 이미 알고 있는 언어를 확인하는 과정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독서 교육을 통한 진정한 언어 학습은 기호가 자율적인 힘을 갖게 되는 시점, 그 논리의 형식이 곧 의미가 되는 시점에 이를 때 가능해진다. 그 전까지, 그리고 그것과 독립하여 문학 독서 교육은 필수적으로 이미 경험하고 지식으로 갖추고 있는 것들에 의지한다. 이것은 좀 우습지 않은가? 우리는 학교에 입학한 이래로 생전 듣도 보도 못했던 작품을 처음 읽어가는 경험을 십 년 가까이 하고 졸업을 하는데, 문학 독서 교육은 그 교육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그 이전에 배웠던, 또 교육 밖에서 익힌 경험과 지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3. 문학 독서 교육은 체험하지 않고서는 실현되지 않는 교육이다
우리는 흔히 문학 독서를 체험에 바탕을 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일반적인 독서에서도 왕왕 그러하거니와, 문학 독서는 작품 읽기 과정에 구상적 상상(具象的 想像)이 작동하게 되며, 또한 그러한 상상이 작동할 때에라야 문학 독서로서 고유한 특성이 실현된다는 말이다. 작품 세계는 말 그대로 하나의 세계이며, 이렇게 ‘세계’라고 우리가 부르게 되는 대상은 적어도 그 순간에는 ‘글’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세계는 이해되기 위해서는 ‘읽혀져야’ 하지만 그 방식은 ‘체험’이 될 수밖에 없다.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읽고 있는 상황을 상정해 보자. 이 작품은 우리 눈에는 틀림없는 글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니 글이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일반적인 의미 구조에 기대어 우리는 이 작품에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또한 우리는 이 작품이 (경험한 사실을 기록했든, 혹은 허구적 사건에 바탕했든 간에) 상상된 세계라는 것에도 동의한다. 그리고 우리는 세계란 멀찍이서 관찰해서는 이해할 수 없고 오직 그곳으로 들어가서 그곳 사람들과 어울려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그러한 까닭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의 집 건넌방’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상상적 세계는, 일단 아무 말 하지 말고 그 방으로 들어섬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는 목수네 집 헌 살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로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 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러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 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석 아니라 그 누구도 될 수는 있지만 굳이 백석이 아니라고 할 이유도 없으니, 저기 ‘나’라고 스스로를 지칭하는 존재를 편하게 백석 자신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것은 저 외진 곳에서 편지 한 장으로 세상과 아슬아슬 이어지고 있는 백석이라는 존재와 그의 시를 이해하는 가장 빠른 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되어 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 세 가지는 갖추어져 있어야 하지 않은가? 곧 그와 같이 생각하고, 그와 같이 행동하며, 그와 같은 모습을 갖는 것.
그러니까 우선 우리는 먼저 그의 몸을 입어야 한다. 처지를 바꾸면 생각이 달라지기 마련이라는 점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가 결코 쉬운 일이 될 수는 없겠지만, 바로 그 점에서, 내 생각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는 다른 누군가가 되기란 어렵다는 것이,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나의 삶의 조건과 배경과 관계들을 그에 맞게 상상적으로 바꾸어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함이 분명해진다. 그러니까 그의 몸을 입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어떤 배경과 조건 속에서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관계들을 형성하며 살아왔는지를 알고 이해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그의 몸이 보이는 반응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니까 작품 세계 속의 그를 살아있는 존재로서 대리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그 누군가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떻게 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는가? 여기서 몸의 반응은 객관화되는 어떤 사태, 다시 말해 ‘어디를 갔다’거나 ‘무엇을 했다’ 같이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몸이 일련의 사태를 겪을 때 발생하는 심리적 과정이 몸의 반응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체험이라 부르며, 정서 표현을 통해 드러난다고 규정한다. 그러니까 작품 세계 속에서 누군가가 된다는 것은 ‘글’에 표상된 정서 표현을 통해 몸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들을 바탕으로 우리는 그의 생각을 알아 가야 한다. 그의 생각은 그의 몸과 그 몸이 느끼는 감정들이 만들어낸 것이지만, 더 직접적으로는 그의 과거가 만들어낸 것이며 그 과거가 현재 속에 존재하는 방식인 ‘기억’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생각을 안다는 것은 그의 말들 속에 담긴 기억의 흔적들을 함께 안다는 것을 말한다. 작품 세계 속에서 누군가가 된다는 것은 그 세계를 있게 하는 ‘글’(텍스트)을 읽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며, 반드시 그 ‘글’이 있게 된 맥락들을 함께 읽을 것을 요구한다.
이처럼 문학 독서를 한다는 것은 작품 세계의 누군가가 되어 그와 같은 처지를 겪고, 그와 같이 행동하며, 그와 같이 느끼고, 그와 같이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작품 세계를 체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그 누군가는 시인이나 작가일 필요는 없다. 작품 속 그 누구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작품 속에 지칭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세계 속에 존재할 만한 모든 인물들이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문학 독서는 매우 다양한 경로를 갖는다.
이제 문제는 이러한 과정이 교육의 장면 속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문학 독서 교육은 문학 독서를 가능하게 하는 교육일 뿐 아니라 문학 독서를 통해 실현되는 교육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까닭에, 문학 독서가 이루어지는 조건과 방식이 문학 독서 교육에 그대로 요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학 독서 교육을 담당할 교사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도 분명할 것이다.
4. 문학 독서 교육에서는 교사의 역할이 특별히 중요하다
문학 독서 교육을 담당할 교사, 곧 문학 교사는 작품 읽기의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 그는 문학 작품이 읽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하며 이를 통해 작품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런데 그 길이란, 대개 함께 들어서는 크고 넓은 길이 있기는 하지만, 결코 유일하지도 않을뿐더러 유일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 길 끝에 열려질 작품 세계는 짐작할 수는 있지만 판단할 수는 없다. 이렇게 본다면, 문학 교사는 작품을 함께 읽고, 단어들을 가늠하고, 단어들이 만들어내는 리듬이나 분위기, 상황 등을 파악하게 한 다음,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거나, 아니면 학생들과 함께 그 길에 들어서야 한다.
기억을 돌이켜보면, 우리는 바로 그 길 앞까지는 의미의 절대적 판결자가 되어 학생들을 이끌다가 그 다음부터는 더 이상 아무것도 (표면적으로는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할 수 없었던 교사들을 많이 보아왔다. 길이 끝나자 여행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길이 열리자 여행을 중단한 문학 수업에서 학생들은 과연 문학 독서를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문학 독서는 실패했으리라. 문학 독서를 위해서는 상상적 체험이 불가피하니까.
문학 독서 교육에서 교사의 역할이 중요한 까닭을 그가 체험의 안내자여야 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으로 대신하지 말자. 안내자로서는 문학 독서가 실현되지 못한다. 문학 독서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계기는 학생이 작품 세계의 어떤 인물이 되고 나서부터 벌어지는 사태들 속에 있다. 거기에 교육적 발달의 계기가 자리 잡고 있고, 문학적 체험의 정체성이 자리 잡고 있다. 일반적으로 일정한 정체성을 가지고 작품 세계를 체험하기란 작품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인물 정보가 가장 풍부한 화자에 의탁하는 것이 가장 수월하다. 그렇게 본다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 독자는 화자에 의탁하여 다른 경우에 비해 용이하고 풍성한 체험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막상 학생들이 그것을 시도하려 할 때, 그들은 1930년대 어느 해 겨울 평안도 신의주 한 구석진 고을에 가족도 다 잃고 방황하다 잠시 어느 목수의 집 방 한 칸을 얻어 머물며 시름과 회한에 가득 찬 채 회상에 젖고 있는 한 남자의 삶의 배경과 조건과 관계가 결코 용이하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심지어는 편지를 암시하는 것 같은 작품의 제목도 그들에게는 낯설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이메일도 이제 소원해지고 ‘카톡’ 같은 즉석 교신(instant messaging)의 연결망에 목메고 있는 중이다.
가장 쉬운 접근에 실패했을 때, 그들이 택할 수 있는 문학 독서의 길은 무엇이 남아 있을까? 주위에 아무도 의지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의식은 학생들에게 항용 있을 만한 심리 상태라고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자기 자신을 데려다 놓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 결과 어쩔 수 없이 학생들이 화자의 말을 짐짓 모르는 척 듣고 있는 청자에 의탁하여 작품 세계 안으로 들어서려고 할 때, 그때가 문학 독서 교육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된다. 이제 문학 독서는 실현될 수도 있고 좌절될 수도 있다. 교사는 정말 그 청자가 화자의 말을 이해하고 있는 청자인지, 이해하려 하고는 있는 청자인지, 혹은 이해할 수 있기나 한 청자인 건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청자는 적어도 화자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서는 어떤 구체성도 가지고 있지 못한 ‘미지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교사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의 독자가 청자라는 개념이 아닌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인격체로서 작품 속에 존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화자가 될 수 없다면 화자를 이해해 줄 수 있을 만한 청자가 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일은 작품 세계 밖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문학 교사가 문학 독서 교육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며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지 그려보게 된다. 그는 학생들의 체험을 독려하는 감독자가 아니라, 체험의 방 입구까지 데려다 주는 안내자가 아니라, 체험을 가상해 보여주는 시범자가 아니라, 함께 체험하는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그는 학생들과 함께 체험해야 한다. 그는 학생들과 같은 청자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학생들의 귓가에 목소리를 남기는 화자가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학생들의 상상적 체험 안에서 그는 ‘교사’로서가 아닌 ‘인격체’로서 경험되어야 한다.
이 과정은 그 자신의 체험을 통해 학생들의 체험과 만나다는 점에서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 교호적인 것이 된다. 달리 말해, 이 과정을 통해 교사는 학생들을 변화시킬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 자신도 변화될 수 있게 된다. 만약 이러한 변화가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긍정적이었다면, 함께 체험하게 되는 작품 세계의 폭과 깊이는 그만큼 확장되고 심화될 수 있으며 그 결과 작품에 대한 새로운 의미망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5. 하지만 가르칠 수 없어도 교육은 이루어진다
지금까지 이어온 이야기의 결론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전통적인 의미에서 ‘가르친다’는 것은 적어도 문학 독서 교육에서는 어쩌면 매우 제한적인 교수 행위일 수 있음을 노출시킨다는 것이다. 교사는 가르치는 것으로 학생들을 작품 세계의 입구까지 데려다 줄 수 있다. 그러고 나서부터 교사는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다. 그런데 교육적 의미의 진정한 발달은 그 다음부터, 곧 체험이 시작된 이후부터 작동한다. 그 길 앞에서 교사는 멈추어 버릴 수도 있고, 학생들과 함께 들어설 수도 있다. 그 다음 일에 대해서는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거기에는 완전히 몰입된 역할 놀이가 있다. 역할 놀이가 교육적 의도에서 설정된 것이라고 할 수는 있을지라도, 그 자체를 ‘가르친다’고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니, 우리는 이렇게 다시 규정한다 : 문학 독서는 가르칠 수 없다.
몸소 모범을 보여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함께 수행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게 한다. 가르치지 않아도 교육은 이루어질 수 있다. 가르칠 수 없어도 교육은 이루어질 수 있다. 다만 교사는 한층 더 어렵고 꾸준한 역할을 부여 받게 될 것이다. 작품 세계는 더 매력적이기 위해 준비가 필요하며, 교육이 이루어지는 시간은 더 오래 걸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그쯤은 넉넉히 해 냈던 문학 교사를 우리는 적어도 한 번은 만난 적이 있다. 우리는 그를 따라할 수도 있다, 이제 막 시도를 하려 한다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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