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4일에는 한국어교육학회가 주최하는 학술대회가 서울대학교에서 열렸다. 주제는 '국어교육에서의 창의인성교육의 방향'이었나? 불과 어제 일인데 잘 생각 나지 않는 것은 그 나름의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 글을 읽어 보면 안다.
참, 이 날 강원대 김풍기 선생님이 나 때문에 고생했다. 정확히는 그 전날 고생한 것이지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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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인성 교육의 의제 설정이 문학교육에 던지는 질문
최지현(서원대학교)
논의의 출발점
‘창의・인성 교육’이라는 교과부발 의제가 학술적 연구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에 앞서 ‘교과 교실제’, ‘블럭 타임제’ 같은 교실 변혁 요소들이 오래 전부터 이론적으로 제기된 학계의 의제였다가 2009년부터 정책 시행의 대상이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 정책이 사실은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반영된 신자유주의 교육 노선과 괘를 같이 하는 것일 거라고 이해했다. 아닌 게 아니라 2008~9년에 걸쳐 교육 분야에서는 크고 심각한 논란들이 적지 않게 있었고, 공교롭게도 그 논란들은 모두 새 정부의 교육 정책 기조로부터 발원하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이 있었기에 개정된 교육과정이 발표되고 ‘창의・인성 교육’이 전면에 등장했을 때, ‘창의・인성 교육’은 발표자에게 일종의 상황 논리처럼 보였다. 그 무렵 학교 폭력 문제는 다른 교육적 의제들을 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주제였고, 교육 당국으로서는 이에 대응해야 할 정책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창의・인성 교육 추진 방안」(2009)에서 이것이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이라고 전제하고 있을 때에조차 그것은 진지한 포즈라기보다는 일종의 정치적 제스처로 판단되었다. 그런데 어쩌면 실체 논쟁이 우선이어야 할 이 ‘의제’가 어느 틈엔가 가능성 모색을 전제로 한 학술적 대상이 된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발표자에게 이 의제 설정은 매우 합당해 보이지 않는다. 이미 현실이 되어 있고 게다가 대세가 되어 있지만, 뭔가 이상하다. 발표자에게는 한 개의 알약만 주어졌지만, 왠지 어딘가에 빨간 알약이 있을 것만 같다. 주어진 주제인 ‘문학교육에서 창의․인성의 방향과 내용’을 이 발표문의 제목처럼 바꾼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제 ‘창의・인성’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고, 이것이 개념화될 수 있는지, 교육적 내용을 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문학교육에 주는 시사는 무엇인지를 검토하기로 하겠다. 문제의 성격상 논의의 상당 부분에서 자문자답의 사고 과정을 그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 원천적으로 이 논의는 입증하기가 곤란하다. 새로운 결론이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비전은 이를 강제한다.
‘창의・인성 교육’의 등장 배경
‘창의・인성’은 2009년부터 공적 문서에 등장하지만, 연간 교육 시책이 아닌 상기한 ‘교육 패러다임’ 수준에서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교육과정적 근거를 만들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2009 개정 교육과정(2009.12.23.)은 이 일련의 상황들의 최초 시작점이 될 것이다. 그 단서가 2009 개정 교육과정의 ‘추구하는 인간상’이다.
추구하는 인간상 가. 전인적 성장의 기반 위에 개성의 발달과 진로를 개척하는 사람 나. 기초 능력의 바탕 위에 새로운 발상과 도전으로 창의성을 발휘하는 사람 다. 문화적 소양과 다원적 가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품격 있는 삶을 영위하는 사람 라. 세계와 소통하는 시민으로서 배려와 나눔의 정신으로 공동체 발전에 참여하는 사람 |
<표 1>의 항목으로 보면, ‘창의・인성’을 결합할 만한 단서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것은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다. 제7차 교육과정에서도 추구하는 인간상은 거의 같았다.
추구하는 인간상 가. 전인적 성장의 기반 위에 개성을 추구하는 사람 나. 기초 능력을 토대로 창의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 다. 폭넓은 교양을 바탕으로 진로를 개척하는 사람 라.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의 토대 위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 마. 민주 시민 의식을 기초로 공동체의 발전에 공헌하는 사람 |
다만 ‘추구하는 인간상’을 뒷받침하는 ‘교육과정 구성 방침’에서는 2009 개정 교육과정에 유의미한 변화가 나타났다. 첫 번째 항목으로 기술된 방침은 다음과 같다: “가. 배려와 나눔을 실천하는 창의적인 인재를 기를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구성한다.” 지향점으로 언급되어 있던 ‘창의’는 추상의 수준이 매우 구체화되어 창의 인재 개념이 도출된다. 이 창의 인재는 2009 개정 교육과정 이래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구체화된 인간상인 것이다. 하지만 2011년에 종료된 검정 과정까지는 창의 인재라거나 ‘창의・인성’에 관한 명시적인 언급은 없었다.
그런 까닭에 ‘창의・인성 교육’이라는 용어가 2009년 12월에 교과부에 의해 「창의・인성교육 기본방안」이 수립․확정되면서 처음 등장한 것에서, 적어도 처음에는 이 개념이 정책적 차원에서 추진된 것임을 짐작하게 된다. 이 용어는 그 다음해인 2010년 5월에는 제3차 교육개혁 대책회의를 통해 구체적인 내용과 방법, 평가 체제 등에 관한 방안이 보고되었고 곧이어 6월에 세부 실행 계획이 보고됨으로써 구체화되었다. 나아가 교육과학기술부는 2008년 9월에 한국과학문화재단을 확대 개편한 바 있는 한국과학창의재단을 특정연구기관육성법에 따라 특정연구기관으로 지정(2011년)하면서 본격적으로 창의・인성 교육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2009년에서 2011년에 이르는 시기는 이른바 ‘미래형’ 교육과정을 발표하고 논란 속에 고교 선택 교육과정을 급속히 추진하던 때였다. 고등학교 과학 및 수학 과목은 이 교육과정에 따라 이태 먼저 개발을 시작하여 완성하였으나 (거의) 쓰지도 못한 교과서를 폐기하고 새로 교과서를 만들어야 했으며, 국어과에서는 뒤늦게 확정된 교육과정을 가지고 변경된 선택 과목의 교과서를 마련해야 했다. 또한 사회적으로 이 무렵 대학 입학 사정관제가 확대 시행되고 있었으며, 대학 자율화와 국립대 법인화가 교과부에 의해 추진되고 있었다.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도 있었고, 교원 평가 제도, 학업 성취도 평가 전면 실시, 수능시험 공개, 학교 정보 공개, 영어 공교육 강화 같은 하나하나가 감당하기 쉽지 않은 의제들이었다. 이 와중에 추진된 정책이었기 때문에 개정 교육과정 초기에는 ‘창의・인성 교육’이 명시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2011년 발간된 교육과학기술부의 <초・중등학교 교육과정 개정 고시(제2011-361호, ‘11.08.09)에 따른 초・중등학교 교과용 도서 편찬상의 유의점 및 검정기준>(2011. 9.)에 오면, ‘Ⅰ. 편찬 방향, 공통 편찬상의 유의점 및 공통 검정기준’에 “창의・인성 교육에 적합한 현장・실생활 중심의 교과용 도서 개발”이라는 기본 방향이 제시된다. 즉, 2011년부터 ‘수정본’ 편찬 지침에 ‘창의・인성 교육’이 명문화된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창의・인성 교육’은 교육과학기술부가 내세우고 있는 것처럼 교육 패러다임의 변화나 교육과정적 기조의 변화 속에서 개념화된 것이 아니라 정책 방안으로 제기된 것이다. 일정한 계기마다 점진적으로 현 정부의 교육 브렌드화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 패러다임을 내세우는 것은 무엇일까?
‘창의・인성’의 개념적 접근
교육과정에서 창의성은 언제나 강조되어 온 인성 요인이었다. 어쩌면 창의성은 교육의 출발점이며 가능성을 뜻하는 것이기에 마땅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하기에 2009 개정 교육과정에서도 그간의 교육과정에 반복하여 ‘기초 능력의 바탕 위에 새로운 발상과 도전으로 창의성을 발휘하는 사람’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전제이자 교육될 내용으로 ‘기초 능력’을 꼽았다.
그런데 이 인성 요인에 앞서 제시된 인간상이 ‘전인적 성장의 기반 위에 개성의 발달과 진로를 개척하는 사람’이었으며, 여기서 방점은 저마다의 삶의 방향을 스스로 개척해 간다는 데 있지만 예의 창의성에서와 마찬가지로 교육은 ‘전인적 성장’에 두었던 점을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적어도 교육과정의 지향은 그간 전인 교육을 중시하며 전인성 내에 창의성을 자리 잡아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의・인성 교육’을 교육 정책으로 내세운 교과부의 공식 보고에서는 ‘기존의 학교교육으로는 이러한 창의적 인재양성에 한계’가 있다고 밝히고 창의교육이 과학・영재교육 등에만 국한되지 않고, 또한 인성교육도 기초 예절 교육 등에 머물지 않는 새로운 교육 내용과 방법, 평가 체계를 갖출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미루어 짐작하건대, 2007 개정 교육과정(2009 개정 시기)에 제기된 ‘창의・인성 교육’이란 교육과정상의 패러다임적 접근이 아닌 정책적 필요에서 제기된 명칭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이 정책이 학교 자율화, 고교 선택 과정, 입학 사정관 제도, 교육 내용 감축 등의 여타 정책들과 패키지가 되고 있는 것은 그 정책들을 ‘창의・인성 교육’의 실천 방안으로 삼겠다기보다는 ‘창의・인성 교육’이 이들 정책과 같은 기조 위에서 같은 목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추진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창의・인성 교육’의 개념은 무엇인가. 창의・인성은 기존의 창의성 개념과 어떤 질적 차이가 있는가. 한국과학창의재단이 운영하는 창의인성교육넷(http://www.crezone.net)에 따르면 ‘창의・인성 교육’은 창의성 교육과 인성 교육이 독자적인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유기적 결합을 통해 “올바른 인성과 도덕적 판단력을 구비한 창의적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교육철학 및 교육전략”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다음과 같은 좀 더 상세한 규정을 함께 밝혀 두고 있다.
창의・인성교육 정책은 성적 중심 입시위주 교육에서 창의성과 인성을 함양하는 교육의 본질을 추구하는 교육정책입니다.
좁게는 교과활동과 창의적 체험활동을 통한 창의성・인성 함양을 지원하며, 넓게는 이러한 학교교육활동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입시제도 개선, 평가제도 개선, 교육과정 개선, 진로교육 강화, 교과교실제 등 인프라 구축 등을 포함하는 교육정책으로 변화를 수용하고 미래를 개척하며 무한히 성장하는 인간을 양성하기 위해 추진되고 있습니다.
좁은 의미에서든, 혹은 넓은 의미에서든 ‘창의・인성 교육’은 개념적 실체라기보다는 캐치프레이즈화된 정책으로서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여기서 여타의 정책들이 과연 같은 지향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점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 정책들이 2009년 이후 학교 현장에 미친 영향만 놓고 보면, 창의성이나 인성을 강화하는 교육으로서의 면모는 보기 어렵다는 것이 합당한 판단일 것이다. 어쨌든 이 규정을 통해서도 ‘함께’라는 말 이상의 내재적 의미를 포착할 수 없다.
창의인성지원넷의 FAQ를 통해서는 다음과 같은 추가적인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정부의 창의·인성교육은 창의성 기법 적용 뿐 아니라 학생들의 창의적 사고를 유도하는 적절한 발문부터 팀 프로젝트 학습까지 수업을 통해 자연스럽게 창의성과 인성을 키워주는’, ‘교과활동 및 창의적 체험활동 속에서의 자연스러운 인성함양’, ‘숨어있는 교육과정을 통해 인성교육이 구현’, ‘21세기 창의성의 원천은 집단지성과 융합’ …… ‘즉, 인성이 바탕이 된 창의성’, ‘인성 교육도’ …… ‘창의적 문제해결력이 요구되는 도덕적 판단력이 필요’, ‘창의·인성교육이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은 아닙니다. 교육의 본질이자 교육의 목적입니다.’, ‘지식기반사회를 진취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교실 현장에서 실천되는 전인교육을 지향’ …… ‘다만, '획일화되기 쉬운 인성교육'에 창의성을 접목하고, '개인주의 성향이 짙은 창의성'에 협력과 배려 등이 접목’, ‘입학사정관제가’ …… ‘교과활동에서 프로젝트 학습을 시도하고, 창의적 체험활동을 통해 진로를 탐색하고, 다양하고 심화된 경험을 통해 실제 학생들의 역량을 높이는 활동’, ‘기본적인 지식과 학력을 바탕으로 창의성과 인성은 더 높은 수준으로 계발’ `…… ‘(학력 향상에도 창의·인성교육 방식이 통해요.)’
발췌 인용한 것이지만 이를 다시 요약하면, ‘창의・인성 교육’은 개념적으로는 개인주의적 성향의 창의성과 협력과 배려의 인성이 결합되도록 교과 교육과 창의적 체험 활동을 통해 교육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힌다. 기법적 차원이 아니라 교육 내용과 방법 차원에서 접근할 대상이라고 보고 있으며, 기초 학력의 바탕 위에서 더 높은 수준으로 계발할 수 있지만, 이 교육이 학력 향상에도 도움을 준다고 부연하고 있다.
문학교육에서 이를 수용하려면 일관되며 구체적인 단서가 제공되어야 할 것이나, 유감스럽게도 이 진술들에는 모순된 시각과 태도를 드러나 있다.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기존의 교육이 시대적 요구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등장한 교육이라고 밝히는 것이 그 한 예이다. 첨언해 둘 것은 이러한 공식적 설명에서뿐 아니라 다른 ‘창의・인성 교육’ 자료들에서도 창의성 교육에 결합되는 인성 교육의 방법과 지침은 대부분 ‘자연스럽게’, 혹은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는 점이다. 사실 이 문서가 밝히는 대로 기존의 인성 교육이 ‘획일화되기 쉬운’ 것이었다면 새로운 인성 교육은 다원화되어야 할 것이며, 이 경우 ‘어떠한’ 인성의 계발은 발양될지언정 육성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 의도하여 자연스럽게, 혹은 저절로 교육되게 한다고 썼을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드러난 진술로 보면, 창의성 교육은 구체적이고 세밀한 교수법적 접근이 가능한 반면, ‘협력과 배려’ 같은 인성에 대해서는 교수법적인 아이디어가 없는 것이다.
좀 더 물러서서 이를 살펴보면, ‘창의・인성 교육’은 창의성 교육을 드러나게 강조하면서 여기에 인성 교육을 포용하는 방식으로 개념화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러한 개념화의 기반에는 현 정부의 이른바 창조적 실용주의 교육 정책이 자리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정책은 과학기술계의 요구를 일차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문화관광부와는 달리 교유고과학기술부가) 교육・문화 지원 사업의 중심축을 과학기술계가 주도하도록 이동하는 과정에서 산출된 것으로 이해된다. 창의성 교육이 내용과 방법, 평가 등에 모두 걸쳐 있는 반면 인성 교육은 그 교육적 실체를 대하기 어려운 것도 같은 까닭이라고 본다.
한 걸음 더 물러서서 창의 인성은 과학기술계의 주요한 의제 중 하나였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유전자 공학 기술이나 동물 실험, 원자력 등 고위험 자원 개발 등이 제기하는 윤리적 문제들이 더 큰 사회적 책임감이나 도덕적 판단 능력을 요구하며 교육의 필요성을 높인다는 것은 이미 과학기술계에서도 주요한 의제이다. 김환석(2006)은 과학기술이 사회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는 오늘날을 ‘위험사회’라 부르면서 과학기술은 윤리의식과 책임성에 더 큰 의무를 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와 유사한 논의들이 과학기술계 안팎에서 일고 있었음을 우리는 추가로 확인할 수도 있다. 요컨대, ‘창의・인성 교육’은 과학교육의 전반적인 변화가 요구되기 시작한 20세기 후반 이후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여, 과학기술 중심으로 국가교육의 중심을 이동하던 현 정부에 일반화된 개념과 명제였다는 것이다.
‘창의・인성 교육’이라는 이름이 문학교육에 던지는 질문
문학교육 연구의 성과를 발표해야 할 이 자리의 대부분은 ‘창의・인성 교육’에 대한 의혹의 시선만 늘어놓은 것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이렇게 말을 했을 때, ‘책임감’은 발표자 자신이 확인하는 자기 정체성과 자기 의무에 대한 확인을 가리킨다. 발표자는 창의・인성이 문학교육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밝히고 문학교육이 이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밝혀야 한다. 그것은 발표자가 문학연구자이며, 학술대회에서 이 주제로 발표를 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발표자는 ‘창의・인성’이라는 불과 4, 5년 전까지만 해도 듣지 못했던 기묘한 조합의 개념에 대해 여전히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창의성과 인성은 어떤 관계인가? 대개 가운뎃점은 동등성에 기초한 관계 개념, 그러면서도 한몸처럼 이루어진 독립된 개념의 관계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교수・학습’처럼 상호 독립적이지만 서로 떨어져서는 제 의미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관계 개념에서 사용될 만한 관계 표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창의성과 인성은 이러한 관계 개념인가. 발표자가 이해하는 바, 창의성은 그 자체가 인성을 이루는 본질적 요소들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알게 되는, 홍길동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마땅히 할 수 있는 기본적인 가능성이다. 만약 이러한 인성에 초점화하는 것이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기에 여전히 부족하다고 여겨진다면, 인성 교육을 강화하면 된다. 왜냐하면 창의・인성은 개념적으로는 (창의적) 인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성에는 (도덕적) 인성도 있을 것이고, (의지적) 인성도 있을 것이며, (성격적) 인성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만약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인교육의 가치가 유효하다면 전인적 인성을 부각하면 될 것이고, 개정 교육과정은 인성 교육을 강화한 교육과정, 전인교육을 강화한 교육과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기대하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제시된 것은 ‘창의・인성 교육’이며, 그러한 까닭에 이 작명에 얽힌 사연은 작명이 뜻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이와 같은 까닭에서 ‘창의・인성 교육’은 문학교육에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실체가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본질적 과제가 되는 과학기술교육에서와는 달리, 문학교육에서는 창의성이나 인성 모두가 존재 조건이라는 점에서.
다만 이렇게 공적 의제가 되어 버렸을 때, 문학교육은 성찰의 기회를 얻게 되기도 한다.
먼저 ‘창의・인성 교육’ 덕분에 국어과의 여러 교과서들이 창의・인성 요소를 반영해야만 하게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 교과서 검정 기준은 기본 방향에서 ‘창의・인성 교육’을 드러내 놓았고, 2009 개정 교육과정 검정 교과서의 ‘편찬상의 유의점 및 검정기준’에서와 마찬가지로 범교과적 내용으로 창의・인성 교육을 포함시켰다. 명시된 38개의 내용 중 하나이지만, 사실은 성취기준보다 엄격히 지켜야 하는 필수 요소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문학 교과서에는 교과서에 필요한 여러 교수・학습 요소들과는 별개로 창의・인성 항목을 포함할 것이 분명해졌다. 이 항목은 말 그대로 교수・학습 과정과는 독립적으로 자리 잡게 될 가능성이 크다. 혹은 교수・학습의 흐름 속에 넣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교과서 저자들은 문학 작품으로부터 창의・인성 항목을 배려와 협력의 공동체 의식을 내용으로 추출하여 참신한 표현 활동을 수행하게 하는 방안을 모색할 것이다. 이것이 가져오는 결과는 무엇일까.
문학교육에서 창의성은 본질적인 요소로 여겨진다. 문학 작품을 매개로 한 상상적 체험은 독자 자신이 만들어내는 세계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즉, 작품이라는 대상화된 상태로 남아 있지 않고 작품 세계로서 작용하게 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창의적일 수밖에 없다. 문학교육이 그동안 창의적 교육 수행이 되지 못했다면, 그것은 체험에까지 이르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창의적인 교수 방법이나 학습 수단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런데 창의・인성 항목이 독립하게 되면, 교과서의 기본 교수・학습 과정은 ‘창의・인성 교육’이 그렇게 경계하는 인지적 과정 중심의 분석 및 해석 과정으로 축소될 가능성이 생긴다. 이해와 감상, 인지와 수용이 분리되는 경우, 가장 큰 문제는 창의・인성만이 빛나는 문학 수업이 아니라 창의적 본질을 잃게 되는 문학 수업이 유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창의・인성 교육이 기법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과서는 창의・인성의 기법들을 활용하는 데 주안점을 둘 것이다. 문학교육이 창의・인성 교육을 지향할 것인지, 아니면 그에 바탕을 둘 것인지, 혹은 과정적으로 활용할 것인지는 ‘추동되고 있는’ 학교 현장에서 여러 형태로 모색되어 나오게 되겠지만, 검정기준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창의・인성 교육의 내용을 교수법적으로 구상하기 위해 교과서가 있을지도 의문이다.
인성 교육의 문제는 한국과학창의재단에서 밝히고 있는 것에 동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성 교육은 의도하고 계획하는 순간 모든 교육 내용들을 윤리 교육의 방법 수준으로 격하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교육에서도 인성 교육은 ‘자연스럽게’, ‘저절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방법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인성의 형성 자체가 계획되고 유도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협력과 배려, 공동체 의식이 중요하다고 해서 문학교육이─나아가 교육과정상의 모든 교육이─ 자존감과 평정심, 시비지심 같은 엄정한 판단력, 개성 같은 것을 논외로 삼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협력, 배려, 공동체 의식 등은 ‘오늘날 지식기반사회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게’ 보편적으로 요구된 인성으로서 제안된 것이 아닌, 과학기술교육의 당면한 과제 중 하나로서 제안된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아무리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정서와 가치관이라 하더라도 문학교육은 유도하지 않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기피되는 정서와 가치관이라고 해서 문학교육이 그 과정을 통해 직접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교육의 효과일 수는 있을지언정 목표나 내용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며, 문학교육은 체험이나 정서, 나아가 도덕적 가치관의 형성에서 바람직한 어느 한 방향으로의 지향이 아니라 다양한 방향으로의 가능성 모색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되기로 문학 교과서는, 나아가 교실의 문학 수업은 2013년 이후 바람직한 인성을 특정 정서나 가치관으로 제한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문학교육에 있어서나 교육 전체에 있어서,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불행한 일이다.
결론을 대신하여
문학교육은 ‘창의・인성 교육’이 제안되기 이미 오래 전부터 창의성과 인성에 대한 더 많은 가능성들을 이론적으로 검토하고 실행해 왔다. 그런데 왜 그 브랜드가 ‘창의・인성 교육’인가. 문학교육이 아닌 과학기술교육이 시대적 요구이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문학교육은 어째서 시대적 요구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인가.
사족.
만약 발표자의 이 발표 내용이 창의적이라면 그것은 책임감을 따랐기 때문이다. 이것을 협력이나 배려, 혹은 도덕적 판단력이라 불러도 좋다. 발표자는 아무도 ‘창의・인성 교육’을 말하지 않았을 때 자연스럽게 인성을 갖게 하여 창의적인 사고와 수행을 할 수 있게 가르쳐 주신, 언제 누구인지는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모든 선생님들께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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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의 사족
위의 사족은 발표문에 있는 대로이고.... 이 발표 때문에 두 분 선생님께는 참 누가 된 셈이 되었다. ㅠㅠ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인가.
사족의 사족의 사족
아무래도 재미는 없지만, 읽어낸 사람도 없는 듯하여.... 아, 역시 내가 날 고생시킨다.
"새로운 결론이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비전은 이를 강제한다."
앞에 '빨간 알약'을 넣은 건 짐작하겠지만, 매트릭스를 연상하게 하려는 장치다.
네오와 모피어스의 관계에 빗대어 암시를 하려는 수작이었던 게지.
실패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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