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끄는 말
오늘 우리는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읽어 보려고 합니다. 윤동주 시인은 1917년 겨울 북간도에서 태어나 조선이 해방되기 불과 몇 개월 전인 1945년 2월에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친 분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는 불운했던 문학 청년이었습니다.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해 보지도 못했고, 출판마저 어려워 어찌어찌하여 그가 죽은 뒤에야 남아 있던 필사본으로 시집을 엮어낼 수 있었던, ‘시인’이라는 이름도 살아 있을 때에는 누려보지 못했던 안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의 시집을 함께 읽습니다.
그의 사후에 사람들이 그에게 ‘저항시인’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 까닭에, 그는 연희 전문 시절의 미소를 띤, 한껏 여유 있는 젊은 청년으로 사진 속에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수줍음 많이 타고, 남모르게 두려움 많았던, 그리고 제 사촌에게 평생 열등감을 가지고 살았던, 여린 마음의 윤동주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2. 두 개의 시집(1)
자선 시집(自選詩集)은 시인 자신이 편집자가 되어 작품을 고르고 배열하여 만든 시집을 말합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말하자면 자선 시집인 것이지요.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 시집은 유고 시집(遺稿詩集)이기도 합니다. 시인이 남긴 필사본에 그가 죽기 전까지 써 두었던 다른 작품들이 보태어져 그의 사후인 1948년 같은 이름으로 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이 시집은 자연스럽게 시인이 만들어 놓았던 시세계와 결과적으로 만들어진 시세계가 공존하는 묘한 공간이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앞의 시세계를 먼저 살펴볼까요?
이 시집은 특징적으로 시에 덧붙여 연도나 날짜를 부기(附記)하고 있습니다. 그의 소년 시절 발표되었던 몇 개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미발표작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은 특별히 주목해 둘 만합니다. 이것은 시인이 자신이 쓴 시들에 특별한 자의식을 부여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이런 사연이 있습니다. 윤동주에게는 같은 나이의 고종 사촌으로 송몽규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같은 동네에 살았으며 같은 명동소학교를 다닌 친구였습니다. 그들은 서울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잡지를 부쳐다 읽었고, 함께 문학소년반도 하였으며, 함께 월간 잡지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소학교 졸업 후에 송몽규가 고향을 떠나 평양에 있는 숭실학교에 옮기자 윤동주도 몇 해 후 같은 학교로 옮기기도 했습니다. 둘은 연희전문학교를 함께 다니기도 했고, 졸업 후 함께 일본 유학을 떠났습니다. 처음 윤동주는 동경에 있는 릿교대학(立敎大學)으로 건너갔지만, 얼마 되지 않아 송몽규가 있던 경도로 옮겼으니, 그것도 공통점이 될 것입니다. 게다가 불령선인으로 함께 체포되어 해방을 맞이하기도 전에 죽임을 당한 것도 같았습니다. 아마도 윤동주와 송몽규 사이에는 우연에 의해 만들어졌다고는 보기 힘든 삶의 긴박(緊縛)한 고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고리라는 것이 주로 윤동주에게서 송몽규를 잡아 걸어놓은 것에 가까웠습니다.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 본 송몽규는 윤동주에게는 명백하게 부러워할 만한 성격과 능력과 재주를 지닌 라이벌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송몽규는 이미 중학교 3학년 때인 1934년 겨울 동아일보 신춘문예 콩트 부문에 당선되었고, 그의 작품은 다음해 1월 1일자 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같은 문학 소년으로서 윤동주에게 이것은 매우 강렬한 문학적 자극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무렵은 윤동주가 자기 작품에 날짜를 매겨가며 다듬고 기워 남기기 시작한 때입니다.
그렇다면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이러저러한 자의식들의 총집합체라고 볼 만하지 않을까요? 누가 읽든, 읽지 않든 간에 이 시집은 반드시 엮어내었어야 할 시인 자신의 과업이었다는 것이지요. 재미있는 것은, 실상이 또한 그러하였다는 것입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면서 그간 써 두었던 작품들을 묶어 시집을 출판하려 했습니다. 그에 앞서 그의 지도 교수였던 이양하―여러분은 이 사람을 유명한 수필가로 알고 있지요.―에게 먼저 보였겠지요. 그런데 이양하 교수는 자신의 제자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위험을 직감하고 있었나 봅니다. 하기는 친일 신문들이나 잡지들마저 폐간되는 수상한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윤동주에게 시집 출간을 미룰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이쯤이면 꿈이 좌절되었다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윤동주는 그 대신 일일이 공책에 옮겨 적어 세 권의 필사권을 만들고 맙니다. 그 중 하나는 스승인 이양하 교수에게, 하나는 후배인 정병욱―나중에 국문학자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요.―에게 건네주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이 보관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 필사본의 운명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몇 해 지나지 않아 윤동주는 일본에서 옥사(獄死)를 하게 되지요. 그와 함께 한 권의 필사본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스승인 이양하 교수에게 주었던 필사본도 그 후 전쟁의 와중에 사라지고 맙니다. 윤동주의 2년 후배인 정병욱은 일본 제국주의 말기에 학도병으로 차출되어 자칫하면 죽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정병욱은 떠나기 전 자신의 어머니에게 신신당부를 하여 윤동주의 필사본을 잘 싸서 마루 밑에 숨겨 두게 했다고 합니다. 만약 정병욱이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정병욱이 태평양 어느 섬에서 돌아올 수 없는 원혼이 되었더라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언제 세상에 있기라도 했는지 알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시집은 운명적으로 살아남은 것이고, 운명적으로 우리 앞에 놓여지게 된 것입니다.
물론 필사본으로라도 시집을 내고자 한 것은 단순히 송몽규에 대한 열등감이나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열등감이라기보다는 열등감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 콤플렉스라기보다는 콤플렉스의 미학적 승화를 나타내 주는 표지라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자선 시집의 마지막 작품이 「서시」라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서시’란 본디 시집의 성격을 밝혀주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시인의 문학적 삶의 태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3. ‘바람’
흔히 이 시는 시인의 역사의식과 저항 정신을 잘 드러낸 작품으로 읽히곤 합니다. 그러니 ‘별’이라거나 ‘바람’, ‘하늘’, ‘부끄럼’ 등이 모두 현실의 무엇인가를 환기하는 것으로 읽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이를테면 별은 올곧은 정신이나 민족적 희망을 뜻하는 것이고, 바람은 역사적 시련, 아주 노골적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회유나 탄압을 뜻하는 것이라고 보는 식이지요. 그렇게 되면, 부끄럼은 응당 역사적 성찰의 내용으로 읽히겠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그렇게 읽힐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게 보면 시상의 연결이 부자연스러워지는 부분이 남게 됩니다. ‘시 쓰는 주체’, 곧 우리가 서정적 주체니 시적 자아니 하고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합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바람이 잎새에 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요? 이것은 무자비한 바람일까요? 만약 바람이 시대의 시련이고 아픔이라면 그는 역사적 호명의 상황에서 나약한 자신의 존재를 깨달은 것일까요? 그건 아닌 듯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이 바람은 무자비한 바람이기는커녕 미약한 바람인 것 같습니다.
‘일다’라는 말은―이제 눈치 챘겠군요―, 일어난다(起)는 뜻입니다. 외부의 어느 방향에서 불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에서 만들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잎새에 이는 바람이란, 잎새를 떨게 만드는 외부의 바람이 아니라 잎새가 만들어 내는 내면의 바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괴롭다’고 말할 때에는 고통스럽다거나 두렵다거나 무섭다거나 할 때와는 다른 내면적 자각이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외부의 바람이 잎새를 흔들리게 한다고 해서 ‘괴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제 스스로 흔들렸기에 괴로워하는 것이지요.
바람이 등장하면 무조건 시련을 떠올리는 것은 시 감상에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잠깐 옆길로 나서 보면, 「또 다른 故鄕」(1941.9)에서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불어오는 ‘바람’은 그것이 기독교적 의미의 ‘성령(聖靈)’을 뜻하는 게 아닌 바에야 서정적 주체를 일깨우는 ‘자각(自覺)’을 의미하는 것이 되며, 그보다 앞선 작품인 「바람이 불어」(1941.6.2)에서 ‘바람이 자꼬 부는데 / 내 괴로움에는 理由가 없다’의 ‘바람’ 또한 내적인 동요를 뜻한다고 보아야 뜻이 통하게 됩니다.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理由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理由가 없을까,
단 한女子를 사랑한 일도 없다.
時代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꼬 부는데
내발이 반석우에 섰다.
강물이 자꼬 흐르는데
내발이 언덕우에 섰다.
(「바람이 불어」)
한 여인을 사랑한 적도 없고,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는데, 바람은 왜 부는 걸까요? 그리고 일반적 은유 관습처럼 바람을 시련의 의미로 본다면, 바람이 부는데 왜 괴로움의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걸까요? 게다가 괴로움의 이유도 없는데, 그는 왜 구태여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걸까요?
이것은 일종의 아이러니입니다. 게다가 더 심각한 아이러니가 있지요. 심각한 방황의 시절이 있었고, 이 시를 쓰고 있던 중에도 그는 방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지금 그에게 기독교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방편이 되어 있습니다. 이 기독교 담론에서 보자면, ‘반석’이란 믿음의 반석, 즉 베드로를 뜻하는 것이고 그 위에 세운 집, 원래의 의미로는 교회인데, 이 집은 쓰러지거나 무너지지 않는다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의 주체는 ‘바람이 자꼬 부는데 / 내 발이 반석우에 섰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행이라는 걸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한 여자를 사랑한 적도 없고, 시대를 슬퍼한 적도 없는데도 버젓이 반석 위에 서 있는 것이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에서 바람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동요, 혹은 깨달음 같은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잎새에 이는 바람’은 사소한 바람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바람은 매우 심각한 바람인데요, 이를 알기 위해서 윤동주의 대학 시절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윤동주는 어려서부터 집안의 장남으로서 아버지의 기대를 한껏 받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윤동주가 상과에 들어가 돈을 벌고 집안을 일으키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윤동주는 문학소년에서 문학청년으로 커가고 있었습니다. 그에 따라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이후로는 내적인 고뇌도 함께 커갔습니다.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에도 잘 드러나 있듯이, 식민지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 수행에 직접적으로 동원되던 이 시기에는 문과 졸업생이란 취업과는 거리가 먼 존재들로 제 스스로를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윤동주와 함께 공부하던 최경섭, 유영 등은 일찍부터 시인으로서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으며, 그의 사촌 송몽규는 비록 시인의 호칭을 얻지는 못했지만 주변의 인정을 받고 있었지요. 윤동주는 불안감과 조바심, 열등감과 버릴 수 없는 소망과 애착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방학이면 윤동주는 고향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와 마주 대해야 했습니다. 그는 시 쓰기를 포기할 수 없었지만, 이미 아무 고민 없이 시만 쓸 수 있는 행복한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어릴 적 교육 환경과 체험들이, 행동가에 가까웠던 사촌 송몽규와의 인간 관계가, 대학에서의 현실 인식이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눈을 뜨게 했지만, 고향집에 돌아와 보면 그곳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자꾸 묶어두려는 개인적 공간으로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
내 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었다.
어둔 房은 宇宙로 通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風化作用하는
白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魂이 우는 것이냐
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쫒는 것일게다.
가자 가자
쫒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故鄕에 가자.
(「또 다른 故鄕」)
4. ‘하늘’과 ‘별’
「또 다른 故鄕」이 ‘나’의 탈출구로 하늘과 우주로 통하는 ‘또 다른 고향’을 선택한 것은 그가 수평적인 사회적 소통의 통로를 찾지 못해서였을 것입니다. 가족으로도, 벗들로도, 사회나 역사적 지평으로도 열려 있지 못했던 그의 부끄럼 많은 내면 세계는 그로 하여금 신(神)에게 의지하게 하면서, 때로는 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면서 끊임없이 수직적 소통 통로를 모색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 무렵 이미 ‘별’이라는 이미지로 나타나 있었습니다.
季節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읍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오,
來日 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靑春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하나에 追億과
별하나에 사랑과
별하나에 쓸쓸함과
별하나에 憧憬과
별하나에 詩와
별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후략)
윤동주에게 별은 대화의 상대방이었고, 내면의 표상이었으며, 위안을 얻는 안식처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 별은 하늘 아래 어느 곳, 혹은 누군가와 대체할 수 있는 그 무엇은 아니었던가 봅니다. 서울에 오면 북간도의 어머니가 되었다가 고향에 가면 다시 ‘또 다른 고향’이 되어 멀찍이 물러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서시」로 돌아가, 다음과 같은 진술을 읽어 봅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이 별은 그로 하여금 ‘사명감’을 갖게 만드는 ‘양심’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혹은 ‘神의 계시’였을까요? 그렇다면, 이 ‘별’은 2달이 지나자 ‘隕石’이 되어 그의 사명감을 앗아가 버렸다는 것일까요? 이 시로부터 그의 시에서는 더 이상 ‘별’이나 ‘하늘’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속에
내 얼골이 남어 있는 것은
어느 王朝의 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가
나는 나의 懺悔의 글을 한줄에 주리자
-滿二十四年一個月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어 왔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懺悔錄을 써야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웨 그런 부끄런 告白을 했든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 보자.
그러면 어느 隕石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속에 나타나온다.
(1942.1.24)
1942년 1월 24일이면 그가 일본으로 유학 가기 직전이자 ‘창씨개명’을 한 직후입니다. 이 시의 초고 여백에는 “詩人의 告白, 渡航證明, 上級, 힘, 生, 生存, 生活, 文學, 詩란? 不知道, 古鏡, 悲哀, 禁物” 등이 적혀 있으니, 아마도 그의 유학과 관련된 고뇌의 일단일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일제말기의 내면성찰이라면, ‘구리거울’을 통한 민족의식이나 역사의식이 요청되었을 것이며, 이것이 ‘王朝의 유물’, 즉 ‘고향 내지 조국’의 비존재성을 안타깝게 만드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가 ‘참회록’을 써야 할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이 ‘지금’에 다름 아니며, <내면성찰>의 결과를 그 스스로 보게 되는 것 역시 ‘지금’이라면 오히려 ‘숙명’을 이겨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여백에 적어 놓았던 말들은 그의 <내면성찰>이 오히려 자학으로 귀결되어 가는 과정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별’이나 ‘하늘’을 ‘시대의식’이나 ‘역사의식’들과 정당하게 결합시키려고 한다면, 그의 시적 인식이 시대의식이나 역사의식으로부터 멀어져 갔다고 평가하든지, 아니면 좀더 명확히 시대의식이나 역사의식을 드러낼 시대적, 역사적 ‘상징’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일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더 이상 도피하지 않겠다는 성숙한 의지로 보려고 합니다. ‘하늘’과 ‘별’이 시인을 지켜 준 것이 아니라, 시인이 ‘하늘’과 ‘별’로부터 독립해 가는, 마치 부모의 품을 떠나 의젓한 성인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5. 두 개의 시집(2)
자선 시집의 마지막 시는 「서시」였습니다. 하지만 시집 출간이 좌절되고 필사본으로 다시 만들었을 때, 윤동주는 「서시」보다 앞서 쓴 「별 헤는 밤」에 한 연을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게외다
우리는 그동안 마지막 연의 급작스러운 ‘그러나’라는 표현을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만, 가만히 보면 이 연은 ‘별’을 대신해 ‘내 이름자’를 가지고 있고, 다시 ‘풀’을 내세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선 시집과 유고 시집 사이의 단절과 성숙이 이 시에 단서처럼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일본에 건너간 윤동주는 「흰 그림자」, 「사랑스런 추억」, 「흐르는 거리」, 「쉽게 씌여진 詩」 같은 시들을 씁니다. 그리고 그 시들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세상으로부터의 고립된 사슬을 풀어냅니다. 수평적 소통의 통로를 찾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의 마지막 시 「쉽게 씌여진 詩」에 도달하게 됩니다.
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六疊房은 남의 나라,
詩人이란 슬픈 天命인줄 알면서도
한줄 詩를 적어 볼가,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學 封套를 받어
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敎授의 講義 들으려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沈澱하는 것일까?
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六疊房은 남의 나라
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慰安으로 잡는 最初의 握手
.(1942.6.3)
“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 말에서는 지금껏 그의 시가 자기 자신을 자족과 위무의 공간 속으로 내몰아 왔다는 자각의 목소리가 강하게 울려 나옵니다. ‘부끄러움’ 대신 ‘희망’과 ‘사랑’, ‘기다림’ 등을 시 속에 끌어들였던 것은 새로운 계기를 만들고자 하는 그의 노력의 일환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와서 ‘부끄러움’은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획득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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