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들 처음부터 국어 교사가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 어떤 계기가 있기도 한데, 다음과 같은 몇몇 경우들이다.
* 학창 시절에 좋아하는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분이 국어 선생님이셨다. 나도 그 분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 (변이형) 수업 시간에 영화 얘기며 문학 작품 얘기며 재미있게 말씀해 주시는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분 덕분에 국어 과목을 좋아하게 되었다. 나도 그 분처럼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
* 국어 과목의 성적이 좋지 않았는데,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성적이 많이 올라가 국어에 소질이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남들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국어 교사를 하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 친구들과 국어 공부를 할 때 그 아이들이 잘 모르는 것을 설명해 주면 쉽게 잘 이해된다고 말해 주던 데서 내가 국어 교사에 적성이 맞겠구나 생각을 했다.
햇수로는 5년 11개월, 실제로는 4년 여 정도의 기간을 교단에 있었던 나는 그동안 내 자신이 국어 교사로서 자질이 있다는 생각을 그다지 해 보지 못했다. 열패감 같은 것은 가져 본 적은 있다. 그 때문에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 것이지만......
내가 수업을 능숙하게 이끌어가기는 했다. 대학 4학년 때 교육실습을 나가 첫 수업을 할 때에도 떨리지 않았고 말은 유창하고 수업 준비 자료도 괜찮았다. 자세와 몸짓과 시선도 훌륭했다. 이런 모습을 부러워한 친구들도 있었을 것이다. 교사로 임용이 되어 첫 학교에서 첫 수업을 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몇 년 수업을 해 본 경력 있는 교사처럼 멋지게 수업을 해 냈다. 타고난 게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지 모른다.
굳이 밝히자면, 나는 교사로 타고난 사람은 아니다. 소심하고 인간 관계를 '시작'하는 일에 무척 서툴다. 가급적 다른 사람이 없이 혼자서 호젓이 내 일을 하는 것이 더 편하고 익숙하다. 누군가와 있는 일은 불편하다. 남과 함께 무엇인가 하려면 내 시나리오 안에 모두가 들어와야 한다. 내 사회적 정체성은 오래 훈련 받은 것이다. 청소년기를 주말마다 교회를 다니며 사람들과 교류해야'만' 했던 데서 비롯된 행동 규범이 어느 정도 내 사회적 자아의 한 부분을 잘 지탱해 주었기 때문이다. 싫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잘 하고 싶으면 더 잘 할 수 있다는 게 그동안의 훈련 과정에서 얻게 된 긍정적인 측면의 반대 급부였다고나 할까.
위에 예시로 든 것 중에서 국어 성적이 좋았다든지(흠...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는 언젠가 한번 얘기할 수도 있겠지...) 남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내 공부를 할 때 효과가 좋았다든지 하는 것은, 내게도 해당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나로 하여금 국어 교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해 준 것은 아니었다. 내 기억 속의 국어 선생님들은 계시지만, 내가 국어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도록 격려해 주시거나 혹은 내가 자극을 받았던 분들은 아니었다. 고백하자면, 그 시절에 나는 대학을 별로 염두에 두지도 않았더랬다.
학력고사 세대인 나는 대학 지원을 했을 때 다른 학과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는 국어교육과에 입학을 했다. 대학 생활 동안 학생 운동을 하고 대학 이후의 일을 준비하면서 전공 수업을 빼 먹는 일도 빈번했다. 그러고는 다른 과 친구들과는 교육 세미나를 열심히 했다. (아마도 그때 공부한 것이 대학 수업을 통해 들었던 것의 몇 배는 많았을 것이다. 내 평생의 교육적 자산의 큰 부분은 그때의 공부에 빚지고 있다.) 4학년 여름쯤부터는 아마도 대학 졸업은 하지 못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노동 야학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결국 중등 교사 자격증을 받고 졸업을 했다. (그때는 국립 사대 졸업자는 교사 의무 복무가 있었을 때였으나) 어떤 사정으로 교사 임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나는 부모님께 다른 일을 하려고 한다고 선언을 했다. 그러고는 모 중학교 국어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렇게 시작한 국어 교사로서의 삶이었지만, 수업은 화려하고 직무는 능숙했으며 16비트 XT 2 드라이브 IBM형 세운상가제 조립 컴퓨터에 24도트 프린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는 아이들의 언어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고는 아이들의 욕망과 결핍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고는 키 순서대로 번호를 매긴 담임 학급의 2번 도토리 같은 녀석의 삶의 의지 같은 건 하나도 없어 보이는 가출을 이해할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고는 교육은 학교 밖의 거시적 담론과 어울린다고 고정 관념처럼 생각하고 있었고, 그러고는 학교 안에서 수업 외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교육의 문제들은 잘 모르고 있었다. 교과서와 자습서와 시험과 체벌과 촌지 등이 비교육적인 문제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각하며 답답해 하면서도 수업 속에서, 교사의 발화와 행동 속에서, 학생들에 대한 기대와 요구 속에서, 수업이 시작되기 전, 혹은 끝난 이후에 그 장소가 어디인지와 무관하게 맺어지는 학생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교육적 이슈들이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 끝에 학생들과 교육적 의사소통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국어 교사가 되기 위해 새로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공부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읽힐지 모르겠지만, 국어 교사가 되기 위해 시작한 공부를 끝마치기 위해 학교를 그만 두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여행이 끝나자 길이 시작된 것처럼.
공적 강의에서 사적인 삶의 궤적을 여러분에게 소개하는 것은, 오늘 수업이 그 고백들을 공유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태어나서부터 국어 교사로서의 삶을 소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느 시점부터 그러한 생각을 했었을 것이고,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한 이후로도 아직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며, 혹 누군가는 나처럼 국어 교사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여러분이 과거의 두어 달 이전, 그보다 훨씬 더 과거의 어떤 시점에 국어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강렬하게 오랫동안 가졌다고 한다면, 오늘은 왜 그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그 생각을 하면서 어떤 삶의 의미를 떠올렸던 것인지를, 그리고 그 생각이 이끌어 가는 국어 교사로서의 삶의 미래에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게 될 것인지를 진지하게 점검해 보는 기회를 가져 보기를 바란다.
앞서 내 이야기를 정확히 끝맺지 않았으므로 조금만 더 이야기하자면, 나는 국어 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제대로 해 본 적 없이 어쩌다 보니 국어 교사가 되어 있었다. 만약 거기서 모든 일들이 끝났다면, 얼마나 위험한 사태가 벌어졌을까. 그 당시에는 한 학급에 55명의 학생. 20년 후에 한 학급에 25명의 학생. 국어 수업은 일주일에 5시간 또는 4시간. 평균 시수는 주당 24시간에서 주당 20시간. 내가 들어가는 학급 수는 5학급. 1년에 가르치는 학생은 270명에서 150명. 38년을 근무하면 5,700여 명에서 10,260명. 국어 교사의 일을 제대로 해 내지 못해 평생 오천 명에서 만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의 인생을 망가뜨리거나 상처를 주거나 하다 못해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존재로서 좋지 않은 영향력을 끼쳤을 수 있다. 미래 시점으로.
그리고 나는 국어 교사가 되고자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 시작했기에 현재 중고등학교 교실이 아닌, 여기 대학의 자리에 있는 것인데, 공식적인 지위로는 당연히 국어 교사가 아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내 역할이 국어 교사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2. 누군가에게는 행복한 국어 시간만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다
여러분의 기억을 호출하기 위해 내 기억 속의 국어 수업을 조금 더 소개해 볼까 한다.
내 중고등학교 때의 국어 선생님들 중 기억 속에 세 분의 선생님이 남아 있다. 그분들이 다들 고마운 분은 아니었지만, 귀감이든 반면교사든 간에 내게는 국어교육에 대한 기본적 관점을 갖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 중 한 분은 중학교 1학년 때인가 처음 만나 고등학교 올라갔을 때 먼발치서 다시 (다른 학급을 담당하시는) 국어 선생님으로 뵙게 되었고, 그 후 세월이 흘러 내가 대학의 신임 교수가 되어 지역의 인근 대학 같은 전공 분야 선배 교수님들을 뵙게 되었을 때 다시 교수로서 만나 뵙게 되었다. 문학을 공부하시고 문학을 가르치시고 문학에 대한 나름의 이론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은데 너무 이른 시기에 만났고 너무 먼 곳에서 만났으며 너무 늦게 다시 만났다.
내 고등학교 1학년 시기는 여전히 본고사가 시행되던 때였는데, 그 때문에 우열반으로 편성된 여름방학 특강반 구성에서 얼마 전 ROTC 제대를 하고 복귀(하신 건지 임용되신 건지는 기억 속에 분명치 않지만)하신 젊은 국어 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아주 열심히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관심을 가지고 수업을 듣던 중에 '약산약수(樂山樂水)'(그렇다, 약산약수!)의 발음과 뜻풀이를 야무지게 듣게 된 이후로 끝자리로 옮겨 일부러 그 시간이면 도시락을 까 먹었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내게 그런 일은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문학 소년과 음악 청년과 (다행히도 미술은 중3 이후로 포기하게 되어 미술 청년은 시작도 못해 본 일이 되었지만) 교회 오빠가 되어 정신이 없었던 터라 수업으로는 수학 23점(왜 본고사가 없어졌는데 여전히 본고사식의 월말고사를 봐야 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하지만 담임 선생님이시기도 했던 이때의 수학 선생님은 중고등학교를 통틀어 가장 존경하는 분이셨다.)이 기억 나는 거의 전부였지만, 3학년에 올라가니 공부를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드신 선생님이 담임이셨던 또 다른 국어 선생님이셨다. 이 분은 학급 배정을 받아 새 반으로 찾아갔던 그 날 그 시간에 반으로 자른 16절지 갱지(그러니까 32절지가 되겠다.)를 나누어 주시고는 자신이 희망하는 대학과 학과 명칭을 적어 내라고 주문하셨다. 이런, 대학에 대해서는 생각한 게 없었는데......
이 분은 70년대 말 광화문 등지에서 실력 있는 과외 교사로 이름 좀 날리셨다는 소문이 있었고, 사립 고등학교로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이름도 없고 진학 희망자들도 없어서 아주 우울해 있던 학교를 명문으로 만들고자 했던 이사장께서 이 분을 포함하여 몇몇 분들을 교사로 적극 영입하여 입시 결과를 높여 놓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당시에 인기 있던 코로나 승용차를 제공했다나 뭐라나 하는 소문도 있었는데, 아무튼 내가 다닐 때의 학교 분위기란 모의고사를 치르면 1등부터 60등까지 벽보에 붙여놓는 일이 일상이었고 그중 대다수가 서울대에 진학하는 신흥 명문을 이루고 있었던 터였다. 뭐, 재수에 삼수까지 쳤을 때 그러했겠지만, 그 전의 재수, 삼수생이 보태어져 이룬 성과이니 결과적으로는 입시 교육에 최적화된 학교였고 교육방식이었던 것은 분명했을 것이다. 담임 선생님, 아니 국어 선생님은 그 중에서도 탁월한 전문가였던 것이 분명하다. 이 분 덕분에 작품들은 대충 다 외울 정도였고 시험에서 물음 직한 지식들은 더도 덜도 아니게 딱 필요한 만큼 다 익히고 있었다. 그래서 시험을 잘 봤느냐 하면, 그렇기는 했다. 특히 도움을 얻었던 것은 용어를 정확하게 사용하는 습관을 익히게 된 것인데, 이것은 거의 내 교육 생활 반평생에 가장 유용한 수단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문학이나 국어를 이 분 덕분에 더 좋아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분으로 인해 대학 입학이 달라진 것도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그건 점수 때문에 선택한 차선책이었다) 이 분 영향으로 국어 교사가 되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유감스럽게도, 혹은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나는 문학을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고 어쩌다 보니 어린 시절부터 독학으로 공부를 했고 문학 소년으로 아호를 정하고 작품을 쓰기도 했고 어쩌다 보니 나의 내면은 온갖 상상으로 가득 찬 문학 세계였었다. 국어 선생님으로부터 문학의 눈을 넓힐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어쩌다 보니 음악 선생님이 그 역할을 해 주셨다. 음악 선생님 덕분에 시 낭송회를 찾아 다니고 그 분 덕분에 평생 알지도 못했을 시인을 일찍이 가까운 발치서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이것이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 기억 속에 존재하는 국어교육이고 국어 선생님들이다. 나는 어떤 영향으로 국어 교사가 되고자 국어교육과에 입학한 것은 아니었지만, 국어교육에 대한 몇몇 생각들을 관점처럼 갖게 될 영향은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국어 교사가 되기 위해서나, 혹은 일반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어린 시절에 문학 작품을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언어에 대한 무지를 아는 척하는 것은 때로는 필요한 적절한 전술일 수는 있지만 치명적으로 잘못된 전략일 수도 있다는 것, 국어 교사가 언어나 문학으로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기억되지 않는 것은 불행하다는 것 같은 것 말이다. 물론 경험이 사람을 만들고, 그래서 그 사람의 지식이 객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나는 길지 않았던 내 교사 시절이 어떤 학생에겐가 풍요롭지도 않은 채 위선적이고 존재감도 없게 여겨졌을까 두렵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기억 속에서 국어교육은 어떠했는가? 그리고 여러분의 국어 교사는 기억 속에서 어떤 모습이었는가? 서로의 기억을 공유해 보자.
기억 속의 국어교육 1
기억 속의 국어교육 2
기억 속의 국어교육 3
기억 속의 국어교육 4
3. 내가 경험한 국어 수업이 내가 실행하는 국어 수업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여러분이 국어 교사가 되었을 때 수업 중에 여러분의 행동과 몸짓과 말에서 비롯될 에피소드의 많은 부분은 여러분이 중고등학교 때 경험했을 국어 교사의 행동과 몸짓과 말을 모방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여러 사람에게서 반복해서 확인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지식이 형성되자 내 제자들에게 이미 예고하면서 이를 실험해 보았다. 십여 년 동안 교사가 된 여러 졸업생들이 이 말을 확인해 주었다. 말하자면, 내가 수업에서 했던 예시, 인용한 작품들, 그 작품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들, 이런 것들을 수업 때 그대로 반복한다고.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등학교 때나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들, 예시들, 논리들, 그런 것들이 자신의 수업에서 자신도 모르게 언급되고 있다고.
나는 이제 여러분에게 '언어의 사회성'에 관한 예화를 하나 소개할 것이다. 왜 뜬금없이 '언어의 사회성' 얘기냐고? 일단 계속 읽어 보라. 여러분은 여기서 읽었던, 그리고 수업을 통해 듣게 될 예를 평생 잊지 않게 될 것이고, 여러분이 국어 교사로 교실 현장에 있거나 혹은 어느 자리 어떤 시간이든 '언어의 사회성'에 대해 말해야 할 상황을 맞게 되었을 때 이 이야기를 꺼내게 될 것이다. 내기를 해도 좋다.
그리고 그때 내가 이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도 함께 떠올리게 될 터인데, 그렇게 될 것이기에 지금 미리 부탁을 하자면, 자신의 경험이 자신의 실행이 된다. 그래서 좋은 경험을 해야 하는 것이다.
교수가 해 주는 예화 (이 예화는 수업이 끝난 뒤에 추가로 입력할 예정이다.)
* 이 수업은 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캠퍼스 과제 게시판에서 과제 내용을 확인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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