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투리 : 콩과 식물의 열매를 싸고 있는 껍질.
모두잡이를 뜻하는 '고'와 알갱이의 단위를 뜻하는 '톨'(톨이)가 합쳐져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꼬투리'는 위의 뜻을 기본으로 삼지만 확장된 의미로서 '실마리'를 뜻하기도 한다. 특별한 형식 없이 생각을 발전시켜 가는 데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는 단서들을 논의하는 글의 묶음으로 이 말을 주제어 삼아 앞세운다.
읽기 전에 : 이 글은 한 스무 곡(?) 정도의 가사를 정리할 때까지 덧붙여가며 글을 계속 쓸 생각이다. 글을 다 쓰고 올리는 방식으로 그동안 블로그에 글을 올리다 보니, 여력이 없다. 그냥 숨김없이 생각의 전개 과정을 드러내면서 글을 만들어갈까 한다.
처음 느낀 그대 눈빛은
혼자만의 오해였던가요
해맑은 미소로 나를
바보로 만들었소
내곁을 떠나가던 날
가슴에 품었던 분홍빛의
수많은 추억들이
푸르게 바래졌소
(유재하 작사, 작곡, 노래, '사랑하기 때문에'에서)
작곡을 하는 작사가는 마디 개념이 분명하고 애써서 맥락과 이야기를 완결지으려는 의식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비약이 넘치는 가운데 함축도 따라서 커져서 모호한 만큼 상상할 여지도 큰 특징이 있다. 만남을 말하다가 느닷없이 헤어짐으로 화제가 넘어가는 이 가사처럼 유재하의 여러 노래 가사들에서는 가사의 흐름이 곡의 진행을 따라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물론 이 말을 하려고 가사를 인용한 것은 아니고, 여기서 이별의 장면을 묘사하며 '가슴에 품었던 분홍빛의 수많은 추억들이 푸르게 바래졌소'라고 말하는 부분 때문이다. 이 가사가 나타내는 의미는 수줍었던 사랑이 소용없게 되어 버렸다는 것.
분홍은 강함과 권위를 뜻했기에 남성의 색으로 여겨져 왔다고 한다.(그렇다. 핑크는 남자! 그리고 블루는 여자.) 서양에서 19세기까지 그러했다는 것인데,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이 색 배치가 역전되어 분홍은 여성스러움을 나타내는 것으로 의미가 바뀌었다. 이 여성스러운 색채는 고정된 성 정체성과도 일정한 영향 관계를 갖게 되는데, 여성스럽다는 것의 속성은 적극성보다는 소극성, 외향성보다는 내향성과 만나고 이러한 맥락에서 여성스러운 색채로서 분홍은 수줍음, 순수함, 소녀다움, 행복감 같은 의미와 연결되기에 이른다. (여성스러움이 성년이 되기 직전의 소녀를 모델화하는 까닭). 위 가사에서 '분홍빛'의 색채 경험이 '수줍은 사랑'을 연상시키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리고 이 색채 경험이 내가 이 가사를 기억하게 된 배경이다.
색채에 대한 감각은 우리의 오감 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고 섬세하고 심지어는 지배적이어서 세분화된 직접 서술이 가능할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표현된 색채 경험은 우리에게 경험으로서보다 개념으로서 직접적으로 수용되기 쉽다. 방금 전의 표현이 이중적임을 유의해 주길 바란다. 표현된 색채가 작자 혹은 화자에게 경험된 것인지부터가 모호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가 '푸른 하늘'이라는 표현을 시각적 이미지라고 부를 때(정확히 표현하면 시각적 이미지가 아니라 시각적 표상이 되겠지만), 우리는, 당신은 어떤 이미지를 마음속에 떠올리는가? 그것은 경험되고 있는 것인가? 혹은 경험된 것인가?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변화가 있는가? 색채 경험의 시적 표현과 관련하여 우리가 놓치는 것 중 하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이 질문 자체인 경우가 아주 빈번하다.
혹자는 가사를 잊지 못하면 잊지 못하는 거지, 뭐 설명이 필요할 정도냐.... 하고 물을 수 있겠지만, 그리고 사실 이에 대한 설명을 하려고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 게 사실이지만, 이 노래가사에서 내가 어떤 색채 경험을 했는지, 그 경험이 왜 이 가사를 잊지 못하게 하는 것인지를 밝혀야 하기 때문에 우회가 길어지고 있다고 이해해 주기 바란다. 이 부분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여러분 중 일부에게 스스로 납득할 근거를 줄지도 모르므로.
말 나온 김에 조금만 더 우회해 보기로 하겠다. 분홍빛은 붉은빛과 푸른빛의 파장이 조합을 이룬 것이라고 배웠다. 푸른빛은 파장이 짧고 에너지가 높은 반면, 붉은빛은 파장이 길고 에너지가 낮다고. 만약 분홍빛에서 붉은빛의 파장이 줄게 되면 분홍빛은 푸른빛 쪽으로 옮겨가게 된다는 뜻이다. (만약 저녁 노을 질 무렵에 대기 중에 수증기가 많아지면 파장이 짧은 푸른빛은 모두 산란이 되어 지표면에 도달하지 못하고 파장이 긴 붉은빛만 도달하게 됨으로써 하늘이 붉거나 주황빛으로 물드는 것처럼 보이고, 반면 밝은 낮이나 바닷물에 비춰진 빛에서는 푸른빛이 더 많이 산란되어 푸르게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이러한 정보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분홍빛에서 붉은빛과 푸른빛의 상관관계만 떠올리면 된다.) 우회 끝.
아마도 유재하는 특별한 과학 지식을 동원할 필요도 없이 사회적으로 약속된 색채 감각과 정서 연상 체계에 의해 수줍은 사랑을 분홍빛으로, 식어버린 사랑을 푸른빛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표현된) 색채경험 속에서 '바래졌소'라는 표현이 선택된 것은 그냥 넘기기에 의미 심장하다. 사전적 의미로(이 블로그 전체에서 이 말은 '빈도가 가장 높은 맥락적 의미'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바래다'는 '볕이나 습기를 받아 색이 변하'는 것을 말하거나, 또는 '볕이나 약물 등으로 빛깔을 희게 하'는 것을 말한다.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색이 빠지는 현상에 대해 이 표현을 사용하며, 바랜 결과로서의 색은 기존의 것이 흐릿해지거나 그 결과 희게 된다. 그렇다면 '분홍빛이 푸르게 바래졌소'는 '바래다'의 용례로 보면 적합하지 않은 사용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는 왜 이 표현을 썼던 것일까.
나는 유재하가 이 노래 가사를 구성하면서 의도적으로 신묘한 발상과 낯선 표현을 사용하려 노력했다고 여기지 않았기에 이 기묘한 결합은 그의 색채 경험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푸르게 바래졌소'는 그 경험의 물리적인 차원의 비유이고, 적극적인 사랑(이것은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가사 속 주인공의 더 열정적인 태도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을 뜻하는 붉은빛은 가사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런 만큼 가사 속 주인공에게는 '말할 수 없었음', 혹은 '이룰 수 없었음'을 뜻하는 빈자리(부재요소)이다. '분홍빛'은 '가슴에 품었던 수많은 추억'이지만 동시에 '혼자만의 오해'이기도 한데, 당장은 붉은빛과 푸른빛 사이의 불안정한 상태이지만 결국 붉은빛을 갖지 못해 푸른빛으로 바뀔 수밖에 없는 비극성의 출발점을 나타낸다.
만약 '바래다'를 빛깔이 빠진 것의 의미로서 사용되었다고 본다면 '푸르게'는 붉은빛이 빠져버린 빛깔인 것이고, 퇴색된 것으로서 보면 소용없게 되어 버린 외사랑인 것이며, 생기가 사라진 것으로서 보면 추억이 메말라 버린 현실에 대한 아픈 자각인 것이다.
[보충]
이 노래가 내게 가슴 아픈 것은..... 음, 87년의 내게 유재하의 노래들이 모두 가슴 아팠지.... 다음 가사가 뒤이어 나오기 때문이다.
어제는 떠난 그대를
잊지 못하는 내가 미웠죠
하지만 이제 깨달아요
그대만의 나였음을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
내 모든 것 드릴테요
우리 이대로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리
나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여기서 깨달았다는 것은 현실로 돌아왔다는 게 아니다. 완전한 자기 세계 속으로 함몰한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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