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은결을 돋우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1989년 어느 날 TV 광고 하나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 무렵 상업 광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광고 역시 광고음악이 배경이 아닌 전면적 메시지를 이루고 있었는데, 여기서 사용된 노래는 그 후 수십 년 동안 시청자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광고음악 중 하나가 되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눈빛만 보아도 알아
그냥 손 잡으면 음~ 마음속에 있다는 걸
몸짓만 봐도 알아요 미소만으로도 좋아
돌아 생각해보면 음~ 마음속에 있다는 걸
특별한 대사나 설명은 없지만 기다림과 떠남을 보여주는 짧은 장면 하나와 ‘정(情)’이라는 글자와 함께 제시되는 이 노래에서는 상품이 소비자들을 소구하는(소비자의 구매욕을 이끌어내기 위해 감성적 유인 요소를 제공하는) 지점이 아주 잘 통합되어 있다. 광고를 통해 알게 되는 정보들, 즉 가격이 부담스럽지 않지만 케익류 제품이고 고급스럽게 포장되어 있어서 간단한 선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점이나 '정(情)'이라는 메시지가 제품 이름보다 강조되어 있어서 일상에서 느끼는 사랑과 감사와 관심의 표현 수단으로 적합하다는 점, 그리고 은유적으로 작용하는 광고 음악이 '눈빛', '손', '몸짓', '손'을 상품과 자연스럽게 연결 짓고 있다는 점 등은 결과적으로 이 특정 상품이 '마음'과 등가적인 존재로서 소비자들에게 받아들여지게 하는 데 성공적이었던 것이다.
마음과 마음이 직접적으로 이어져서 서로의 뜻이 통할 수 있다면야 이런 광고도 불필요할 것이고 우리의 언어도 그 효용 범위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그래서 말도 정확히 해야 한다고 배우고 그 말의 증거도 마련해 두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구두 약속만으로도 충분했던 시절은 이미 우리의 경험 밖에 있다. 그러다 보니, 효용적인 측면에서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약속의 규범과 그 규범을 지키며 사는 담화 사용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시를 읽을 때에도 알게 모르게 이러한 생각이 작동한다. 그렇게 해서 많은 시들이 이러한 생각에 의해 읽혀지고 이해된다. 말하자면 말한 것을 시로 읽고 말하지 않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아도' 아는 시는 짐작하거나 예측하기 어려우니 인정하지 않기로 말이다. 그런데 만약 저 광고 음악의 노래 가사 같은 시가 존재하고 그런 시들을 쓰고 읽었던, 노래하고 들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리고 의외로 그런 시들과 그런 시를 향유했던 사람들이 많았다면?
문학에서는 이러한 시들을 순수 서정시라고 부른다. 서정을 노래한 시가 서정시라면 순수 서정시란 그 서정의 경험 내용이 순수한 내면에 있다는 뜻이다. 즉, 시적 대상이 시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서정이고 그 서정이 세계의 어떤 것에 반응해서가 아니라 마음 자체의 순수한 작용과 변화에 의해서 생겨나는 정감적인 상태라는 것이다.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는 이러한 의미에서 순수 서정시에 속하는 작품이다.
순수 서정시, 마음을 노래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대하는 시들에서 시어는 보통 우리가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세계의 사람이나 사물, 또는 현상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 시어의 의미는 이 대상에 비추어봄으로써 판단되며 그 의미의 정확성이나 풍부성, 혹은 변화 등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어와 대상 사이의 관계에 대한 약속들에 기대어 이번에는 거꾸로 시어로부터 대상을 추정하고 구체화하고 명확히 한다. 시에서 나무를 말하면 우리는 경험 세계의 나무를 떠올리고 나무가 팔을 뻗고 있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 나무에게서 팔이라고 할 만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짐작하여 그 의미를 판단한다. 만약 시에서 별나라를 말한다면, 우리는 그래도 그곳이 우리가 상상 가능한 곳이려니 여기고 우리가 경험한 세계로부터 유추하여 그 세계를 구축한다.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에서 시인이 말하는 대상은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이다. 아차! 이 대상은 우리가 '공통적으로' 경험하던 세계가 아니다. 그곳은 그 말을 꺼낸 시인만이 알 수 있다. 해서 우리는 시에서 말하는 그곳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려고 한다. 시에서 이렇게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시어들 간의 관계를 계열체라고 한다. 이렇게 계속 읽다 보면,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어이쿠! 그곳은 마음의 한 구석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에 다시 마음이 숨어 있다고 한다. 이러면 마음 안에 마음이 있고 그 마음 안에 마음이 있을 수 있는 '마트료시카 인형'이나 무의식 속에 무의식이 있고 그 무의식 속에 또 무의식이 있는 '림보'(영화 '인셉션'에 등장하는 '무의식이 포개져 있는 공간')를 떠올릴 수도 있겠는데, 시를 읽을 때 시어 하나하나의 의미와 그 관계들을 논리화하려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 시에서 의미는 주어가 아니라 서술어에 있다. '나의 마음은 황무지'라고 하면, 우리는 '마음'을 붙들고 이래저래 궁리를 할 게 아니라 시인이 '황무지'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를 궁금해 해야 한다.
매우 상식적인 우리의 생각에 따르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상황이면 굳이 말하지 않는다. 사람이 말을 하고 손과 발을 움직이고 어떤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은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독백투의 말을 자신을 향해 하고 있다면 시인은 자기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 말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는 것이다. 원래 우리의 마음 자체가 모호하고 애매한 까닭에 언어를 통해 경계를 긋고 깃발을 꽂아 지시하고 정의 내리고 부연하고 상세화하는 것인데, 다짐을 해야 한다든가, 결심을 한다든가, 혹은 입장을 정리한다든가 하는 것들이 다 이 모호하고 애매한 마음의 상태를 해소하는 방편인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어떠한가? 시인은 무엇에 관한 마음인지도, 어떤 종류의 마음인지도, 마음의 어떤 부분인지도 스스로 모른 채, 무엇이라 분명히 밝혀 말하기 어려운 이상한 정감의 상태에 놓여 있다. 마음의 어느 한편에, 자신도 그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마음이 숨어 있는 어떤 곳에 미묘한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표현된 것이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과 '아침 날빛이 빤질한 은결을 돋우네'이다. 이 두 서술절은 공통적으로 '물결'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강물'은 원래 그렇다치더라도 '날빛' 또한 물 이미지로 표현되었으므로, 물 이미지는 해석의 중요한 단서가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잠깐 '물'이 여러분에게 어떤 이미지로 그려지는지를 생각해 보라.) 물은 연속적이고 유동적이며 서로 뭉쳐지려고 한다. 이러한 속성으로부터 무엇인가 마음속에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일렁이는 감정의 동요가 있음을 다는 것이다. 우리는 '돋쳐 오르는'과 '빤질한 은결' 같은 시어로부터 물과 같은 시인의 내면에 비춰지는 밝고 빛나는 자극들이 있고, 그리하여 그 감정의 동요가 긍정적이고 무엇인가를 설레이는 방향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을 데서 비롯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엇이 그러한 감정을 일으키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마음에는 그러한 감정의 변화가 있는 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정체 만들기, 저항하기, 깨지기 쉬운
박용철이 김영랑, 정지용, 정인보 등을 끌여들여 발간했던 '시문학' 창간호(1930년 3월)에 실린 이 작품은 '冬柏닢에 빛나는 마음'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작품의 정확한 창작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시문학' 창간을 앞두고 썼다고 가정한다면, 동백나무 잎들에 한창 물이 오르고 있었을 강진의 이른 봄날을 떠올리며 마음속에서 일었을 정감의 상태를 그려내는 시인의 모습도 상상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A에 빛나는 B'라면 A가 원인이거나(솔질에 빛나는 구두) 혹은 자격이 되겠지만(대상에 빛나는 가수), 여기서는 A와 B가 유비적인 관계에 있다.(동백잎에는 빛나는 마음이 있다, 동백잎처럼 마음은 빛난다.) 물론 여기서 마음은 시인의 마음을 뜻하는 것일 터이니 '이른 봄날 아직 날씨는 차지만 햇빛을 받아 동백잎의 빛을 발하는 것을 보니 그 잎새에 수맥이 뛰는 듯한 느낌에 내 마음도 생동감을 얻는다' 같은 의미가 실현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시문학' 동인들을 순수시파라고 부르는 배경에는 이 과정을 주도한 박용철이 나중에 '시문학'을 순수시 동인지라고 부른 까닭도 있지만('박용철 전집' 후기, 1939), 작품으로 보자면 단연 중심 인물이라 할 김영랑의 작품들이 대개 마음을 시적 대상으로 삼고 있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김영랑은 이후 '영랑시집'(시문학사, 1935)을 출간했을 때 '시문학'에 투고했던 작품들을 재수록했는데,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으로 실렸던 이 시의 제목을 빼버렸다. 그뿐 아니라 다른 작품들의 제목도 모두 없애고 일련 번호로만 배치했다. '시문학' 창간호의 대표작이자 '영랑시집'의 첫 작품인 이 시가 갖는 상징성도 특별하지만, 김영랑이 자신의 시집에서 시의 제목들을 달아놓지 않았다는 것은, 따라서 시집의 목차도 없게 된 것은, 순수시(순수 서정시)에 대한 그의 시적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한다.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해, 제목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시집이라는 옷을 입고 출판이라는 경로를 따라 전달되어 인상과 평판으로 인정을 받는 시가 되기를 거부하는 순수한 형태의 서정시. 이 시는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고 심지어는 시인조차 시의 주인으로, 혹은 발언 권리자로 주장할 수 없이 온전한 존재가 된다. 거꾸로 시인은 그 시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데 소용되는 도구로서, 시의 사제이며 신녀로서 지위를 갖는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온전한 자기의 모습을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보면, 순수 서정시는 현실이라 불리는 혹은 세속이라 불리는 세상에 대해서는 가장 저항적인 시이며 가장 위태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말기로 가면, 다수의 시인들이 전향을 하고 변절을 하고 친일의 목소리와 표정을 시에 담기 시작하였는데, 이때가 서정시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을 것이다. 태도는 꾸밀 수 있어도 목소리는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순수 서정시는 스스로 입을 닫고 모습을 버림으로써 저항의 가장 극단을 보여주었다. 김영랑은 1940년 '춘향'을 끝으로 절필을 했고, '시문학' 3호부터 동인으로 참가했던 신석정도 비슷한 시기에 절필을 했다. 정인보, 이하윤 등도 일제 강점기 말기에 절필을 선택했다. '시문학' 출간을 주도했던 박용철은 1938년 결핵으로 요절했다.
※ 이 글이 공부에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이 글은 출판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일부입니다. 이미 널리 알려진 공유된 지식에 저도 기대고 있는 바 있습니다만, 개중 이 글에서 새롭게 제기한 내용들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저작권과 저작인격권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읽고 함께 공부하는 것에는 제약이 없습니다만, 내용을 옮기실 때에는 인용 표시를 달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책이 출간된 이후에는 서지사항을 글에 추가하겠습니다. 그 이후에는 글의 인용은 책의 인용으로 대신해 주시기를 함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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