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감상의 출발로서의 갈등
‘갑’과 ‘을’이 흥미진진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내용인 즉, 서정주가 쓴 <추천사>에서 ‘춘향’이는 그네의 어디쯤 매달려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밀 듯이,
향단아.
이 다소곳이 흔들리는 수양버들 나무와
베갯모에 놓이듯한 풀꽃더미들로부터,
자잘한 나비 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밀 듯이, 향단아.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채색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 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향단아.
(서정주, '추천사')
‘갑’은 이 장면에서 그녀가 앞으로 멀리 밀쳐 나간 그네 쪽에 있으리라고 말합니다. 이를 반박하며 ‘을’이 향단이 그네를 막 밀어 올릴 순간의 바로 그 위치, 고쳐 말해 뒤로 잔뜩 물러나 있는 그네 쪽에 있으리라 주장합니다.
주장이 비록 다르게 전개된다 해도, 그녀가 마주 대하고 있는 대상이 ‘머언 바다’이거나 ‘산호도 섬도 없는 하늘’인 것만은 분명하지요. 시에서 그렇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서로의 주장이 갈라서는 것일까요? ‘갑’의 주장에는 ‘나는 아무래도 갈수가 없다’가 근거로 제시되고 있고, ‘을’의 주장에는 ‘그넷줄을 밀어라’,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가 근거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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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차이는 참으로 중요하지요. 저 먼 곳으로 나아가고 싶지만 드디어 길은 끊기고 더 이상 갈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탄식처럼 토해 낸 소리,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가 어찌 수양버들 나무와 풀꽃더미들로부터, 나비 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 밀듯이 밀어 달라고, 벅찬 듯이, 어쩌면 애절한 듯이, 비감한 듯이 ‘밀어 올려 다오’, ‘밀어 올려 다오’, ‘밀어 올려 다오’, ‘밀어 올려 다오’를 연발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거나 심정이랄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만큼 종내 어느 쪽에선가 통쾌한 승리를 얻어야 할 법한 제로섬 게임의 형태를 이 논쟁은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근거를 따져가며 말하는 것으로는 어느 쪽으로도 승리가 기울지 않을 만큼 모호한 측면이 남겨져 있기도 합니다.
이건 아무래도 서정주의 책임이 큰 때문이겠지요. 배중률(排中律) 위반, 곧 A는 B이거나 B가 아니어야 하는데 B이면서 동시에 B가 아닌 상황을 만든 실책입니다. 그네뛰기에도 질서라는 것이 있어서 그네를 앞으로 밀쳤으면 그 시간에는 그네가 뒤에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러니 어찌 책임이 없겠습니까. 아마도 이 작품 속의 ‘그녀’도 ‘밀어 올려 다오’를 연발하는 사이에 ‘나는 아무래도 갈수가 없다’고 탄식하는 제 자신이 곤혹스러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이렇게 서정주를 탓하고 나면, 이 논쟁은 아주 맥없어집니다. 그래서 나는 요것이 시의 묘미라고 합리화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시의 발상이다.”라고.
2. 문제 상황과 도식 : 숙명의 끈을 어떻게 끊을 것인가
여러분 가운데 많은 수가 자신의 능력이나 배경이 뜻하는 바와 같지 않아 고민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또한 몇몇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보기도 전에, ‘숙명’이라는 단어 앞에서 그 단어가 갖는 무게, 그것이 갖는 함축(含蓄)에 몸을 떨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추측컨대, 어린 시절 읽었거나 들어보았을 <마지막 잎새>라는 단편 소설의 창밖 풍경이 그러한 무게를 시각적으로 보여 주는 예가 아닐까요? 이미 떨어져 버린 낙엽이 아니라, 마지막 한 잎으로 남아 흔들리고 있는 잎새는 사람을 긴박한 감정의 상태로 몰아넣지요.
유사한 예를 하나 더 들어볼까요? 어렸을 때 형편없이 나온 성적표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던 기억이 있습니까? 제게는 그런 기억이 있었는데요. 빨리 꺼내 보이라며 재촉하시는 아버지 앞에서 그것을 내어놓던 순간, 또는 합격자 발표날 교문 안으로 들어서 명단을 내려 흩으며 점점 자신의 수험번호에 다가가다 바로 전에 눈길을 멈추었던 순간, 아니면 이별을 예감하며 약속 장소에 나가 무어라고 말하려고 움찔거리는 그녀의 입술을 보았던 순간, 이런 순간들이 떠오른다면, 되었습니다. 기대할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는 그 순간에, 알 수는 없지만 무엇인가 예감되는 그 절망감이 ‘숙명’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우리의 삶에 개입하고 있음을 알아 차렸다면, 완전히 성공한 것입니다. 그때, 과연 숙명의 끈을 풀 자는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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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의 장면은 그래서 앞으로 훌쩍 내달린 그네의 형상도, 뒤로 완전히 제쳐진 그네의 형상도 아닌, 그러면서도 이 둘의 산술 평균을 구한 듯이 곱게 중력의 힘을 받고 멈추어 선 그네의 형상도 아닌, 다른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주 높은 긴장감이 양쪽에서 그네를 잡아당깁니다. 방금 본 그림을 무시하고 여러분이 한번 이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보이지는 않지만 두껍고 질긴 숙명의 끈이 보일 겁니다.
그런데 이 그림의 외곽을 좀 더 묘사해 보면, ‘그네’라는 것 또한 ‘마지막 잎새’마냥 인생의 숙명성을 시각적으로 재현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힘차게 발을 딛고 그네를 밀쳐 보지만, 그네의 끈은 튼튼한 오동나무의 줄기에 묶인 채 위로 열린 포물선의 양끝을 반복하여 움직일 따름이지요. 그러니 서(西)쪽 천축국(天竺國) 또는 극락(極樂), 어쩌면 자유의 세계로 가는 달 같이 지상에서 영원으로 자유롭게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한참을 올라가면 이내 내려와야 하기 때문이지요.
김광균의 <추일 서정>을 읽어 본 일이 있다면, 다시 한 번 머리에 떠올려 보세요. 이 시는 방금 본 그림을 정확히 뒤집어 놓았지요?
호올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김광균, '추일 서정'에서)
물론 여러분도 ‘고독한 반원(半圓)’을 그으며 저 건너편으로 떨어지는 돌멩이가 무엇에 묶여 그리 되었는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고독한 반원은 아래로 열린 포물선이지요. 중력을 받아 돌멩이는 떨어지지만, 사실은 자신을 ‘근대인’이라 자각하는 서정적 주체가 ‘근대’라고 하는 황량한 들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풀벌레 소리는 아니더라도 허전한 마음에 돌멩이나 깡통을 차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결코 비어 버린 마음이 채워지지는 않습니다.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는 한참 올라가다가 결국 저편에 떨어질 운명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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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여러분은 <추천사>의 위로 열린 포물선과 함께 <추일 서정>의 아래로 열린 포물선도 본 셈인데, 사실 이 숙명의 포물선들은 어느 누구도 그것을 선(線)으로는 볼 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합니다. 앞으로 벌어질 불운한 상황, 그러나 알 수도 없고 대비할 수도 없는 그러한 상황이 이 시간의 포물선 위에 점점(點點)이 놓여 있습니다. 밖에서 보는 사람은 어떨지 모르나, 여기에 맞닥뜨려진 사람은 곤혹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지요. 이런 역설적, 혹은 아이러니한 삶의 조건을 ‘문제 상황’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문제 상황이란 무엇입니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조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이고도 역사적인 존재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함께 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공간은 매일 보며 산다고 하나, 시간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만일 시간도 볼 수 있다면, 나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함께 볼 수 있을 것이며, 과거의 나도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를 함께 볼 수 있을 것이고, 미래의 나 또한 그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곤란하지 않습니까? 과연 보고 있는 ‘나’는 어떤 ‘나’인가요? 이거 분열증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시간을 거스르거나 미리 당겨 볼 수 없다고 해도, 때로 찰나(刹那)에 혹은 시간의 주름을 우연히 잡고 잠시 엿보게 될 때가 있기는 합니다. 그렇게 보는 과거를 ‘기억(記憶)’이라 부르고, 또한 그렇게 보는 미래를 ‘예기(豫期)’라 부르는데, 이런 점에서 보면 문제 상황이란 기억과 예기를 통해 포착된 과거-현재-미래의 공존 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문제 상황을 포착하는 존재는 적어도 시간의 포물선을 묶고 있는 끈을 볼 수 있는 자일 것입니다. 시인은 예민한 신경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서, 남보다도 이 역설적 상황을 긴박하게 표현해 놓습니다.
그렇다면, 포물선의 모양은 아닐지라도 자신에게 닥친 문제 상황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놓은 시 몇 편을 더 살펴볼까요?
노천명은 <사슴>에서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이여’, ‘슬픈 모가지를 하고 / 먼 데 산을 쳐다본다.’고 하였습니다. 네 다리가 땅에 붙박혀 있으니 땅을 떠날 수 없음은 지당한 이치인데, 그만 모가지가 길어 슬프게도 먼 데 산을 보고만 것이다. 또한 유치환은 <깃발>에서 깃발을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이라고 썼습니다. 깃대가 땅에 박혀 움직일 수도 없으면서 깃발은 저 먼 바다 끝을 향해 애타게 손짓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이렇게 슬프고도 애닲은 마음’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시들에서 어쩔 수 없는 애달픈 마음이 생기는 것은 날카롭게 대립한 하늘(먼 데 산, 저 푸른 해원 ……)과 땅의 이원적(二元的) 구도(構圖) 사이에 서정적 주체가 놓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도와 좌절이 ‘끊임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음을 그이는 감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도 숙명의 끈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서정주는 <문둥이>에서 문둥이의 목소리로 해와 하늘빛이 서럽다고 했습니다. 이 작품에 한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산 채로 몸이 썩어 가는 천형(天刑)을 받은 그가 환한 대낮에는 밖으로 나설 수도 없게 된 숙명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늘이란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에게나 의미 있는 희망의 조건임을 절박하게 느끼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지요. 이런 그의 숙명, 곧 그늘과 어둠 속에, 안 된다면 땅 속에라도 숨어 밤이 올 때만을 기다려야 하는 문둥이의 숙명을 좀 더 엿보겠다면, 밤을 기다려야 합니다. 밤이 되면 그는 비로소 달 아래의 세상으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 '문둥이')
반면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은 다들 어둠을 밝히려 집으로 돌아갈 터이니, 사람들은 문둥이가 어둠의 세계에 속했다고 여기며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에 관한 수많은 소문이 만들어지고 퍼지고 키워지면서, 사람들과 문둥이의 세계는 점차 완전히 절연되기에 이릅니다. 하늘과 땅의 대립은 낮과 밤의 대립으로, 나아가 아예 선과 악의 대립으로 확장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순간 이 문둥이는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거기서 벗어나고 싶지만 실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원죄처럼 붙여진 소문을 직접 실천하면서(‘보리밭에 달 뜨면 / 애기 하나 먹고’) 숙명적인 현실을 긍정하게 됩니다.
이 정도가 되면, 문제 상황이라는 것은, 가깝고도 먼 사이, 사랑하기에 헤어져야 하는 관계, 안 될 줄 알면서도 도전하는 상황, 모든 것을 얻고도 허망하기만 한 처지, 그리고 이 때문에 불행하지만 또한 그 때문에 행복한 인간의 존재 조건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시들은 이런 문제 상황들을 가지고 있고 서정적 주체들은 언제나 여기에 맞닥뜨려져 있으므로, 서정적 주체가 무엇에 대해 거리감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것이면 시는 절반을 이해했다고 해도 족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이 있어서, 이 문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것은 시의 의미를 파악하는 또 다른 방법이 됩니다. <추천사>는 세계를 둘로 나누어 이해했고, 이를 통해 문제 상황을 긴장과 결단과 도전과 그 귀결로 이끌어 가는 그 나름대로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구도화하는 이원적 대립 구도, 다시 말해 위와 아래로 나뉘어진 도식은 매우 일상적인 것입니다. ‘높은’ 것은 고귀하고 우월하며 영원하고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집니다. 반면에 ‘낮은’ 것은, 눈물을 ‘떨구는’ 것은, 물속에 ‘빠지는’ 것은, 땅바닥에 ‘엎드리는’ 것은, 고개를 ‘숙이는’ 것은, 자리에 ‘앉는’ 것은 모두 우리를 어려움 속에 몰아넣는 것이라고 치부됩니다. 이러한 발상은 오랜 낭만주의적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근대시에서 와서 좀 더 선명해지고 주목받는 도식이 되었지요. (하지만 실은 낭만주의는 일원론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문제는 시인들이 목격하는 현실이 그 마땅한 하나의 조화로운 세계가 아닌 까닭에 현실과 이상, 혹은 허상과 진상의 이원화가 발생한 것입니다. 언젠가는 해소될 것이라는 희망으로서, 혹은 그 마땅한 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비극으로서!)
이제 이 도식을 가지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동시에 서정시의 범주를 적용시키고 있는 것임을 기억하도록 하기 바랍니다. 이렇듯 서정시는 기본적으로 이원적 주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위[上]와 아래[下]로 이루어진 일차원적 세계에서는 두 개의 위치 사이에 이 구도가 이루어집니다. 1983년에 황지우라는 시인에 의해 대하게 되는 다음의 아주 낯선 시는 위-아래를 조금 바꾼 형태일 뿐인, 문제의 도식이 다시금 나타납니다.
예비군훈련및훈련기피자일제자진신고기간
자 : 83. 4. 1. - 지 : 83. 5. 31.
(황지우 '벽.1')
그러니 모더니즘이라 해서 서정시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보는 것은 그리 온당한 견해는 아니지요. 오히려 그 양상이 바뀌었다고 보는 편이 작품 감상에는 더욱 이롭습니다. 다만 무척이나 새로운 것이 있다면, <벽1>에서 대하는 막연함은 바로 시가 노린 문제 상황이라는 점. 다시 말해, 사랑 노래가 연인에게, 학습지가 수험생에게 선택적인 자극 요인이 되듯이, 모든 시민에 대해서는 아니더라도 이 작품은 공고문의 대상이 되는 특정한 어떤 이들에게 특별하고도 강력한 단절감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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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은 공고문이 붙은 공간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난관에 부딪히거나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타인과 만나게 되었을 때 ‘벽에 부딪혔다’는 말을 하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단절감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일방적인 지시나 명령만 있고 이를 어겼을 때 예견되는 처벌만이 아주 딱딱한 표정으로 적혀 있는 이 벽보는 어떤 대화도 거부합니다. 여러분이 서슬 푸르던 80년대 초반에 그것도 예비군 훈련을 고의로 기피하거나 빠뜨림으로써 ‘삼청교육대’ 입소 대상에 오를 법한 일을 저지르고 어느 날 길을 걷다 문득 이 벽보를 보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러분은 어떤 감정을 느낄 것 같습니까? 두렵고 긴장되지 않을까요? 이런 접점의 긴장이 고조되는 것이 근대시의 한 양상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어서, 전래의 시가들에서 대립보다는 화해가, 갈등보다는 조화가, 분열보다는 통합이 강조되고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 두 가지 예를 간단히 보이겠습니다.
-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 지훈에게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나그네')
여러분은 시인에게 이렇게 따질 수도 있습니다. ‘그 참혹한 일제 말기를 이육사나 윤동주처럼 시를 쓰지도 못하고 당신은 한가롭게 술 익은 마을을 찾고 있었느냐’고. 하지만 시인의 눈으로 본다면, 꼭 그러한 질문이 타당한 것만은 아닐 듯싶습니다. 태어나고 죽은 생물학적 존재인 ‘박목월’이 아닌, 이 시의 ‘시 쓰는 주체’인 시인의 눈은 관연 어디쯤에 놓여 있을까요? 이렇게 말로 풀자니 쉽지는 않습니다만, 이렇게 묘사해 볼 수 있겠습니다. 대충 구불구불 끊일 듯 이어진 외길을 그려 놓고 그 위에 사람 모양으로 나그네의 위치를 잡은 다음 내려다보고, 나그네의 내면으로 들어가 다시 바라봅니다. 여러분의 지금 시점(視點)은 얼추 시인의 그것이 될 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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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나그네에게는 앞이나 혹은 위나 대립적인 위치가 생겨나고 있습니까? 그렇게 보기란 쉽지 않겠지요. 왜냐하면, 이 그림은 일차원적인 세계라기보다는 이차원적인 세계, 곧 평면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어서, 어느 방향으로든 길이 이어지고 끊어지는 것이 문제일 뿐 어떤 대극점(對極點)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그네로서는 마치 길이 있기에 걷고 또 걷을 따름이다. 그러니, 시인에게 일제 치하의 참혹함을 들이대고 현실 도피적인 그의 태도를 비난하는 것은 그저 예쁜 학용품을 갖고 싶어 일제 상품을 구해 들고 선 철없는 아이에게 ‘너는 우리나라가 또다시 일본의 식민지가 되길 바란다는 말이냐’ 하고 따지는 것만큼 덧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문제의식 밖에 놓인 문제 상황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측면에서는 시대의 아픔에 더불어 고통스러워하는 상처받은 영혼이 이 시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은 이 시가 아주 전래로부터 이어져 온 전형적인 갈등 해소의 방안을 선택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전래적인 것이라 함은, 이제 목월(木月)이라는 아호가 소월(素月)에 대한 대타적 의식 속에서 붙여진 것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겠지만, 예컨대 김소월의 <산유화> 자체가 그러한 갈등 해소 방안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김소월, '산유화')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시의 한 구절, ‘저만치’는 시 해석에서 매우 문제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단어는 말 그대로 ‘요만치’도 ‘그만치’도 아닌 아주 어중간한 거리감을 가지고 있는 표현입니다. 거리(距離)가 욕망의 거리이자 갈등의 폭을 뜻하는 것이라면, ‘요만치’는 이내 원하는 대상을 손에 쥐고 욕망을 달성함으로써 더 이상 갈등이 발생하지 않는 거리가 될 것이며, ‘그만치’는 어느 정도 떨어진 것인지도 분명치 않고 그래서 욕망은 해소되지 않지만 갈등의 내용도 잠재되어 있을 따름인 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저만치’라 하였으니, 욕망은 끝없이 솟구치고 있으나 해소되지 않는 지속적인 갈등의 거리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이 시에서 ‘저만치’를 주목했던 사람들은 고독이나 소외감이나 거리감이나 안타까움 같은 주제를 이끌어 내곤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표현에서 조금만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면, 이 시는 그 자체로 조화와 안정, 화해와 균형이라는 주제로 읽기에 안성맞춤이 됩니다. 예로부터 산수화(山水畵)는 자연의 이법(理法)을 화폭에 담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 왔고, 그에 따라 사람이 등장하더라도 산과 물에 더불어 하나 된 모습 외에는 다른 무엇도 아니었습니다. 산중턱은 적당히 안개에 싸여 있고, 계절은 적당히 사시사철의 어느 한때쯤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이러한 산수화로 대변되는 동양적 세계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이요 주객혼융(主客混融)인 조화의 세계였다. 그것은 달리 철에 따라 피고 짐이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산유화>의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나’를 내세워 욕망에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산유화의 세계는 ‘대상화(對象化)된 세계’라기보다는 유일한 주체로서의 세계라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산유화(山有花)가 ‘이름 없음’의 표상이라는 점에서도 또한 그러합니다. 산유화는 말 그대로 산에 핀 꽃의 일반 명사이기도 하기 때문에, 하나의 꽃이 아니라 꽃 그 자체라 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산 중에 꽃 한 송이가 피고/지는 중이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산에 꽃이 피고/지는 중이라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꽃의 처지로서도 고독할 상황이 아니며 꽃을 보며 고독감을 느껴할 상황도 아니지요.
이 두 작품에서 문제 상황을 찾기 힘든 것은 이들 작품의 주체가 사회적 개인(個人)으로서의 자아 대신 자연과 동화된 자아로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곧 분리되기 이전의 ‘즉자적 존재(卽自的 存在)’로서 이들 작품은 갈등이 생기기 이전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경우에 따라 차이의 정도뿐 아니라 차이 그 자체를 포착할 수 있는 안목이 요구되기도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작품에 대한 다양한 감상과 해석의 가능성은 여기서 생기는 것이지요.
3. 목소리와 시적 자아 : 그(녀)의 목소리 듣기
말을 더듬는 사람을 보면, 그가 뭔가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말은 할 수 있되, 어떤 말은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의 강요는 부적절하거나 금기시되는 단어를 기피하기 위한 과도한 긴장과 억압을 가져오게 마련입니다. 비록 현상은 다르지만 요설(饒舌)이 생기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감추기 위해, 헛되이 과시하기 위해, 조바심을 달래기 위해, 무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말은 많아지고 과장이 생기게 되지요.
근대시의 근원에 전래의 시가가 있고, 그것이 노래와 노랫말의 음송(吟誦)에서 비롯되었음을 모르지 않을 양이면, 시행(詩行) 진술이 일정한 호흡 단위에다 규칙적인 율격을 띄는 까닭을 이해 못할 바 아닙니다. 행을 나누어 판단을 미루는 데는 뜻밖의 강조나 주저함이 있었을 것이며, 행을 붙여 끌어다 쓴 데는 확신이나 일체감이나 조급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괴로웠든 사나이,
幸福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十字架가 許諾된다면
(윤동주, '십자가'에서)
배나무 숲을 노루처럼 질주하던 원두막지기의 딸, 중학교 운동회 때
트로피를 휩쓸던 그애, 오천 원짜리 과외공부 시간 책상 밑으로 내 다리를 쿡쿡 찌르던,
오천 원이 없어 결국 한 달 만에 쫓겨난 그애, 배나무들을
뿌리째 갈아엎던 불도저를 괴물 아가리라 부르던 뚱그런 눈망울
한강다리 아래 궁글던 물새알과 웃음의 보조개 내게 던지고 키들키들
지금의 현대백화점 쪽으로 종다리처럼 사라지던, 그후로
영영 붙잡지 못했던 단발머리 소녀의 뒷모습
그 눈부시던 구릿빛 종아리
(유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6'에서)
<십자가>에서 ‘처럼’은 행을 끊어 처리했습니다. 말할 때 한 번 쉬고 ‘처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시가 예수에게 주어졌던 것 같은 양심의 길, 고독과 순교로 이어질 길을 자신도 걸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만큼, 이 표현은 다짐하듯 ‘처럼’을 떼어 말하여 예수와 동일시(同一視)하는 태도를 보여 줍니다.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라는 시 연작(連作)은 새것과 낡은 것이 접합되고 온갖 부와 사치가 바벨탑처럼 세워진 압구정동이라는 포스트모던한 공간에서 붙잡게 된 아련하게 찾아든 옛 기억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에서 나는 그 끊이지 않는 기억을 재생해 내고 있습니다. 원두막지기의 딸이 떠오르면 연해서 중학교 운동회 때가 떠오르는 식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들도 결국 문자로 씌워진 말과 같아서, 오늘날에도 시인은 ‘노래를 부르거나’, ‘말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추천사>에서 ‘나’는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말하는 ‘나’는 누구일까요? 앞서 시인과 ‘나’ 사이를 교묘히 넘나들었으니 만큼 이 관계를 설명해야 옳겠지만, 이 문제는 다음으로 넘기고 우선 주어진 시 구절을 되풀이해 읽어 보기로 합시다.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밀 듯이,
향단아.
이 구절은 열 자로 된 1행이 길고 석 자로 된 4행이 짧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뭐 중요하겠느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행을 하나의 호흡 단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사정이 사뭇 달라집니다. 1행은 빠르게, 4행은 느리게 읽는 것이 호흡 주기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훨씬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2행과 3행을 읽을 터이니, 한번 재미있는 장면을 연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넷줄을 단단히 쥐고 향단에게 말을 건넨다. 자,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 그러면, 향단은 그네를 밀고 그네는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밀려갔다 밀려들어온다. 빠르게 느리게, 빠르게 느리게……. 우리의 경험 세계를 두고 말한다면, 동일한 시간 동안에도 사물의 운동은 멀리 갈수록 느리게, 그리고 가까이 올수록 빠르게 진행되는 것으로 느껴지는 법입니다. 과학적 법칙이지요. 그러니 그넷줄의 반복적인 왕복 운동이 얼마나 재미있게 묘사되는 셈입니까. 말소리 역시 그에 따라 커지고 작아지고, 할 말을 재빠르게 해 놓고 그네에 밀려 멀어지는, 그러한 순환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2연에서 ‘이 다소곳이 흔들리는 수양버들 나무와/베갯모에 놓이듯한 풀꽃더미들로부터,/자잘한 나비 새끼 꾀꼬리들로부터,/아주 내어밀 듯이, 향단아.’ 하고 반복적인 장면을 보이는 것은 다짐의 표현으로 들을 수 있겠고, ‘나를 밀어 올려 다오’를 반복하는 3연은 절박감의 표현으로 들을 수 있겠습니다. 정리하자면, 그네를 올라타며 시작된 ‘나’의 발화는 ‘기대감, 요구 → 다짐 → 절박감’의 정서적 고조 과정을 그대로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딱딱한 문자로 적힌 시행에서 의외의 목소리를 듣게 됨으로써 ‘시’라고 하는 것에서 우리는 정서의 생동적인 과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행의 자수(字數)와 배열, 같은 음이나 성조의 반복, 의미의 대응과 환치 같은 것에서 말입니다. <南으로 窓을 내겠소>에서 김상용이 편지글로 낸 듯한 ‘하오체(體)’로서 친근한 목소리를 건네는 것, 1, 2연 사이에 억양의 변화를 주어 노동과 여가의 통합을 노래한 동양적 삶의 전경(全景)을 보여주는 것, 그뿐 아니라 4행씩을 배열한 앞의 두 연에 비해 ‘왜 사냐건 웃지요’ 하고 우문현답식(愚問賢答式)의 단출한 한 행 진술로 마지막 연을 매듭지어 여운(餘韻)을 남기는 것도 이런 목소리의 힘 아니고는 감히 만들어 내지 못하는 시적 정취의 능숙한 예입니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가리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오
구름이 꼬인다 갈리 있오
새 노래는 공으로 드르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이제 같은 방식으로 앞서 인용한 <나그네>가 3보격의 일정한 자수 규칙을 따른 것을 생각해 봅시다. 애당초 자수율을 엄격히 지켰던 창가(唱歌)였거나 혹은 유사한 집단적 가요였다고 하면야 얘기거리도 되지 않았을 자수적 규칙성을 이 작품은 이제 그런 시가 통용되는 시절도 아닌 시대에 그것도 노래가 아닌 시라는 형식을 통해 재현해 놓았습니다. 어째서? 의식적으로 그러한 규칙성을 재현할 필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개인적 서정을 집단적 정서로 전환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거나 혹은 개인적 서정을 집단적 정서 속에서 발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 점은 앞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그네>를 그저 전통시니 고전시가니 하고 규정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도 밝혀야 하겠는데, 그것은 이 작품이 여전히 개인적 서정을 개성적인 목소리에 남겨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대개의 집단적인 가창(歌唱)은 누가 부르더라도 동질의 정서가 공유되는 법이다. 그런데, ‘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2연, 5연) 하고 난 다음에 유보된 진술에서는 그 누군가 선뜻 다른 이의 느낌까지를 대변할 정서적 표현을 잇대어 놓기 힘들게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표현된 그 자체만 본다면, 그의 목소리는 몽환적이면서도 자족감에 젖어 있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만큼 보편적인 정서를 표출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목소리가 만만치 않게 숨겨져 있는 셈이지요. 이를 전통의 근대적 변용(變容)이라 합니다.
<산유화>의 경우도, 따지고 보면 6․4의 자수 규칙이나 3보격의 율조보다는 그것의 형태 변화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2연을 통해 나타나는 율조의 그래픽화(化)가 단순한 시행 배열의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호흡 고르기와 이를 통한 의미론적 변주에까지 발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변용 덕분에 김소월의 시는 다만 전통적 정서니 전통적 형식이니 하는 자질 말고도 근대시로서 갖는 미덕을 함께 지니게 되었습다.
그렇다면, 외형적인 율조의 규칙성을 탈피한 경우는 또 어떨까요. 앞서 언급한 <벽1>은 자간 띄어쓰기가 무시되고 있고, 같은 시인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줄글로 옮긴다면 어쨌든 겉모습으로는 산문과 다를 바 없이 되지만, 여기에도 제각기 독특한 호흡 고르기의 방식이 실현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시적 자아의 목소리이든, 아니면 시인이 기대하는 독자의 목소리든 한숨에 또박또박 읽어내려가야 하는 고통은 <벽1>의 의도된 책략(策略)이고, 껄렁껄렁한 목소리로 애국가에 맞추어 주절대는 경박함은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의 풍자적 태도인 것입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 삼천리 화려 강산의 |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 갈대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 자기들끼리 끼룩끼룩거리면서 |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 우리들도 우리들끼리 | 낄낄대면서 | 깔쭉대면서 |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 한 세상 떼어 메고 |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 길이 보전하세로 | 각기 자기 자리에 앉는다 | 주저 앉는다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혹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 시가 수다나 잡담 말고도 혹평하고 비난한다는 뜻의 랩(rap)과 혹사(酷似)함을 눈치 챘을 것입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이라든가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같이 이어 붙여 읽고, 떼어 붙여 읽어 의미를 의도적으로 왜곡시킨다거나 또한 그런 방식으로 기존의 권위 있는 노래를 변형시키는 것, 줄글 형태의 가사를 반복과 대립의 의미론적 질서로 규칙화하는 것 등에서 말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시는 90년대 랩(Rap)의 80년대식 원형(原型)이라 불릴 만합니다.
이렇듯 근대시는 제각기 고유한 목소리를 고유한 방식으로 표출합니다. 물론 우리 귀로 들을 수 없지만, 심안(心眼)이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듯이 심독(心讀)을 하며 우리는 우리의 입을 빌린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목소리를 듣고자 우리 자신이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열어두느냐 하는 것입니다.
4. 화자와 중계자 : 그(녀)는 바로 그(녀)인가?
눈은 마음의 거울이라 했습니다. 그 사람의 눈을 보면, 그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내가 ‘보는 것’은 바로 ‘내가’ 보는 것이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제 각기 자기 존재 이유를 갖고 살지만, 우리가 세상을 대할 때에는 언제나 나에 대한 삼라만상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 들꽃이 있는데, 무수히 많은 잡초들 사이에 숨은 듯 피어 있습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그 꽃은 ‘꽃’이었는가. 분명코 우리가 그 꽃에 주목하기 전부터 그것은 꽃이었겠으나, 우리에게는 잡초(雜草)라는 한낱 무성하고 잡스러운 풀들 가운데 자라나 있는 한낱 잡스러운 풀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춘수가 <꽃>이라는 시에서 말했던 꽃처럼 말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 '꽃')
다만 그의 이론은 이렇게 수정해 놓는 편이 좀 더 낫겠습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나에게는 이름 없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요컨대, 보기 전에 이미 앎이 있습니다. 잡초들 가운데 들꽃 하나가 우리 눈에 띄기 위해서는 우선 이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잠시 동안 머리속을 맴돌다 헛되이 스러져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름을 붙이고 또 그리하기 힘든 것들은 비슷한 것의 이름으로 대신 부릅니다. 그런데 그 때문에 생기는 혼동. 1) 이름과 사물의 혼동 : 꽃님이는 꽃처럼 예쁘게 생겼을까. 으뜸이는 무엇이나 잘할까. 푸른 하늘과 푸른 강물과 푸른 벌판은 모두 같은 색일까. 그리고 2) 이름과 이름의 혼동 : 이 춘향이가 그 춘향인가?
<춘향전>을 읽었든, 아니면 얘기로만 들었든 간에 우리의 마음에 그려지는 춘향은 비록 퇴기(退妓)의 딸로 태어났지만 정숙하며 정조가 있고 그러면서도 성적 차별과 신분의 제약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는 당당한 여성입니다. 우리말의 문법 체계에는 없는 용어이기는 해도, 춘향은 이미 일반명사입니다. 마치 <꽃>의 ‘꽃’처럼. 그녀의 이름은 <춘향전>에 구속되지 않고 논개처럼, 황진이처럼, 윤심덕처럼 홀로 쓰여도 의미를 갖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추천사>를 읽으며 우리는 향단에게 그네를 밀라고 이르는 그녀를 춘향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주저함 없는 태도가 <추천사>의 그녀를 보증해 준다고 할 수 있을까요? <추천사>의 ‘춘향’(어쨌든 춘향이 맞다면)은 확신에 찬 그 춘향이가 아닙니다. 그녀는 고뇌하고 있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춘향입니다. 그녀는 신분이나 성의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 춘향이가 아니라 인간이 놓인 일상의 삶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하는, 존재론적 자유를 동경하는 춘향입니다. 유교적 덕목을 갖춘 그 춘향이가 아니라 불교적 인생관을 받아들일 줄 아는 춘향입니다. 혹여 이 춘향이 그 춘향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춘향은 그 춘향이 아닙니다. 만일 그러했다면, <추천사>는 <춘향전>의 번역판에 불과했을 것이고, 춘향은 서정주의 춘향이 고작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추천사>를 읽으며 <춘향전>에 구속되어 있지 않은 춘향을 만나며, 나아가 향단에게 그네를 밀라고 이르는 ‘나’의 모습을 꿈꾸게 됩니다. 그것은 이 작품이 우리에게 빈칸을 제공하는 미덕을 지녔으며, 그것도 정해진 답이 아니라 그것이 채워짐으로써 시 전체의 의미가 변화하는 빈칸을 제공하는 미덕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추천사>는 시간이 흘러도 계속 읽혀지게 됩니다.
빈칸의 일반 명사는 그밖에도 수많은 시들에 깃들어 있습니다. 예컨대 ‘순이’라는 이름 하나도 장만영의 <달․포도․잎사귀>에서는 달빛과 뜰과 포도 넝쿨 사이에 어린 잎새 마냥 서 있는 곱고 순하디 순한 순이의 모습으로 사랑하는 모든 연인의 이름이 되어 등장하며, 임화의 <네 거리의 순이>에서는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에 선 순이의 모습으로 무기력한 지식 청년의 양심을 깨우는 모든 누이의 이름이 되어 등장하고, 윤동주의 <소년>에서는 강물 속에 비추어지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을 지닌 순이의 모습으로 평온했던 옛날을 추억하게 하는 모든 기억의 이름이 되어 등장합니다. 이런 이름들이 시인에게는 고유 명사였을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우리들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떠오르게 하는 일반 명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추천사>의 ‘나’는 일반 명사인 춘향이라 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그런 것처럼 암묵적으로 전제해 오기는 했습니다. 사실 명칭 부여의 여부와 무관하게 상황적인 맥락은 이 작품의 목소리를 ‘춘향’으로 추정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말하려고 합니다.
<공무도하가>를 배웠다면, 그 누구의 임자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던 백수광부(白首狂夫)의 처인지, 아니면 백수광부의 처가 불렀다는 노래를 들은 여옥인지 분명치 않다는 지적 또한 들어 알고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를 백수광부의 처가 부른 노래로 인정한다면, 인간의 감정으로야 어찌 가슴이 찢어질 듯 고통스러운 것을 노래로 부를 수 있을 것이라 감히 생각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노래 이전의 통곡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 대신에 이를 여옥의 노래로 인정한다면, 모든 이별하는 사람들에게 바쳐지는 애달픈 연민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보편성의 획득이라고 해 둡시다. 어쩌면 <공무도하가>가 한 편의 시가로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거쳐 세월을 겪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지 않을까요? 하지만 달리 보면, 이 노래 속에서 사별의 고통을 겪는 주체를 떼어버리고 노래 부르는 사람만을 생각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만일 고통스러워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떼어버린다면, 노래는 한낱 그럴듯한 상상으로 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무도하가>처럼 <추천사>에서도 목소리의 주인공과 말하는 이가 갈라서는 부분이 있습니다. 돌려 말하자면, 목소리의 주인공을 ‘시적 자아’라 부르고, 말하는 이, 곧 화자를 ‘중계자’라고 부를 때의 구분선이 그것입니다. 얼추 비슷한 의미로 뒤섞어 말할 만한 여지도 있기는 하지만, 나는 지금껏 설명해 온 틀에 이 두 개념을 집어넣어 분명한 구분선을 다시금 획정하려고 하는 중입니다. <추천사>의 그녀를 춘향이라고 쉽게 추정한 것은 다름 아닌 목소리의 유사성 때문이었다. 비록 상황은 다를지 몰라도 <춘향전>의 춘향도 그러한 정서의 폭에 싸여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라고 말하는 목소리의 주인공 말고, 정작 이 작품을 노래처럼 부르고 있는, 혹은 누군가에게 전하듯 말하고 있는 이는 그때의 그 춘향과는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시의 1연을 앞에서 풀이한 방식대로 다시 읽어 보면, 그네가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것은 그네를 탄 사람의 위치에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네를 미는 사람의 위치에서 그러한 것이니까요. 무엇보다도 이제 지상의 모든 인연을 끊고 저 푸른 하늘로 비상(飛翔)하고자 하는 예의 그 춘향이 긴장되기도 할 것이고 절박하기도 할 상황에서 재촉하고 또 다시 재촉하는 조바심을 부린다는 것이 좀 어색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 작품에서 화자, 곧 우리에 대한 중계자를 향단이라고 가정해 봅니다. 그녀는 춘향은 결코 될 수 없지만 그녀의 생각을 우리에게 대신 전해 주는 중계자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녀는 춘향이 말하는 것뿐 아니라 말하지 못하는 것까지도 우리에게 옮겨 줄 수 있습니다. 그네를 힘껏 밀어 올릴 때마다 춘향이 염원하고 좌절하는 것을 온몸으로 느낍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중계자로서. 이런 점에서 <추천사>에서 시인이 끼어들 자리를 향단이라고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향단을 통해 말하게 됨으로써 시인은 비로소 이 짧은 시 속에 보편적인 세계를 구축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기능적인 장치인 화자, 곧 중계자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5. 갈등의 출발로서 감상
이 글은 독자들에게 향단의 길을 안내하려는 목적에서 쓰여졌습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크게 세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 번째 질문, 숙명의 끈을 풀 자는 누구인가? 두 번째 질문, 어떻게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것인가? 세 번째 질문, 그(녀)가 바로 그(녀)인가? 그리고 각각에 연결된 두 가지 개념들인 문제 상황과 도식, 목소리와 시적 자아, 화자와 중계자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처음의 두 개념은 시의 전체적인 장면과 주제 도출의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며, 다음의 두 개념은 그러한 상황에 맞닥뜨려진 주체의 정서적 태도와 표정을 결정하는 것이고, 마지막의 두 개념은 그것을 독자인 우리들에게 중계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목소리와 화자는 겹쳐 존재하기도 하고 현대시에 와서는 특히 화자의 기능적 중요성이 더 커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여섯 개념 가운데 중심이 되는 것은 ‘목소리’입니다. 그것이 시로 하여금 정서적 구성물이 되게 합니다.
짐짓 <추천사> 한 편을 내세워 함께 들으려 했던 것이 목소리에서 울려나오는 말의 내용이 아니라 바로 목소리의 떨림 그 자체였습니다. 그것은 이제 멀리 밀려나가 가장 높이 솟은 그네 위에서도 여전히 ‘나를 밀어 올려 다오.’ 하고 간절히 뇌이는 마음의 떨림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향단의 손끝을 미처 떠나지 않았으면서도 ‘나는 아무래도 갈수가 없다.’고 고통스러워하는 마음의 떨림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그 떨림을 자신의 것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 작품만이 아니라 다른 현대시들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던져 볼 만하다는 것도 알 것입니다.
공부할 용어와 개념들
감상, 발상(시적 발상), 함축, 재현, 근대, 역설, 아이러니(반어), 문제상황, 기억과 예기, 서정적 주체, 시의 의미, 낭만주의적 전통, 근대시, 모더니즘, 상징, 시 쓰는 주체, 시인, 시점(초점화), 갈등, 갈등 해소 방안, 거리와 욕망, 대상화된 세계, 주체로서의 세계, 호흡, 율격, 행(시행), 시행의 배열, 3보격, 자수율, 개인적 서정, 집단적 정서, 전통시, 가창, 목소리, 근대적 변용, 율조의 그래픽화, 시적 자아, 독자, 맥락, 빈칸, 보편성, 말하는 이(화자), 기능적 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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