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5일 서울대에서 열린 한국어교육학회 제295회 전국학술대회의 기조강연으로 발표한 내용입니다.)
피와 혁은 둘 다 가죽을 뜻하는 한자이다. 피(皮)는 짐승의 가죽을 털이 있게 가공한 것을 말한다. 여우의 껍질로 목도리를 만들거나, 호랑이 가죽(虎皮)으로 옷이나 깔개를 만든 것을 이른다. 이렇게 모피(毛皮)는 짐승의 털을 그대로 살려서 가공한 제품을 말한다. 혁(革)은 소가죽 등으로 짐승의 털을 모두 뽑아 없앤 상태로 가공한 가죽제품을 혁이라고 한다.
혁대나 구두, 장갑, 가방, 가죽점퍼 등을 만드는데 염색까지 하여 짐승의 피(皮)와는 전혀 다르게 만든 제품을 혁(革)이라고 한다. 혁명(革命)에 가죽 혁 자를 쓰는 이유는 제도(制度), 경제(經濟)의 조직(組織) 따위를 급격(急激)하게 근본적(根本的)으로 전과 아주 다르게 바꾸는 것을 혁명이라고 한다. 즉 기존의 관습(慣習)ㆍ양식(樣式)ㆍ이념(理念) 따위를 근본적(根本的)으로 바꾸는 일을 가죽혁(革)에 비유하여 쓴 한자이다.
- 피(皮)와 혁(革)은 어떻게 다른가? (충주신문, 2012. 6. 12)
2022 개정 교육과정과 이른바 ‘변혁적 역량’의 문제
1.
2022 개정 교육과정은 2015 개정 교육과정으로부터 ‘역량’ 개념을 물려받았다. 여전히 ‘역량’의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핵심역량’과 ‘추구하는 인간상’ 사이의 관계도 모호한 상태이다. 여기에 ‘핵심역량’에 대해 벌어지고 있는 논란 중 근본적이라 여겨지는 두 가지 문제가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 국어과 핵심역량을 ‘비판적⋅창의적 사고 역량, 디지털⋅미디어 역량, 의사소통 역량, 공동체⋅대인 관계 역량, 문화 향유 역량, 자기 성찰⋅계발 역량’이라고 한다면, 이들 역량 중 어떤 것을 함께 가지고 있는 타교과의 교육은 불필요한 것인가? 다시 말해, 이른바 ‘범교과적 핵심역량’과 교과 중심 교육과정은 병행 가능한가에 관한 문제. 그리고 ‘핵심역량’이 경영 용어로서 조직론에서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개념들 중 하나라는 사실, 그리고 인간을 인적자원의 관리 차원에서 규정한 개념이라는 사실이 간과된 채로 보통 교육의 담론장에서 통용되는 것이 마땅한 일인가? 더 나아가 보통 교육을 규정하는 담론의 기저 논리로 사용되는 것을 이미 굳어진 관념인 것처럼 방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
이 논의의 종착점인 새로운 국어 교과서의 향방을 미리부터 말하자면, 아마도 이 논의와 무관하게, 핵심역량과 무관하게, 그리고 이번 학술대회가 견지하고 있는 대주제의 핵심 개념인 ‘변혁적 역량’과도 무관하게, 그래서 교육과정의 ‘변혁적일 수 있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기존의 교과서 개발 체제를 유지하면서 무탈하게 교과서가 개발되는 결말을 보게 될 것이다. 그래도 기조 강연이라는, 토론의 무시무시한 감시를 잠시 벗어난 자유로운 논의의 기회를 얻은 김에 내가 선 곳의 바닥을 새삼 다져 보고자 한다.
갈 길이 먼데 장황설을 늘어놓으려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핵심역량의 문제는 아직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심역량으로부터 교육의 실행까지 이어지는 경로에는 인용과 망각의 논리가 작동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해 오던 교육을 하게 될 것이다. 셋째, 두려운 것은 핵심역량의 실제적인 작동이나 영향력이 아니라 그것과 무관하게 실행되는 교육이 핵심역량을 실재하는 것처럼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넷째, 오늘 다루려는 논의는 학술대회의 대주제인 <변혁적 역량과 개정 교육과정의 국어 교과서>의 틀 안에서 진행될 것인데, 여기서 ‘변혁적 역량’이란 핵심역량과 같은 맥락 기반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것의 표현법에서부터 의미의 맥락에 이르기까지 회의적이고, 이것이 내게 주어진 문제 상황이다.
2.
우리에게는 번역이 먼저이므로, 번역된 용어로부터 바닥을 확인하기로 한다. 서두의 인용에 기대어 보면, 어의에 따라 ‘변혁’이나 ‘혁명’이나 또 ‘혁신’은 그 뜻의 포괄 범위나 대상은 차이가 있더라도 완전히 새롭게 바꾼다는 기본 의미는 두루 통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각 단어가 지닌 함축은 서로 구분되는 사용 맥락 속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 언어 직관으로는 ‘변혁’은 ‘혁신’보다는 근본적인 변화를 지시하고 ‘혁명’보다는 선행하는 전회 과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그 어떤 조직이나 제도, 혹은 사회가 새로운 것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그 변화를 단절적인 것으로 만드는 정신적 태도의 근본적 전환을 ‘변혁’이라 이해하게 만든다.
용례로 보면,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인 ‘RISS’에는 ‘변혁적’으로 검색되는 1,398개의 논문이 있다.(‘변혁’으로는 8,105개) 이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발견되는 일부 예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리더십’과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변혁적 역량’은 OECD(경제 협력 개발 기구)에서 기획한 ‘Education 2030’ 프로젝트가 제안한 transformative competencies의 번역어로서 사용되면서 최근 RISS.kr(학술연구정보서비스)에 추가된 양상이다.
- ‘변혁적 청년 운동론의 올바른 정립을 위한 시론’(1989)
- ‘한국 사회의 변혁운동과 변혁적 민중언론의 위상 및 전망’(1989)
- ‘탈춤에 형상화된 ‘성’의 민중적 인식과 변혁적 성격’(1996)
- ‘변혁적 리더쉽에 관한 연구’(1996)
- ‘대학 총장의 변혁적 지도성에 대한 연구’(1997)
가장 이른 시기의 예들이란 ‘변혁적’이 revolutionary의 번역으로 쓰인 것들을 말하는데, 영문 초록이 없는 일부 논문들에서는 명시적으로 번역어의 원문이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앞의 예와 비슷하게 유표화 표지를 가지고 있는 ‘혁명적’을 대체하는 용어로 쓰였다고 이해된다. 그런가 하면 천 개가 넘는 검색 결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변혁적 리더십’에서는 ‘변혁적’이 transformational의 번역어로 쓰였다. 이 용어 역시 조직론의 한 분야인 인간 관계 이론을 출발점으로 삼는데, 1978년 James MacGregor Burn이 처음으로 제안한 transforming leadership을 Bernard. M. Bass가 새롭게 용어화하여 발전시키고 이후 많은 리더십 이론가들에 의해 체계화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RISS를 기준으로 할 때, ‘변혁적’이라는 말은 최소한 3개의 원어를 지시하고 있는 셈이다.
초기 용례를 포함하여 어떤 용어가 ‘변혁적’으로 번역된 것은 그것이 갖는 ‘전혀 새로운’의 함의를 담아내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수많은 용례 덕분에 주류적 번역이 되어 버린 ‘변혁적 리더십’이 개인의 비전을 (조직에 대한 강한 일체감을 바탕으로) 조직의 비전으로 전환시키고 개인의 성취 욕구를 조직의 성과 달성에서 찾게끔 새로운 비전과 새로운 목표로의 동기 부여하는 강한 리더십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보면, ‘전환적’, 혹은 ‘혁신적’을 번역어로도 쓸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transformational이 학술적으로는 이미 ‘변혁적’이라는 표현을 선점한 셈이 되었으므로, ‘변혁적 역량’에서의 transformative는 다른 표현을 찾는 것이 적절했을 것이다. 사용 맥락으로 보면, ‘변혁적 역량’은 차라리 ‘변형적 역량’이라고 했으면 오히려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다.
3.
번역어가 주는 어감과 연상 체계는 이것이 창의 융합을 내세운 2015 개정 교육과정 이래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도 교육과정 내용 체계와 연결된, 혹은 지향적인 통합 역량처럼 여겨지게 하는 효과가 있지만, 이 역량의 출처인 OECD Education 2030 프로젝트가 미래 사회의 필요 핵심역량을 도출해 내었던 과정에 주목해 보면 실제 맥락은 그렇게 다른 의미를 갖게 될 수도 있다. ‘변혁적 역량’은 지금의 학생들이 성인이 되어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갈 때 겪게 될 여러 사회적 문제들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면서 개인과 사회의 웰빙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함께 실현해 가기 위해 필요한 미래 사회의 필요 핵심역량으로 규정되어 있는 바, 여기에는 몇 가지 놓쳐서는 안 되는 초점들이 있다. 미래 사회의 필요 역량, 사회적 문제 해결, 그리고 과업 떠넘김이라는 드러나 있지 않은 의도가 그것이다.
미래 사회가 밝기만 하지는 않을 것임은 분명하고, 가능한 위험은 ‘보는 것보다 가까이 있다.’ 그 위험에 대비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미래를 대비하는 현재의 교육이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중핵적 과제임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을 지금의 학습자들에게 기대할 수는 있다. 다만 그것이 학습자의 성장과 성취, 꿈, 자아 실현 등과 같은 학습자의 미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이다. ‘역량’ 개념 자체가 인적 자원 관리 분야에서 사용되던 것으로서 경쟁력을 강조하는 성과주의적인 관념이다. 이 개념이 우리나라 국가교육과정에 도입되고 교육 담론의 중심 자리에 놓이게 된 것이 OECD의 DeSeCo 사업과 상관성이 있음은 시사하는 바 크다. 같은 길을 ‘변혁적 역량’도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변혁적 역량’은 전혀 새로운 옷을 입고 다시 등장한 3, 4차 교육과정 때의 능력과 유사해 보인다. 학습자를 중심에 두고, 학습의 과정에 관심을 갖는다는 교육과정이 처음 시작된 지 30여 년이 되었지만, 교육과정에 기술된 성취기준은 여전히 성인의 시선에서 기술된 성인적 관심사처럼 기술되어 있다. 거기에는 해야 할 일들을 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묻는 물음들이 가득 차 있는 대신,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묻는 물음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학습자가 ‘지금 여기’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의 가능성은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미뤄둔다는 것이 이 역량 개념의 작동 효과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이 ‘변혁적 역량’에 대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지금 2022 개정 교육과정을 ‘어떤’ 교육적 관심에 기초하여 재해석을 하고 있는 중이고, 그것을 공식화하려고 하고 있는 중이며, 공교롭게도 그것이 여차하면 ‘자아를 발견하기’도 전에 노동 인력이자, 인류 문제 해결자이자, 사회 발전의 역군이 되도록 하는 ‘어떤’ 교육을 실행하기로 한 상황임을 발견하게 된다. 아동이 성장하여 사회에 나서게 될 때, 거기에는 변형적이어야 할 것들이 물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내 의견으로는, ‘변혁적 역량’이라는 것은 기존의 것들과 변별되는 지식과 기능과 태도 및 가치들을 독립된 하위 요소로 갖는 어떤 종합적 능력으로 실현해야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교육과정을 통해 이미 경험하고 학습하여 내재화했던 능력들이 삶의 전환기에 이행적이고(transitional) 전환적인(transformational) 것으로서 실현되는 것이 아닐까. 이는 ‘변혁적 역량’이 미래 사회에 대비한 미래 세대의 능동적인 대응이 중요해졌다는 현세대의 절박감을 담은 교육적 전망, 혹은 캐치프레이즈로서는 이해되지만, 교육의 방향을 바꾸고 교육의 내용을 뒤집어야 할 새로운 논리가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판단을 말하는 것이다. 절박감이 이기심의 발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학습자의 경험과 학습의 가능성
1.
우리가 해 온 교육이 과도적인 것들의 완성된 형태였는지, 아니면 완성된 것들의 과도적인 형태였는지를 생각해 보면, ‘변혁적 역량’의 교육과정적 실현을 모색하는 일은 다른 해법을 찾게 할 수도 있다. 마치 내가 학술대회의 대주제를 거스르는 것으로 보이는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처럼. 우선 이에 대한 내 시각을 먼저 밝히자면, 나는 우리가 실행하는 학령기 아동에 대한 모든 교육은 각 시기, 각 단계마다 완성된 형태를 취하며 또한 취해야 한다는 믿음에 동의한다. 아동은 성장의 각 단계마다 완성된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고 또한 완성된 존재로서 살아야 하는 저마다의 과제를 안고 있기도 하다. 우리가 교육을 말할 때에는 아동이 장차 성장하여 어떤 독립적 삶을 살아갈 수 있느냐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만큼 그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생활과 감정, 당장의 해결해야 할 문제, 작은 규모라서 단순해 보이지만 실상은 완벽하게 복잡하기도 한 인간관계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교육이 학습을 기반으로 실현된다고 할 때, 우선적으로 실현되는 교육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이다.
2.
일관된 형태로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학습자를 교육의 중심에 두자는 교육과정적 관심은 다양한 시도와 노력들로 전개되어 왔다. 5차 교육과정과 7차 교육과정은 활동 중심 교육과정을 표방하며 학습을 활동으로 재진술하면서 학습자를 교육의 주체로 내세운 바 있다. 이 경우 활동의 계열화와 양상은 학습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학습자의 학습 경험을 객관화한 충분한 관찰 자료 축적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활동의 계열화는 지식의 내용 요소들을 계열화한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교과서 개발자들의 상상력 범위 내에서 활동의 양상이 제안되었다. 교과서 밖의 다양한 새로운 활동들이 내용과 결합하지 못했다.
2007 개정 교육과정에서 성취기준 개념을 도입했을 때 두 가지 측면에서 학습자 중심의 교육을 특징화할 수 있었다. 첫째는 학습을 발달적 과정 속에서 구체화하려 했다는 것, 곧 학습할 내용들이 발달적 수준과 범위의 틀 내에서 교육과정 전과정을 두고 계열화하였다는 것이다. 학년별 위계성의 타당성, 적절성 문제와는 별개로 6개 영역 10개 학년의 매트릭스 위에 구체화된 학습 요소들을 배열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했던 원리가 학습자의 발달이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의가 있다. 다만 학습 결손의 보완 문제(보충적 교육과정으로 해소되지 않는)와 잠시 논외로 남겨두었던 위계성의 문제는 실제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근본 문제였음이 밝혀졌다.
2009 개정 교육과정에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학년군 개념을 도입했고 교과서로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이 개념의 현실화는 실패했다. (성취기준은 학년별로 분리되었고, 학년 간에는 성취기준의 중복이나 통합, 반복 등이 허용되지 않았다.) 다만 2007 개정 교육과정의 보완 요구와 별개로 사회구성주의적 관점의 교육적 대응이 교육과정 실행 차원에 작용하고 있었다고 할 만한데, 비고츠키의 ‘잠재 발달 영역(zone of proximal development)’ 개념이 본격적으로 논의되면서 교수 행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생겼고, ‘교수학적 변환(didactical transposition)’의 교육과정적 투입을 본격적으로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
2015 개정 교육과정부터 ‘미래 사회를 대비하기 위한’ 역량 개념이 도입되면서 학습의 방향과 성취 정도에 대해 사회적 요구 차원에서 제기되는 일정한 방향성에 대한 당위적 설정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184쪽으로 구성된 <국어과 교육과정>(교육부 고시 제2015-74호 별책 5)에 600번 가까운 ‘학습자’가 등장하면서도 이전 교육과정에서와 같은 문제틀 차원에서 학습자를 교육의 중심에 두는 설계는 별로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학년군, 성취기준, 활동 중심 학습, 수준별 구체화 등이 모두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지만 각각을 실현하는 데서 겪게 되었던 한계들은 마찬가지로 해소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다만 교육과정 문서 밖에서는 플립러닝(flipped learning)이라든가 문제 기반 학습, 협동 학습 등이 학교 현장에서 다양하게 다루어졌다. 교수법 차원에서, 그리고 그보다 큰 비중으로 교육과정 설계의 차원에서. 현장의 학습자 중심 교육이 교육과정을 고려한 것인지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3.
지금까지의 예에서 그래 왔고, 현재도 그러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교육과정과 학교 현장의 학습자 중심 교육이 논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착종 상태에 있는 모습이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그러하다.
- 국어과 교육과정이 교육과정 총론과 교육 내용에 대한 같은 이름의 다른 해석을 부여하고 있을 수 있다.
- 국어과 교육과정이 학습자 중심의 국어교육에 대해 일관되거나 특정한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을 수 있다.
- 국어과 교과서들이 국어과 교육과정과 성취기준에 담긴 국어과 학습의 성격과 내용에 대해 다른 해석을 부여하고 있을 수 있다.
- 현장의 국어교육이 국어과 교육과정의 성취기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
- 현장의 국어교육이 국어과 교과서가 제시하는 학습 원리와 무관하게 교육 실행을 하고 있을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동시적으로, 그리고 제각기 일어나고 있을 수 있다.
내 생각에는 마땅히 우리가 당혹해 할 만한 지점은 이러한 뒤엉킴의 결과가 학습자 중심의 국어교육을 실행하려는 현장의 여러 시도들로 귀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변혁적 역량’ 같은 것은 들어본 적도 없었을, 내 학창 시절의 국어 선생님들이 교육과정에도 그다지 관심 없는 채로, 교수법이니 학습모형이니 하는 개념들은 알기도 전에, 교과서에 밑줄 긋고 읽고 설명하며 수업을 하시던 그때, 내게 그 ‘변혁적 역량’이 생겨날 길은 없었겠느냐 하는 의문과도 같다. 앞으로 대부분의 학령기 아동들이 이 ‘역량’을 갖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도 이들과 다르게 내게서, 내 또래와 그 전후 세대에게서 그것을 찾을 수 없다고 여기게 되는 것은 매우 이상해 보이고 또한 현실적이지 않게 여겨진다. 저마다 자기 시대를 전환기로 살아왔고 어느 때고 덜하고 더한 위기가 있지 않았을 것이니, 이를 인정한다면 내게는 ‘변혁적 역량’이라는 부르게 될 상태의 어떤 능력이 그 이름을 부르기 전부터 이미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고 또한 그것은 내가 살아온 시대의 교육과정이 교육적 지향과 내용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딘가에서 이를 실현할 단초를 마련해 두었을 것이라 충분히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다음 두 가지 생각에 대해 동조를 얻고자 한다. 첫째, 앞 시대의 교사들이 목표하지도 않았고 실행하지도 않았으나 그들의 교수 행위와 비교수적 교육적 상호작용 속에서 이 ‘역량’의 발현에 기능하는 내용들이 다루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를 잠재적 교육과정이라 불러도 좋고 명시적 교육과정의 부수된 효과라 불러도 상관 없다. 둘째, (‘변혁적 역량’이 향후 교육의 중핵적 교육 목표로 인정되고, ‘핵심역량’의 새로 추가된 하나가 아니라 그것들의 통합적이거나 융합적인 실현태로서 설정된다면, 혹은 ‘핵심역량’의 형성이 ‘변혁적 역량’으로 총화되는 것으로서 인정된다면) 이를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는 성취기준들에 대한 교육보다는 전술한 잠재적, 혹은 부수적 교육이 오히려 더 본질적 교육 내용을 다루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생각은 교육과정이 제시하지 않은 ‘변혁적 역량’을 교육과정 실행의 중심 개념으로 삼는 것이 적합한가에 대한 입장을 정하는 것에 선행하는 중요한 한 가지 판단에 근거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잘못 설정한 성취기준 체계 위에 교육을 수행해 왔던 것은 아닐까?
개발 중인 국어과 교과서들을 단서로 한 생각들
1.
지난 2월 국어과 교과서 개발에 관한 확정 고시가 있고 난 이후, 저자로 참여하게 된 교사와 교수들, 그리고 출판사는 저마다 교과서 분석과 체제 논의, 제재 선택, 활동 구안 등에 대한 논의와 고민들을 하고 있는 중이다. 6개월이 안 되는 짧은 집필 기간과 9개월 남짓의 개발 기간이 교과서를 만드는 데 제약 요건이 되고 있지만, 대략 이백여 명이 될 듯한 집필진들은 좋은 교과서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다할 것이다. 교재의 패러다임을 바꿀 만한 교과서가 등장하길 기대해 보고, 참신하고 흥미 있는 제재와 활동을 갖춘 교과서, 학습자의 수준과 흥미를 반영한 교과서, 무엇보다 ‘하나의 브랜드’로서 인식될 만한 교과서를 볼 수 있게 될지 지켜보는 중이다.
그 기대와 상관없이 이 기간이 끝나고 검정 심사를 받기 위해 제출될 교과서의 양태는 지금도 예측 가능하다. 검정 기준에서 정한 교과서의 형식 외에도 각 과목의 교과서들은 비슷한 체제와 구성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 대단원의 수와 단원명, 따라서 당연히 관련 성취기준이 비슷하게 엮일 것이고, 체재 역시 한두 개의 특색 있는 섹션을 제외하면 용어의 차이 정도에서 비슷한 구성을 갖게 될 것이다. 적어도 6차 교육과정 교과서 개발 참여에서부터 교과서를 만들어 온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러하다. 일반적인 인식과 다소 차이가 있는 국정 교과서의 자율성에 비하면, 검정 교과서들은 독자적이기 힘든 검정 심사의 두려움을 본원적으로 안고 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이해해 주길 희망한다.)
이를 넘어서는 부분에서의 아쉬움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미래의 몫이다. 만약 다음의 것들이 포기되지 않는다면.
- 학습 내용은 학습자가 수행할 수 있는 상태를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있어야 한다. 개념적으로, 혹은 활동의 성격으로. (↔ 성취기준 적용 시 고려 사항)
- 학습에 사용되는 언어 자료는 학습자의 경험 세계와 부합해야 하며, 학습자의 어휘력과 어휘 활용 수준, 학습자가 정서적 경험 양상들에 대응하여 조정되어야 한다. (↔ 교수 학습 방법)
교사, 또는 교수자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어떻게 학습하게 할 것인지가 주된 관심이 될 수밖에 없다. 교육과정 문서의 일차적 독자는 교사나 교수자이다. 하지만 그 외의 정보들이 교사나 교수자에게 내재화되어 있다고 볼 어떤 근거도 없다. 사실을 따지면, 이 정보들은 교육과정 문서에 기술되어 있어야 한다.
교육과정 문서가 학습자 중심의 국어교육을 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는 성취기준의 기반이 되는 학습 내용 요소가 학습의 관점에서 선별되고 조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아동의 성장과 발달을 고려하여 학습 내용의 범위와 수준을 세분화했다던 2007 개정 교육과정에서조차도 그 내용이라는 것이 성인 언어 화자의 관점에서 선별되고 조직된 것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후로 학년군 개념이 등장하게 된 것은 전술한 바와 같으나, 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잠재 발달 영역은 이미 성취기준에 개념적으로 함축된 것이라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성취기준 상의 지식이나 기능, 태도 등이 학습자에게 유의미하게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교과서로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그 기준의 수준별 분포, 혹은 위계가 함께 구체화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지식 자체의 위계성을 고려한 구체화, 지식 사용의 수준을 고려한 구체화, 그리고 언어 수행의 양상을 고려한 구체화 등이 포함될 수 있다.
2.
우리는 그 가능성의 일단을 성취 수준 연구와 평가 기준 연구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연구들은 모두 교육과정 성취기준으로부터 계기적으로 추진되는 것들이다.(성취기준→성취수준→평가기준) 논리적으로 보자면, 이들 연구에서 도출되는 성취수준과 평가기준 들이 실제 학습자의 학습을 구체화하는 것이어서 교과서 개발과 연계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교육과정 수준의 공식성을 갖지 못하고 있으며 수준의 구분을 명료하게 하는 문제, 그것의 논리적, 실제적 근거를 확보하는 문제, 학습의 과정과의 연계성을 마련하는 문제 등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있다.
다음은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초·중학교 국어과 평가기준 개발 연구>(가은아 외, 2016)에서 제안한 ‘중학교 1~3학년군 듣기ㆍ말하기 영역의 성취수준’과 ‘평가기준’이다. 성취수준은 학년군 전체에 대해 설정되어 있고 평가기준은 성취기준별로 구분되어 있다.
이 평가기준에 뒤이어 4차시에 걸친 수행 과제가 예시되어 있고, 이 과제 수행에 대한 평가기준이 제시되었다. 다음은 수행과제 1에 대한 채점기준이다.
학습자의 학습 가능성은 채점 기준을 통해 미리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교과서 개발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활동의 수준을 적정화하고 계열화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만약 다음과 같은 개선이 이루어진다면, 그 가능성은 더 높아질 수 있다.
- 채점기준은 활동의 양이나 수월성이 아닌 활동의 성격과 경험된 학습 내용에 따라 구성되어야 한다.
- 평가기준은 성취기준을 구성하는 요소(지식, 언어 자료, 수행 양상)에 대한 성취수준을 근거로 척도화해야 한다.
- 성취수준은 학습의 경험을 정성적, 정량적으로 분류하는 바탕 위에서 학습 수행의 성격(행동 동사로 기술되는)에 따라 구분되어야 한다.
- 성취기준은 그에 대응하는 성취수준과 함께 개발되어야 한다.
만약 이렇게 교과서를 개발하려 한다면, 그에 뒤따르는 과제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 어떤 학습자를 독자로 하여 교과서를 개발할 것인가?
- 학습자에게 어떤 학습의 경험을 갖게 할 것인가?
- 학습자의 성장에 교과서가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것인가?
이 문제를 교과서 개발자들에게 맡기는 일은 할 수 없는 일을 시키는 것이기에 부당하다. 결국 교육과정 논의로 다시 넘어 왔다.
3.
교과서 작업을 통해 학습자 중심의 교육은 어떤 것일까 모색해 본 적이 있다. 다음은 그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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